어촌여지도2024-03-19T16:03:06.000Z관리*바다 갤러리 광활한 바다 위의 배와 인간<p>바다 갤러리</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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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광활한 바다 위의 배와 인간</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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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글 이연식(미술평론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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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옆구리의 흰 연기</p>
<p>유럽의 회화 중에는 바다 위의 범선이 많다. 그런데 이들 그림을 보면 배의 옆구리에 흰 연기가 달려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가까이 붙어 있는 다른 배를 향해 대포를 쏘고 있는 것이다. 그림 속에서 서로 싸우는 배들은 네덜란드나 영국, 프랑스나 스페인의 배들이다. 왕실 해군의 전함일 수도 있고, 무장한 상선이거나, 정부의 허가를 받아 적국의 상선을 나포하는 사략선일 수도 있다. 이들은 도버 해협, 지중해, 카리브 해, 인도양 할 것 없이 온 세계의 바다에서 격돌했다. 상대에게 포탄을 안겨 배의 돛과 밧줄을 찢고 돛대를 부러뜨리고 승무원들을 죽였다. 저마다 바람과 해류에 온 신경을 기울여도 모자랄 만큼 위험한 바다에서, 다른 배를 항해 불능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이 배들이 바람의 방향에 맞춰 돛을 다뤄가며 이리저리 방향을 돌려가며 적에게 근접하여 포격을 가하는 복잡한 기술은 경이롭다. 하지만 두렵고 위태로운 바다 위에서 프랑스와 영국의 구분은 무슨 필요이며, 무사히 항구에 닻을 내리는 것보다 중요한 목적이 또 뭐가 있다는 말인가?</p>
<p>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지리상의 발견’을 맞으면서 유럽인들은 바다와 배를 그리기 시작했다. 주로 네덜란드 농촌의 풍속을 많이 그린 것으로 유명한 화가 피터르 브뢰헬(Pieter Brueghel de Oude, 1525년경-1569년)은 드물게 배와 바다를 그렸는데, 그가 남긴 몇 점 안되는 해양 풍경화 중 하나는 나폴리 항구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브뢰헬은 화가로서 자리를 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네덜란드를 떠나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지로 돌아다니며 회화를 공부했다. 브뢰헬이 타지에서 어떤 식으로 지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무렵에 그린 <나폴리 앞바다>는 이탈리아의 풍광을 직접 묘사한 것으로, 브뢰헬이 당시의 이탈리아의 예술에서 습득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가까운 것을 크게, 먼 것을 작게 그리면서 드넓은 공간을 현실감 있게 구성하는 원근법이었다. 성벽으로 둥그렇게 둘러싸인 항구도시 앞쪽에 범선들이 유유히 움직인다. 그런데 찬찬히 보면 이 배들은 서로를 향해 대포를 쏘고 있다. 갤리선이 항구를 향해 전진하고, 범선들은 격돌하고, 화면 왼편 구석에서는 벌써 몇 척의 범선이 가라앉고 있다. 얼핏 보기에는 평화로운 항구의 모습 같지만 실은 아비규환이다. 브뢰헬이 묘사한 것이 어떤 전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실제로 벌어진 사건인지 어떤지도 분명치 않다. 아마도 브뢰헬이 상상으로 구성한 전투일 거라고 짐작된다. 한데 이 그림에는 브뢰헬이 인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드러나 있다. 멀리서 보면 느긋한 이야기, 가까이서 보면 끔찍한 비극이다. 브뢰헬은 네덜란드로 돌아간 뒤로 농민의 생활을 주로 그렸는데, 그런 그림들에도 묘하게도 냉소적인 느낌과 거리감이 담겨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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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표정 없는 세상의 두려움</p>
<p>브뢰헬의 작품 중에서 바다를 그린 그림으로는 <이카로스의 추락>이 가장 유명하다. 이카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유명한 젊은이다. 이카로스의 아버지는 다이달로스인데, 건축가이자 기술자로서 온갖 물건을 다 만들었던 다이달로스는 크레타의 왕 미노스의 명령을 받들어 유명한 미궁(迷宮)을 만들었다. 그런데 미노스는 미궁을 만드는 일이 끝나자 다이달로스 부자(父子)를 높은 탑에 가둬 버렸다. 탑을 빠져나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이달로스는 새의 깃털을 모았다. 모은 깃털을 밀랍으로 이어 굳혀서 큼지막한 날개 두 쌍을 만들었다. 자신과 아들이 한 쌍씩 달고 날아갈 생각이었다. 날개를 달고는, 날아가기 전에 아들에게 당부했다. 너무 높게 날면 햇빛 때문에 밀랍이 녹을 것이고, 너무 낮게 날면 바닷물을 머금어 날개가 무거워질 것이다. 반드시 중간 높이로 날도록 해라. 하지만 이카로스는 막상 날기 시작하자 들뜬 나머지 한껏 높이 날아올랐다. 밀랍이 녹으면서 이카로스는 바다로 떨어져 죽었다.</p>
<p>제목으로 짐작하면서 이 그림 속에서 이카로스를 찾다 보면, 이야기의 주인공이 그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작아서, 그림이 주인공을 다루는 방식이 너무도 야박해서 놀라게 된다. 화면 오른편 구석, 바람을 받아 돛이 팽팽한 배의 앞쪽 바다에 버둥거리는 두 다리가 보인다. 주변에는 깃털이 날린다. 이카로스라는 걸 알 수 있다.</p>
<p>뱃사람들, 낚시꾼, 양치기, 그리고 화면 앞쪽에 커다랗게 그려진 농부 등, 많은 사람이 등장하지만, 아무도 이카로스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사람이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모습이 신기했을 테고, 그렇게 날던 사람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모습은 더욱 더 눈길을 끌었을 텐데도, 기이하게도 그림 속의 사람들은 모두가 눈길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고 있다. 마치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이카로스의 운명을 외면하고 있다.</p>
<p>이카로스의 이야기는 인간의 교만을 가리키기도 하고, 꿈과 이상에 대한 동경을 나타내기도 한다. 때로는 황홀한 상승에 따라오는 끔찍스러운 추락을 암시한다. 이 그림은 브뢰헬의 그림으로 여겨져 왔지만 여러 모로 의심스럽다. 특히 앞쪽의 농부를 묘사한 필치를 보면 도저히 브뢰헬이 그렸다고는 보기 힘들 만큼 조잡하고, 전체적으로 화면을 원근법으로 구성하는 솜씨도 들쑥날쑥하다. 앞서 본 <나폴리 앞바다>와 비교하면 원근법의 미숙함이 두드러진다.</p>
<p>애초에 브뢰헬이 이카로스를 그린 그림이 따로 있었고, 누군가가 그걸 모사한 그림이 이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브뢰헬이 그린 그림을 그의 아들이 모사한 작품도 꽤 많은데, 이 그림을 그린 화가의 솜씨는 ‘아들 브뢰헬’보다도 떨어진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 그림은 브뢰헬 자신의 그림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브뢰헬이 세상을 대하는 방식을 어느 정도 보여준다. 드넓은 공간 속에 주제를 짐짓 무심하게 배치한다. 세상 한 구석에서는 누군가 불행한 일을 겪고 있는데, 나머지 세상은 평온하기 이를 데 없다. 온 세상이 평온하기에 사건은 더욱 기이하고 더욱 비극적인 것이 된다.</p>
<p>이카로스를 다룬 다른 회화들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그림에 다이달로스는 보이지 않는다. 화가는 새의 시선을 취하고 있고, 다이달로스는 지금 날개를 달고 있을 테니, 이는 다이달로스의 시선이다. 아버지는 광활한 세계가 자신의 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삼켜 버리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바다를 개척하면서 유럽인들은 표정 없는 세상의 거대함과 두려움을 의식하게 되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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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진설명</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4902847_0.jpg" alt="ilovepdf_com-142.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찰스 오거스트 몬위크, <영국의 ‘산피오렌초’ 호와 프랑스의 ‘피에몽테즈’ 호의 전투, 1808년 3월 6~8일>, 1842년.</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4910759_0.jpg" alt="ilovepdf_com-143.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브뢰헬, <나폴리 앞바다>, 1558년경.</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4915656_0.jpg" alt="ilovepdf_com-145.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브뢰헬, <이카로스의 추락>, 1560년경.</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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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4919749_0.jpg" alt="ilovepdf_com-144.jpg 이미지입니다." width="174" height="234" /></p>
<p>이연식</p>
<p>미술사가. 그림과 텍스트를 함께 보고 쓰고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한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미술이론과를 졸업했다. 『유혹하는 그림, 우키요에』 『아트 파탈』 『응답하지 않는 세상을 만나면, 멜랑콜리』 『괴물이 된 그림』 『이연식의 서양미술사 산책』 등을 썼고, ‘무서운 그림’ 시리즈, 『다케시의 낙서 입문』 『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 『모티프로 그림을 읽다』 『레 미제라블 106장면』 등을 번역했다.</p>
<p> </p>2017-09-26T02:17:32.000Z2017-09-26T04:50:36.000Z관리*바다와 영화 홍상수 감독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p>바다와 영화</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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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홍상수 감독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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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외롭고 쓸쓸한 겨울 바다</p>
<p>함부르크와 강릉</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4723013_0.jpg" alt="ilovepdf_com-140.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글 한창호(영화평론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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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홍상수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슈베르트의 ‘현악5중주’ 선율로 시작한다. 슈베르트가 죽기 불과 두 달 전에 작곡한 작품으로, 비극적 선율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레퀴엠처럼 연주되기도 한다. 그만큼 슬프고 자기 연민을 느끼게 만든다. 특히 2악장 아다지오는 슈베르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듯, 현악기의 애잔한 소리들이 필멸의 슬픈 운명을 위무하듯 연주된다. 누구라도 ‘현악5중주’에서는 죽음처럼 외롭고 쓸쓸한 느낌을 받을 것 같다. 이 음악으로 문을 여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슈베르트의 슬픔으로 영화 전체의 감정을 조절하고 있는 셈이다. 슈베르트의 음악이 가장 큰 공명을 울리며 퍼져가는 곳이 바로 함부르크와 강릉의 바다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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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슈베르트 ‘현악5중주’의 슬픔</p>
<p><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주인공인 영희(김민희)는 배우다. 이미 결혼한 영화감독과 제법 사귀었는데, 최근에 그 관계 때문에 적지 않은 아픔을 겪었다. 영희가 마음 둘 데 없어, 찾아간 곳이 독일의 항구도시 함부르크다. 선배 언니(서영화)가 그곳에 살고 있다. 영희는 낯선 도시에서 동네 주변과 공원을 걷고, 선배와 이야기도 하며, 서울에서의 일을 잊으려고 애쓴다. 영희는 선배의 독일인 지인들과 함께 저녁 무렵 해변을 찾았다. 푸르스름한 색깔이 바다와 해변을 감싸고 있어서인지, 영희의 마음은 더 차갑고 외로워 보인다. 영희는 말로는 그 남자를 기다리지 않는다면서, 얼마나 보고 싶은지 해변의 모래밭 위에 그 남자의 얼굴을 그리기도 한다. 최근에 머리를 밀다시피 깎아 대머리처럼 보인다는 남자의 얼굴이다. 일행들은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때 바닷가엔 슈베르트의 5중주가 들려오고, 무슨 영문인지 영희는 혼절한 채 검정색 복장의 어느 남자의 어깨에 얹힌 채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p>
<p>홍상수의 영화에서 현실과 환상(주로 꿈)이 섞이는 초현실적인 장면은 이제 하나의 클리셰가 됐다. 함부르크 시퀀스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남자는 바로 그런 초현실적인 존재다. 그는 영희가 공원을 걸을 때 갑자기 다가와 마치 죽음의 메신저처럼 “지금 몇 시냐?”고 묻더니, 이번엔 영희를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듯, 어깨에 그녀를 걸머지고 ‘저쪽으로’ 등을 보인 채 걸어가고 있다. 말하자면 죽음의 강력한 비유법인 셈인데, 아마 영희의 아픔이 죽음과 같으리라는 상상일 테다. 여기서 슈베르트의 음악은 제법 길게, 마치 죽음과 같은 상처를 안은 영희를 위무하듯 연주되는 것이다. 함부르크의 바다는 더욱 푸르게, 결국 검푸른 색으로 변해간다.</p>
<p><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1부와 2부로 나뉜다. 2부가 시작될 때는 아예 크레딧이 새로 뜬다. 그리고는 2부가 곧장 이어지는데, 영희는 강릉의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보고 있다. 무슨 영화인지 영희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다(장-뤽 고다르의 <비브르 사 비>에 대한 강렬한 오마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제 외국에서 돌아온 영희의 강릉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고, 혹은 1부는 그냥 강릉의 시네마테크에서 영희가 본 영화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마치 <극장전>(2005)의 전반부가 현실이 아니라 영화였듯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영희는 ‘영화’ 속 인물과 강력한 동일시를 느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이렇게 홍상수 영화의 특성대로 내러티브 속에 여러 겹으로 해석할 수 있는 장치들을 심어놓아,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1부에 등장한 독일인 작곡가의 말처럼 ‘언뜻 쉬워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복잡한 영화’이다(이게 홍상수 영화의 미덕인데, 동시에 이 점은 국내의 많은 관객에게, 또 해외의 관객에게까지 대중성 확장이란 면에선 단점일 테다).</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4715628_0.jpg" alt="ilovepdf_com-139.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함부르크와 강릉 바다의 대조법</p>
<p>2부의 강릉 이야기에서의 영희도 유부남 영화감독과 사귄 뒤 이별의 아픔을 겪는 배우로 설정돼 있다. 1부가 현실이든 허구이든, 그 속의 영희와 강릉의 영희는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영희는 최근 외국에서 돌아왔고, 강릉에 있는 선배 언니(송선미)와 겨울 바다를 볼 예정이다. 강릉에서도 영희는 ‘그 감독’을 잊지 못해 해변의 모래밭에 그의 얼굴을 그려놓았다. 전날 밤 강릉의 지인들과 진탕 술을 마신 뒤여서인지, 영희는 얼굴을 그려놓은 해변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이후의 이야기는 영희의 꿈이다(홍상수 영화가 그렇듯 이후의 이야기가 꿈이라는 친절한 영화적 장치는 없다).</p>
<p>꿈에서 영희는 장소 헌팅중인 ‘그 감독’의 일행을 만난다. 그런데 그 감독(문성근)은 1부에서 영희가 해변에 그린 ‘대머리’가 아니다. 머리숱이 제법 많다. 눈치 빠른 관객들은 이미 이때 영희가 지금 만나는 감독은 1부에서 말한 ‘그 감독’이 아니란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꿈속의 인물이라 논리적인 잣대만 갖다 대는 건 무리지만, 최소한 문성근이 연기한 꿈속의 감독은 1부에서 영희가 그리워했던 ‘그 감독’은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영희가 함부르크까지 가야할 정도로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긴 ‘그 감독’과의 재회는 영화 속에서 일어나지 않는다.</p>
<p>꿈에서 깨어난 영희는 ‘그 감독’과의 상처로 아파하는 영화 초반부의 그 모습 그대로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영희는 모래밭 위에 누워 있고, 어떤 청년(꿈속의 조감독, 안재홍)이 ‘일어나라’고 깨우고 있다. 겨울 바다에서 그렇게 오래 자고 있으면 위험하다는 이유에서다. 강릉의 겨울 바다는 사람들이 없어 외로워 보이지만, 함부르크와는 달리 제법 햇살이 비치는 밝은 공간으로 표현돼 있다. 영희는 혼자 일어나 모래사장을 걸어가기 시작한다. 이때 슈베르트의 ‘현악5중주’가 길게 연주된다. 여기서의 슈베르트의 음악은 죽음의 진혼이기보다는 생명의 지지로 느껴진다. 청년의 ‘일어나라’는 말처럼, 비로소 혼자 선 영희의 발걸음을 지지하는 낮고 깊은 응원가 같다. 강릉의 바다는 외롭지만, 따뜻한 햇살이 영희의 등 뒤를 밝게 비추고 있는 것이다. 언뜻 보면 단순한 영화가 얼마나 복합적인 층을 만들 수 있는지, 홍상수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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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4719172_0.jpg" alt="ilovepdf_com-141.jpg 이미지입니다." width="139" height="182" /></p>
<p>한창호</p>
<p>영화평론가. 이탈리아 볼로냐대학에서 영화학 라우레아 과정 졸업한 후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영화, 그림 속을 걷고 싶다』 『영화와 오페라』 등이 있으며, 공저로 『필름 셰익스피어』 등이 있다.</p>
<p> </p>2017-09-26T02:15:05.000Z2017-09-26T04:48:34.000Z관리*포구 기행 “지금은 선착장 생기고 큰 배 오가지만 갯벌 달리던 널배로 자식들 키웠지” 순천시 별량면 화포花浦<p>포구 기행</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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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지금은 선착장 생기고 큰 배 오가지만</p>
<p>갯벌 달리던 널배로 자식들 키웠지”</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12847230_0.JPG" alt="P80 화포 일몰.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순천시 별량면 화포花浦</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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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글 김용태 사진 박성배</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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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짜지 않은 바다야 없다지만 그 바다에 사는 사람들의 짠 내 나는 삶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순천시 별량면 화포마을의 포구는 작지만 유난하다. 개펄 위로 수많은 점들이, 그러나 자세히 보면 입체만의 그림자를 가진 생명체들이 우글거린다. 거의 움직이지 않는 칠게들, 작은 예수처럼 물 위를 걷는 망둥어들이 이방인의 출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일을 한다.</p>
<p>작은 포구에 작은 배들이 매여 있다. 가까운 바다에는 수많은 말뚝들이 서 있다. 건간망의 말목들이다. 말목이 박혀 있는 바다라면 수심이 얕은 바다라는 의미다. 화포의 주민들은 근해에 말목을 박아 건간망을 설치하고 조수 간만의 차이를 이용해 각종 해산물을 거둬들인다. 그러나 칠게 금어기인 7월 15일부터 9월 15일까지는 말목에 그물이 걸리지 않는다. 어부들은 그 기간 동안 그물을 수선하고 말목을 고치고 꼬막의 종패를 키운다.</p>
<p>바다가 내어주는 것들을 먹고 사는 사람들은 바다의 섭리를 받아들인다. 그래야 좌절하지 않을 수 있다. 조수 간만이 있어 해산물을 채취할 수 있지만 그 조수 간만이 그물을 찢는다. 그물에 달라붙은 쩍(따개비)이 그물을 찢는 것이다. 조수를 탓할 순 없다. 묵묵히 찢어진 그물을 수선할 뿐이다.</p>
<p>화포마을 포구의 방파제는 세월의 변화를 상징한다. 요즘 화포 앞바다에서는 널배에 탄 아낙을 보기 쉽지 않다. 개펄 위를 미끄러지던 널배를 이제 배들이 대신한다. 지난날 화포 앞바다에서 바다를 향해 나아가던 배들은, 물 위를 떠가는 배보다 펄 위를 미끄러져 가는 널배가 많았다. 길이 약 2미터에 폭은 45센티미터 가량인 널배는 개펄에서 작업을 하는데 있어 요긴한 이동 수단이자 운반 수단이었다. 화포의 아낙들은 한 쪽 무릎을 널배에 대고 남은 다리로 펄을 밀어 널배를 몰았다. 그러면서 꼬막 따위를 채취해 널배에 올려 둔 바구니에 담았다. 어선과 방파제가 흔해지기 전만 해도 화포가 아닌 서남해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던 풍경이지만 이제는 그 모습을 보기 쉽지 않다.</p>
<p>화포마을은 달동네처럼 경사가 가파르다. 그 둔덕의 상단부에 도로가 나 있다. 도로의 위쪽은 도로명 주소가 일출길이고 아래쪽은 화포길이다. 일출길에 사는 정복순(84) 씨는 20세에 순천 오천동에서 화포로 시집을 왔다. 정복순 할머니 집 뒤꼍에서 지난날 사용했던 널배와 만날 수 있었다. 널배는 오래도록 방치한 듯 곳곳이 삭아 있어 쉽게 뭉개졌다.</p>
<p>“잡은 꼬막을 머리에 이고 원창역에 가서 팔거나 순천 아랫장에 가서 팔았어. 원창역 완행열차를 타고 남광주 시장 상인들에게 팔기도 하고.”</p>
<p>정복순 할머니는 널배를 타고 잡은 꼬막을 한 번에 30~40킬로그램씩 머리에 이고 원창역까지 걸었다고 한다. 일단 머리에 이고 나면 중간에 내릴 수가 없었다. 내리면 다시 머리에 일 수 없는 탓이다. 그녀가 보여준 앨범 속 빛바랜 사진들처럼, 세월처럼, 한번 내리면 다시는 일 수 없기에, 고된 짐을 지고 쉼 없이 걸었다. 그렇게 자식들을 길러냈다.</p>
<p>해서일까. 화포의 바람은 세차게 불어도 시원하지가 않다. 밀물을 타고 날아온 바람은 땀을 채가는 대신 끈적거리는 염기를 묻히고 떠난다. 개펄에는 소금기와 땀과 피가 스며들어 있다. 꼬막을 줍느라 펄 위로 손을 젓다 보면 예리한 도치뿔(키조개)에 손을 베기가 일쑤였다. 수만 수십만 번 펄을 밀어댔을 한 쪽 다리와 꼬막 가득한 광주리를 이고 걷던 15리길 중 어느 고행이 더 힘겨웠을까. 어릴 적 서해의 어느 개펄에서 보았던 널배 위의 아낙들이 생각난다. 널배를 미는 아낙들은 파도가 밀고 오는 바람과 닮았다. 멀리서 보면 아름답되 지척에서 보면 고된 일.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자기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 명제가 된 세상이라지만 이전의 세상을 산 탓에 누군가를 위해서만 살았던 사람들. 때문에 그 노동은 숭고하다.</p>
<p>입추가 지났다지만 여름으로 불리길 바라는 오후, 십수 명의 사람들이 화포의 포구에 모여 있다. 물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물이 배를 띄워 올리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화포마을 주민이 아닌 순천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다. 꼬막 종패를 털기 위해 모인 놉이다. 이들은 시간이 흐르고 선착장까지 물이 차면 작은 배를 타고 멀리 보이는 큰 배로 이동한다. 그 배로 갈아탄 뒤 미리 설치해 둔 그물에 붙은 꼬막 종패들을 털어댈 것이다. 종패들이라고는 하나 쉽게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세 시간, 있는 힘 없는 힘을 짜내어 그물을 털어댈 것이다.</p>
<p>그물과 꼬막 종패와 긴팔 옷을 입은 채 배를 타고 떠난 이들이 포구에 도착해 처음 만난 이인 어촌계장의 말을 떠오르게 한다. 그는 순천만의 수명을 다한 썩은 갈대들이 화포 앞바다로 밀려드는 걸 못마땅해 했다. 해거름 뭇 여행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을 갈대들이 그에게는 썩은 부유물일 뿐이다. 낭만과 현실의 경계다. 찬란은 잠시지만 밥벌이는 지속적인 것이기에 삶의 현장은 냉정하고 치열하다.</p>
<p>등대가 없는 포구에서 일몰을 기다린다. 밀물이 밀고 온 바람이 잦아들고 만조 때가 되어 노을이 번진다. 흐린 바닷물이 유난스레 노을을 튕겨 낸다. 바닷물이 멀리까지 빠져야 살 수 있는 어항이다. 차고 비는 바닷물이 화포 사람들의 삶의 형태를 만들어 왔다. 선착장이 생기기 전부터도 화포는 포구였다. 배가 드나드는 곳이 포구라면 널배가 드나드는 정복순 할머니의 집도 포구다. 집집마다 포구가 있는 마을, 화포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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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진설명</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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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화포는 일출과 석양이 모두 아름다운 포구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12906927_0.JPG" alt="P81 정복순 할머니의 널.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스무살 때 순천 오천동에서 화포로 시집 온 정복순(84) 씨와 그 삶을 이어준 널배.(위)</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12912792_0.JPG" alt="P81 칠게 천지 화포 갯벌.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칠게가 지천인 화포 갯벌. 아직 살아 있다는 반증이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12919047_0.JPG" alt="P82 마당에 널린 빨래가 정겹다.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포구가 지척인 마당에 널린 빨래가 갯바람에 마르고 있다. 정겹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12924901_0.JPG" alt="P83 새우잡이 통발 설치.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인근 도시와 마을에서 온 사람들이 통발로 새우를 잡는다. 포구는 여전히 사람들을 품는다.</p>
<p> </p>2017-09-26T02:14:31.000Z2017-09-26T04:47:31.000Z관리*바다와 추억 내 안으로 밀려들어온 속초 그 바다<p>바다와 추억</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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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내 안으로 밀려들어온 속초 그 바다</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4550089_0.jpg" alt="ilovepdf_com-133.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글 최영미(소설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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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과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 나는 바다를 더 좋아한다. 어릴 적 속초에 살며 바다만 보면 아득해지는 DNA가 몸에 새겨진 것 같다. 내 나이 여섯 살 무렵에 부모의 품을 떠나 속초의 친척집에 맡겨졌다. 속초에서 약국을 개업한 외삼촌의 집에서 살며 바다를 처음 보았을 텐데, 내가 처음 본 바다의 이미지는 내 뇌리에 저장되어 있지 않다. 그로부터 삼십여 년이 지나, 1999년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속초공항에 내렸을 때, 나는 유년의 냄새를 기억해냈다. 코끝에 감기는 비릿한 감각을 붙들고 약간의 상상력을 보태어 ‘바다의 추억’을 소설 <흉터와 무늬>에 재현했다.</p>
<p>“속초는 내게 항구다. 비릿한 물 내음으로 열리고 닫힌다. 술 냄새와 뒤섞여 주위를 맴돌던 비린내. 오징어잡이 배들의 날씬한 타원형의 몸체. 부두의 시끌법썩함. 늘 어디선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배 태워달라며 절망적으로 부르짖는 내 울음이 바다에 빠진다.</p>
<p>삼촌은 술꾼이었다. 군복무를 했다는 것 외엔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서 약국을 개업한 것만 봐도 우리 삼촌이 얼마나 끝내주는 한량이었는지 알 게다. 경치 좋은 곳에서 놀고 마시고 싶어서 속초로 내려온 사람이니 약국일은 뒷전이고, 저녁만 되면 학교에서 돌아온 이모에게 가게를 맡기고 친구들과 술 먹으러 돌아다녔다.” - 최영미 소설 <흉터와 무늬>에서</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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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동해의 그 막막한 푸른빛에 홀려 나는 아예 속초로 이사했다. 언제까지 수도권에서 비싸고 불편한 전세를 살아야 하나? 미분양 아파트를 한 채 사서(소유권을 얻은 최초의 내 집이었다!) 2000년 봄까지 속초에 살며 나는 지겹도록 바다를 보았다. 내가 운전대를 처음 잡은 곳도 속초에서다. ‘여기서 살려면 애인은 없어도 차는 있어야 한다.’는 아줌마의 말에 솔깃해 운전학원에 등록했다. 강릉의 면허시험장에서 면허를 따고, 내 차를 사고 며칠 뒤에 해변도로를 내달렸다.</p>
<p>속초에서 강릉까지 길이 얼마나 예쁜가.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날, 38선 휴게소 부근이었다. 인적이 끊긴 해변에 하얀 뱃가죽 내놓고 떼 지어 서 있는 몸집이 큰 바닷새들을 보았다. 백로인가 갈매기인가? 희한하게도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바다를 등지고 엉거주춤한 녀석들이 참 이상했다.</p>
<p>“우리 집 베란다에서 바다가 보여. 뒤 베란다로는 설악산이 보여. 여긴 눈이 아주 푸짐해. 한번 내렸다하면 내 허리까지 파묻힐 정도라니까.” 너스레를 떨며 어서 놀러오라고 친구들에게 전화질을 한 뒤에, 새천년을 동해에서 맞이하려는 친구들이 속초에 나타났다. 몇 달 살았다고 속초 사람이 다 되어 (관동팔경의 하나인 청간정과 지금은 그 이름들을 거진 잊어버린) 여기저기를 안내하고, 철조망 너머로 푸른 바다가 보이는 해변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그 시절의 추억으로 남았다.</p>
<p>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서 약국을 개업했던 외삼촌처럼, 나도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속초로 이사를 감행했다. 날 거기로 이끈 것은 어린 날의 ‘가짜’ 추억이었다. 엄마와 이모가 내게 “영미, 너 기억나지? 니가 글쎄- 중앙동 깡패였어. 속초 바닥에서 이 이름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 계집애가 동네 남자애들을 몰고 다니며 못 하는 짓이 없어 붙여진 별명이야.” 내가 깡패였다고? 남의 가게 유리창을 깨고, 얼마나 장난이 심한 아이였는지 어른들이 내게 환기시켜 주었지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유년의 시간이었다. ‘깡패’라는 말을 할 때 엄마의 입가에 맴도는 미소가 나는 좋았다.</p>
<p>마흔 살의 생일을 나는 속초에서 혼자 보냈다. 시내의 꽃가게에서 꽃을 사고 (아주 핸섬하고 매너가 좋았던 꽃집 아저씨가 생각난다. 지금도 그 자리에서 꽃을 팔까. 그는 속초 바닥에서 내가 발견한 가장 멋진 남자였다.) 유리로 된 예쁜 꽃병도 사고, 케익을 사서 귀가해 홀로 촛불을 켰다. 나는 원래 혼자 잘 노는 사람이다. 내 눈 앞에 펼쳐진 자연에 매료되어, 설악산을 보고 달리며 나는 행복했다. 외롭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내가 선택한 고독이었다. 바다를 봐도 아무렇지도 않게 될 무렵, 다시 나는 서울이 그리워 수도권으로 이사했다. 서울에서의 시간은 빠르며 덧없었다.</p>
<p>‘바다와 추억’이란 주제의 원고를 청탁받고, 오랜만에 앨범을 뒤졌다. 지금 보니 그 시절, 사진 속의 내 모습이 참 촌스럽다. 군복처럼 멋대가리 없는 카키색 누비잠바와 헐렁한 골덴 바지가 속초 시민인 나의 공식적인 외출복이었다. 만날 사람이 없다고 아주 펑퍼짐하게 퍼져 내가 여성인지 남성인지도 잊을 지경이었으니. 황금같은 청춘의 끝을 그렇게 흘려보냈으니, 좀 아깝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바다, 라면 환장하는 사람. 푸른 물결과 비릿한 항구 냄새를 맡으면 심장이 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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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4553937_0.jpg" alt="ilovepdf_com-132.jpg 이미지입니다." width="139" height="186" /></p>
<p>최영미</p>
<p>시인. 1992년 『창작과비평』 겨울호로 등단. 시집으로 『서른, 잔치는 끝났다』 『꿈의 페달을 밟고』 『돼지들에게』 『도착하지 않은 삶』 『이미 뜨거운 것들』이 있고, 장편소설 『흉터와 무늬』 『청동정원』 출간. 산문집 『시대의 우울: 최영미의 유럽일기』 『화가의 우연한 시선』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등이 있다. 시집 『돼지들에게』로 2006년 이수문학상 수상.</p>
<p> </p>2017-09-26T02:13:57.000Z2017-09-26T04:46:59.000Z관리*김준의 갯살이 물고기는 무한하지 않다 ‘속도와 효율’ 대신 슬로피시 운동<p>김준의 갯살이</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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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물고기는 무한하지 않다</p>
<p>‘속도와 효율’ 대신 슬로피시 운동</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4052194_0.jpg" alt="ilovepdf_com-123.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글·사진 김준(광주전남연구원 책임연구위원)</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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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효율성과 속도, 마을어업의 답이 아니다</p>
<p>살충제 계란으로 전국이 들끓었다. 정부가 인증한 ‘친환경’ 마크를 달고 있는 계란이라는 점에 국민들은 경악했다. 한 시민은 외국에서 있을 때는 먹을거리로 고민을 한 적이 없는데, 귀국해 보니 제일 큰 걱정이 먹을거리라며 한마디로 답답하다고 한다. 생산자도 정부도 믿을 수 없으니 무슨 방법이 있냐는 것이다. 이쯤에서 계란 아닌 생선을 생각해보자. 특히 바닷물고기, 바다라는 ‘자연 환경’에서 자라니 친환경이고 몸에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편견이다. 바닷물고기도 가축을 기르는 공장으로 바뀐 지 오래다. 짧은 시간에 체색이 좋은 많은 물고기를 양식하는 방법만 생각할 뿐이다. 바다 환경을 말할 것도 없고 인간의 건강을 위협하기 충분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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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바닷물고기와 인간은 도반이다</p>
<p>물고기가 살지 않는 지구, 물고기가 살 수 없는 지구에서 인간의 생존은 가능할까. 푸른 별 지구에 인간이 살 수 있었던 것은 따지고 보면 많은 물고기의 희생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단지 배고픔을 달래 줄 식량 구실을 해줘서가 아니다. 인간의 탄생에 지대한 공은 우선 물고기에게 돌려야 한다. 푸른 지구별이 탄생하면서 물고기의 출현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용암이 식어가면서 비가 내리고, 연기와 수증기가 대기층을 감싸며 광합성 작용이 시작되었다. 그 덕에 지구 아닌 수구가 된 푸른 별은 물고기를 잉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에서 살던 물고기가 뭍으로 올라와 인간에 이르렀으니, 인간의 오랜 동반자가 물고기가 아니라 물고기의 오랜 동반자가 인간이다. 그러니 인간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는 데 물고기만 한 것이 없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포유류 침팬지나 고릴라로 인간의 과거를 찾고 미래를 예측할 실험을 할 수 없으니 그 희생물로 물고기보다 좋은 생물이 또 있을까. 이러저래 인간의 미래는 바다와 물고기에 달려 있다면 지나친 것일까.</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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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바닷물고기가 사라진다</p>
<p>물고기와 인간의 첫 상봉은 언제였을까. 둘의 관계가 호혜관계에서 적대관계로 변한 것은 언제일까. 궁금하지만 아직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없다. 그만큼 연구가 되어있지 않는 것도 큰 이유지만, 인간은 물고기와 바다에 대해 너무 모른다. 게다가 오해까지 하고 있다. 바닷물고기는 무한하다는 오해다.</p>
<p>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우리나라 수산업 도표’에 소개된 수산물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것을 찾을 수 있다. 당시 동해안을 주름잡았던 명태, 대구, 청어, 꽁치, 고래 등은 지금 사라졌거나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지금 어획되고 있는 오징어, 미역, 멸치, 문어도 어획량이나 채취량이 크게 줄었다. 남해는 어떤가. 삼치, 고등어, 도미, 굴, 문어, 갈치 등이 소개되고 있다. 갈치와 고등어가 크게 줄어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서해에서는 더욱 심각하다. 조기, 민어, 넙치, 새우 대부분 사라졌거나 어획량이 크게 줄어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넙치나 새우처럼 양식으로 대체되기도 한다.</p>
<p>국내 소비의 절반 이상 수입하는 수산물로는 명태, 새우, 낙지, 바지락, 주꾸미, 꽁치, 홍어, 해파리. 이중에는 심지어 전량을 수입하는 것도 있다. 고등어, 아귀, 게, 가자미, 참조기도 절반은 아니지만 상당한 양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밥상만 아니다. 제사상에 오르는 생선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이런 추세로 바닷물고기를 잡고, 식문화가 진행된다면 우리 밥상에서 물고기가 사라지는 날은 멀지 않을 것이다. 물고기 한 종이 사라지만 그만인가. 생태계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그래서 생태계가 아닌가. 먹이사슬은 밥상에 멈추지 않는다.</p>
<p>동해안의 명태를 더 살펴보자. 명태가 주체할 수 없이 잡혔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명태가 동해에서 사라지자 이젠 오징어가 주 어종 자리를 차지했다. 횟집에 주요리가 나오는 사이 손님 접대용으로 내놓던 오징어는 더 이상 없다. 오징어는 해방 전후부터 1980년대까지 동해안 어민들 생계를 책임졌다. 학생들은 오징어 철이 되는 9월부터 10월 성어기에는 농촌의 바쁜 일손을 돕는 방학인 농번기처럼 ‘어번기’를 실시해야 했다. 이후 잠깐 정어리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동해에서 잡히는 오징어는 이제 서해나 서남해로 와야 잡는다. 그나마 국내 어장에서 잡을 수 있어 천만다행이다. 명태를 복원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복원이 가능할까. 유전자와 유전체라는 것을 생각하면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하다. 개체군의 90%가 사라지면 명태가 가지고 있는 기억들이 전승되지 않다. 생물이 가지고 있는 집단기억이 유전체로 전승되어야 하는데 그게 사라지는 것이다.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금어기라는 처방을 하는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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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살충제 생선은 없어야 한다</p>
<p>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생선을 꼽으라면 고등어, 조기 그리고 연어쯤 될 것 같다. 고등어는 이미 노르웨이 등 수입산이 자리를 꿰찼다. 한 때 서민들의 밥상을 풍성하게 해 주던 고마운 생선이 아니던가. 어머니 하면 생각나는 생선이 고등어였다. 조기는 고등어보다 사정이 낫지만 역시 우리 바다에서 잡아서 밥상에 올릴 사정이 아니다. 크기도 옛날 같지 않고 중국에서 수입되면서 안전성에 의혹을 제기하며 명절이면 언론의 도마에 오르는 생선이다. 문제는 연어다. 고등어나 조기는 아이들보다는 어른들이 먹어왔던 생선이 대물림된 경우다. 하지만 연어는 아이들과 청소년이 좋아한다. 그래서 더 신경이 쓰인다. 살충제 계란 파동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이 연어다. 양식 연어가 인간 건강과 해양 환경에 끼치는 영향 때문만은 아니다.</p>
<p>2017년 이태리 제노아에서 열린 국제슬로피시대회에서 ‘맛워크숍’에 참석했었다. 셰프 2명과 강의 1인으로 구성되어 요리와 강의가 동시에 진행되는 프로그램이다. 환경을 생각하는 생선요리가 주제였다. 강의 소재는 연어, 요리 소재는 갈치와 방어였다. 연어를 양식하기 위해 돼지고기와 가금류 사료를 먹이고, 먹여서는 안 되는 부산물도 사료로 이용한다. 소비자가 좋아하는 살색을 내는 착색제를 사용한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바닷물고기의 체색은 먹이에 의해 결정된다. 자연산 연어가 핑크색을 띠는 것은 새우나 갑각류를 섭취하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좋아하는 색이다. 인위적으로 만든 사료를 먹여서는 핑크색을 띨 수 없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사료에 염료를 넣는다. 국내에 유통되는 연어의 99%가 양식 연어다.</p>
<p>무엇보다 살충제 계란을 떠올렸던 것은 연어에 붙어 있는 바다이(sea lice) 때문이다. 최대 연어 생산지인 노르웨이 연어 도매가가 급등했다. 기생충 감염으로 물량이 줄면서 공급량이 크게 감소했기 때문이다. 지구 온난화 영향으로 바다이가 급증했다는 분석이다. 양식업자들이 바다이를 죽이기 위해 살충제를 사용한다. 그 양이 많아지면서 내성이 강해졌다. 이런 상황을 알게 되면 1㎏ 연어를 얻기 위해 5㎏에 이르는 사료를 먹어야 한다는 말이 사치스럽다. 오메가3를 얻기를 원한다면 채소로도 충분하고 생선을 먹어야 한다면 지중해인들이 잘 먹지 않지만 많이 잡히는 갈치나 방어류로 대체하자는 것이 워크숍의 요지다. 또 다른 연어 양식국 칠레는 더 심각하다.</p>
<p> </p>
<p>왜 슬로피시인가</p>
<p>우리 사정은 어떤가. 지난 50년 동안 큰 물고기는 90%가 사라졌다. 동해에서는 대구가 사라졌고, 서해에서는 조기가 사라졌다. 다 자란 고기는 말할 것도 없고 채 다 자라지도 않은 어린 물고기나 산란을 해야 하는 물고기를 마구 잡아낸 것이다. 하지만 어부들은 바다에서 물고기가 잡히지 않는 것은 ‘수온이 변해서’라고 생각한다. 지구의 온난화가 원인이기에 내 책임은 아니라는 말이다. 남획을 중요한 원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p>
<p>바다에서 물고기가 사라지기 전에 코가 작은 그물로 어린 물고기까지 잡는 약탈 어업을 멈춰야 한다. 그리고 물고기와 조개가 알을 낳고 살 수 있는 갯벌과 바다 숲을 지켜야 한다. 동식물이 자랄 수 있도록 산에 나무를 싶어 숲을 가꾸듯 바다 숲도 가꾸어야 한다. 바다식목일을 정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지만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바다는 무한하지 않다.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은 유한하다. 게다가 한번 무너진 생태계는 다시 회복하는 것은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바다의 물고기는 임자가 없으니 먼저 잡은 사람이 임자라는 생각도 약탈 어업을 부추긴다.</p>
<p>아버지 세대에 명태를 대량으로 잡았고, 어린 명태인 노가리는 세 배나 더 많이 잡았다. 지금 동해에 명태가 없는 중요한 이유다. 서해에 조기가 없다. 조기가 산란을 하고 서식할 수 있는 환경은 파괴되었고 먹이도 많지 않다. 어부들은 월동 지역까지 찾아가 조기를 잡아내니 서해까지 회유할 수가 없다. 뱀장어는 어떤가. 어린 치어들이 수천 킬로미터를 달려왔지만 어머니가 살았던 강으로 올라가지 못한다. 물길을 막은 거대한 댐 때문이다.</p>
<p>한 세대 만에 조기, 명태, 민어, 농어(자연산을 말함) 등은 사라지거나 귀한 생선이 되었고, 물메기, 아귀, 숭어, 망둑어 등 쳐다보지도 않아 잡어라 불렀던 생선들이 밥상에 오르고 있다. 미래 세대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 아이들 세대에 바다에 어떤 물고기가 남아 있을지 알 수 없다. 슬로푸드 운동은 ‘속도’와 ‘효율성’을 멈추지 않는 한 희망이 없다고 경고한다. 인류의 종이 소멸되는 위험에 처하기 전에 속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속도와 효율성에 도취한 흐름에 전염되지 않기 위해서는 느리고 오래가는 기쁨과 즐거움을 적절하게 누려야 한다. 그 출발은 슬로푸드 식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p>
<p>우리에게 슬로피시는 무엇일까. 마을 어업이다. 마을 어장에서 어민들이 직접 캐고 잡은 것보다 슬로피시에 적합한 수산물은 없다. 이를 위해서 마을 어장이 건강해야 한다. 그리고 소비자들도 그 가치를 공유하고 함께 나눌 줄 알아야 한다. 수산업과 함께 마을 어업을 병행해야 우리 밥상이 건강하고 살충제 계란과 같은 일이 생선에서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마을 어업만은 효율성과 속도에 맞춰 질주의 욕망이라는 엔진을 다는 일이 없어야 한다. 슬로피시 운동은 바닷물고기 보호가 목적이 아니다.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지구촌 만들기이다. 그 결과 바닷물고기도 인간도 행복한 지구를 꿈꾸는 운동이다. 바다는 경계가 없다. 그래서 공유지 비극이 발생하지만, 어민과 도시민이 함께 가치를 공유해야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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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4151111_0.jpg" alt="ilovepdf_com-124.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4155786_0.jpg" alt="ilovepdf_com-125.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사진설명</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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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일 년에 오직 한 번 마을어장을 열고 개불을 잡는다. 마을 주민들이 한 집에 두 명씩 모두 참여해야 한다. 잡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을에서 개불축제를 개최한다. 외지인들이 가장 많이 마을을 찾는다. 사초리 개불은 마을만 아니라 강진을 대표한다.</p>
<p>망둑어는 인기 있는 생선은 아니었다. 생선 축에도 끼지 못했다. 고급 생선이 바다에서 사라지면서 갯벌에 서식하는 망둑어는 경기만을 대표하는 ‘생선’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위)</p>
<p>주체할수 없이 많이 잡혔던 동해의 명태도 사라졌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4203486_0.jpg" alt="ilovepdf_com-127.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우리나라 최대 백합 주산지였던 새만금갯벌이 사라졌다. 그나마 백합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지역으로는 충남 서천군 유부도, 경기도 옹진군 장봉도, 주문도, 볼음도 정도다. 백합을 잡는 그레는 갯벌 생태계에 영향을 가장 적게 주는 어법 중에 하나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4212010_0.jpg" alt="ilovepdf_com-129.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마을 어장은 대부분 갯벌이다. 해안선에서 멀어야 1㎞ 남짓, 수심은 깊어야 15m 정도이니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쉽게 오염될 수 있고, 쉽게 매립하기도 한다. 가로림만은 조력발전 후보지로 거론되다 백지화되면서 해양보호구역으로 선정된 곳이다. 그곳은 마을 어업 중심지로 낙지, 바지락, 굴 양식장이다. 그리고 물범의 서식지이기도 하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4207500_0.jpg" alt="ilovepdf_com-128.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1960년대 말까지 서해를 대표했던 참조기다. 이젠 서해에서 조기잡이 배를 찾을 수 없다. 남쪽 밑으로 내려가야 한다. 어탐기로 찾아내 쫓아가서 잡아야 한다. 봄에 서해로 올라오는 조기를 기다리는 어리석은 어부는 없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4223123_0.jpg" alt="ilovepdf_com-131.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거제도 외포항 위판장에 새벽에 잡아온 대구들이 경매를 기다리고 있다. 호망과 일부 자망으로 겨울철에만 대구를 잡고 있다. 진해만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대구를 지자체와 어민이 협력해 치어 방류를 비롯해 어족 자원 관리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4218499_0.jpg" alt="ilovepdf_com-130.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이태리 제노아 슬로피시 행사장에 선보인 숭어 어란, 우리나라 숭어와 같은 어종의 알로 만든 가공품으로 슬로피시 맛의 방주에 등록되어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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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4159613_0.jpg" alt="ilovepdf_com-126.jpg 이미지입니다." width="139" height="186" /></p>
<p>김준</p>
<p>26년 동안 어촌과 섬 연구를 하고 있다. 현재 광주전남연구원 미래전략연구실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해양수산부 연안습지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갯벌문화사전』 『김준의 갯벌이야기』 등이 있다.</p>2017-09-26T02:13:37.000Z2017-09-26T04:45:22.000Z관리*귀어 일기 “우리 홍합은 달고 싱싱해 명성 자자합니다”<p>귀어 일기</p>
<p> </p>
<p>“우리 홍합은 달고 싱싱해 명성 자자합니다”</p>
<p> </p>
<p>글 박성천 사진 최현배</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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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수산업 공부와 경험</p>
<p>홍합 양식 전문가로 꽃 피운</p>
<p>돌산항 어부 박배근씨</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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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그는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토시를 끼고, 장화를 신었다. 따가운 햇살을 피하기 위한 복장이었다. 이른 아침에 바다에 나가 부표(부자)를 채우고 왔다는 그의 모습에서 전형적인 어부의 모습이 느껴졌다. 점심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바다로 나가기 위해 단단히 준비를 하고 온 듯했다.</p>
<p>“영민호에 타면 됩니다.”</p>
<p>그가 가리키는 영민호로 발걸음을 옮긴다. 2t 관리선은 양식 일을 하러 갈 때 타고 나가는 배였다. 선창에는 옆구리를 잇댄 배들이 사이좋게 정박해 있다. 몇 척의 어선을 건너 ‘영민호’까지 당도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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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11827533_0.jpg" alt="P68 돌산항 앞바다.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돌산항 앞바다에서 대규모 홍합 양식</p>
<p>박배근 여수 돌산항 군내 어촌계장. 그는 돌산항 앞바다에서 홍합 양식을 한다. 돌산은 동부와 서부로 나뉘어 홍합 양식을 하는데 지역마다 수확 시기가 다르다. 동쪽은 11월~12월 사이에, 서쪽은 10월을 전후해 출하를 한다고 한다.</p>
<p>홍합은 주당들에게 특히 인기 있는 안주다. 날씨가 조금 선선해지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따끈한 홍합 국물이 떠오를 때가 있다. 포장마차에서는 안주와 함께 뽀얀 국물이 가득 든 홍합 안주가 서비스로 나온다. 연체동물류에 속하는 바닷조개로, 삼각형에 가까운 타원형의 홍합은 주당들 외에도 누구나 좋아하는 수산물이다.</p>
<p>박 씨가 시동을 켜자 영민호가 물살을 가르며 나아간다. 탄산음료를 바다에 쏟아 부은 듯 새하얀 포말이 부서진다. 배가 나아갈수록 물이랑은 문신처럼 넓은 바다에 흔적을 남긴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이마를 때리고, 먼 바다의 섬들이 손짓하듯 다가온다. 상증도, 하증도, 그가 알려주는 섬들의 이름을 눈인사하듯 바라본다.</p>
<p>“저기 보이는 작은 부두 모양의 공간이 굴강(掘江)이라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수리했던 곳이지요.”</p>
<p>그러고 보니 여수는 임란 때 삼도수군통제사가 있던 지역이다.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고 수리를 했던 곳이라니 역사적 사실을 넘어 사료적인 가치가 높아 보인다. 작은 섬 인근에 바다를 빙 둘러 돌담을 쌓은 걸 보니 방어와 은닉을 하는데 최적의 공간이었을 것 같다. 그가 가리키는 굴강을 보며 역사적인 현장에 와 있다는 뿌듯함이 인다. 그러나 생각만큼 관리가 잘 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남몰래 바다 쓰레기를 버리는 이들이 있다.”는 말에 왠지 모르게 씁쓸해진다.</p>
<p>어느새 영민호는 홍합 양식장에 당도해 있다. 바다에 펼쳐진 부표들이 외지에서 온 손님을 맞기라도 하듯 출렁이는 파도에 연신 인사를 해댄다. 물양장의 파도와 양식장의 파도는 질적으로 다르다. 멀리 나와 보니 제법 바람이 세다는 것이 확연히 느껴진다.</p>
<p>“부표(부자)가 일정한 간격으로 떠 있는지 관리하는 게 중요합니다. 제때 갈아주지 않으면 가라앉거나 얽혀버리기 일쑤이지요. 대략 3000여 개의 부표가 떠 있는 것 같아요.”</p>
<p>박 계장이 가리키는 부표들을 보자니 바다에 떠 있는 것은 모두 하나의 ‘섬’으로 보인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는 말이 여기에선 “부표와 부표 사이에는 섬이 있다.”로 바꿔 표현해도 될 듯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광활한 바다 위에 떠 있는 부표와 무엇이 다르랴 싶다. 우리네 삶 또한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한낱 부평초와 같은 인생이 아닐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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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매일 한결같이 부표 관리</p>
<p>그가 영민호를 바다 한가운데 세워두고 작업을 시작한다. 물살이 제법 세서 배가 조금씩 회전하는 기분이다. 박 계장이 재빨리 닻 모양의 삼발이를 양식장 부표 줄에 건다. 그리고 삼발이와 연결된 줄을 도르래에 감는다. 도르래가 감기면서 바다 속에 드리워져 있던 홍합을 엮은 줄들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p>
<p>“지난봄에 채묘를 해 여름에 종패를 심어 넣었습니다. 두어 달 정도 됐으니까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발육 상태는 좋은 편입니다.”</p>
<p>공중으로 제 모습을 드러낸 홍합은 군데군데 뻘이 묻어 있다. 자세히 보면 수십 개의 포도알이 엉긴 포도송이를 닮았다. 아니 야자수가 무리지어 엉긴 모습 같기도 하다. 기다란 줄 사이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가느다란 줄이 내려져 있고, 그 줄마다 홍합 종패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것이다.</p>
<p>“저기 있는 부자는 교체를 해줘야 할 것 같네요.”</p>
<p>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아닌 게 아니라 부표가 여느 것과 달리 조금 침하돼 있다. 지금 갈아주지 않으면 홍합이 밑바닥으로 점점 침하될 우려가 있었다. 그가 기어를 풀고 핸들을 돌리자 배가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며 방향을 튼다. 조금 전에 가리켰던 방향으로 뱃머리가 움직인다.</p>
<p>출항할 때보다 바람이 조금 더 세진 것 같다. 물보라가 연신 얼굴에 튀고, 짠 내가 훅 밀려온다. 그러나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금세 소금기가 증발한다.</p>
<p>다시 배가 멈추자, 그가 삼발이 닻을 재빨리 부표 인근으로 내던진다. 물속에 드리워져 줄이 보이지 않는데, 그가 던진 삼발이는 정확히 줄에 걸린다. 이런 것을 감이라 하는가 보다. 흔히 말하는 동물적 감각은 어느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을 한 이들이 지니는 특유의 감각이라 하겠다. 수면 위로 드러난 부표는 조금 짓물러져 있다. 그가 재빨리 새 것으로 부표를 갈아 바다 속으로 던진다. 아주 짧은 시간에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진다. 혼자 배를 운행하고, 삼발이를 걸고, 부표를 교체하고,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아닌데 그는 척척 해낸다. 바다에 나와서는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지금은 척척 일을 하는 것 같아 보여도 처음에는 흔들리는 배 위에서의 작업이 만만치 않았을 거였다.</p>
<p>“부표를 엮은 일렬횡대로 늘어선 줄을 수하식 연승줄이라고 합니다. 이웃하는 연승줄과의 폭은 보통 6~7m에 이르죠. 그리고 한 개의 연승줄의 길이는 대략 200m 정도에 이릅니다.”</p>
<p>박 계장은 연승줄에는 물 아래로 500여 개의 가느다란 줄이 늘어져 있다고 했다. 또한 한 줄에 종패를 심은 꽈배기가 평균 27개가 들어 있는데 한 꽈배기에는 약 100~150개 종패가 심어져 있다고 설명했다. 꽈배기에 종패를 심는 작업은 많은 일손이 필요하다. 종패 이식 작업을 할 때는 마을 아주머니들을 사서 일을 한다고 한다.</p>
<p>“작년에는 태풍으로 작황이 안 좋았습니다. 바다라는 게 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라, 양식하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거든요. 아직까지는 순조로운 편이지만 올해도 태풍이 지나가 봐야 수확 여부를 알 것 같습니다.”</p>
<p>파도 소리와 엔진 소리에 묻혀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다. 억양이나 어조가 뱃사람의 것이라기보다는 육지에서 근무하는 평범한 직장인의 말투다. 조근조근 논리적으로 말을 하는 모습이 거친 풍랑을 헤치며 바닷일을 하는 어부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만이 그가 녹록지 않은 바다에서 생업을 일구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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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나고 자란 바다는 언제나 편안한 품</p>
<p>“이곳에서 나고 자라서인지 바다는 늘 편한 대상입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점 더 그런 생각이 들지요. 마을은 원래 바다가 펼쳐져 있고 아름다운 풍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런 환경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되죠.”</p>
<p>그도 보통의 여느 어부들처럼 젊은 시절에는 도시에서 직장 생활을 했다. 서울, 대전 등지에서 양식장 배합사료 판매와 유통 관련 일을 했다. 여수해양과학고와 제주대 수산 증식과를 졸업하고, 전남대 대학원 해양수산과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다. 줄곧 해양 수산과 관련한 일을 해왔던 터라 수산과 관련한 현장 지식은 웬만한 전문가 수준이라고 자부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사료회사 근무할 때는 현장의 실증 자료를 바탕으로 담수호에서 메기를 생산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미꾸라지 먹이를 떡밥에서 뜨는 사료로 전환하는 데도 기여를 했다. 이 분야에서 자칭 “실질적인 수산 전문가”라는 말이 허언으로 들리지 않는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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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양식 사료 판매하다가 90년대 후반 귀향</p>
<p>그러나 얼마 후 그는 직장 생활을 접게 된다. 당시의 상황이 회사 생활을 하기에는 여의치 않았다. “IMF 이전에는 배합사료 대리점 영업이 비교적 잘 되는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외상 대금이나 미수금이 적지 않았습니다. 외상대금이 누적되면서 이 일을 계속 해야 되나 하는 회의가 들었지요. 당시 이쪽 업계뿐 아니라 대부분의 분야에서 그 같은 방식의 영업이 일상화돼 있었지요.”</p>
<p>90년대 후반, 그가 귀향을 결심하게 된 이유다. 당시 부친은 선구물품(배에 필요한 물품) 관련 일을 했다. 저인망을 할 때는 잘 팔리고 경기가 좋았지만 저인망이 사라지면서 수입이 급감했다.</p>
<p>박 계장이 직장생활을 접고 양식 관련 쪽으로 방향 전환을 한 것은 그 이후였다. 2000년 부친의 작고와 맞물리면서, 수산해양 전문성도 살리고 ‘가업’도 잇는다는 생각으로 어업을 시작했다. 태생이 바다 출신인 데다, 부친이 하는 일을 봐 와서 그런지 바다 일은 익숙한 편이다.</p>
<p>그는 “3㏊ 정도의 홍합 양식을 하면서 대략 200~300t을 생산한다.”며 “군내 홍합은 싱싱하고 단맛이 강해 명성이 자자하다.”고 덧붙인다. 쫄깃쫄깃한 식감까지 더해져 찾는 이들도 많다는 것이다.</p>
<p>“이곳은 FDA가 승인한 청정바다입니다. 특히 바다 밑바닥엔 여(바위)가 있어 물고기들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지요. 달리 말하면 그만큼 플랑크톤이 풍부하다는 뜻이죠.”</p>
<p>이른 봄에 종패를 심어 가을과 겨울에 수확을 하는데 산란기가 되면 수컷은 노란색, 암컷은 빨간색으로 변한다. 여물어 속이 꽉 찬 것은 빨간색을 띤다고 한다. 수확을 한 홍합은 전량 인근의 가공 공장에 납품을 한다. 여느 농부나 어부처럼 제값을 받을 때 보람을 느낀다.</p>
<p>그는 관리선 2척과 작업선 1척을 보유하고 있다. 수확 철에는 채취선을 임대해 쓴다. 그리고 양식 일을 하지 않을 때는 밭농사도 짓는다. 고추, 깨, 파 등 양념 위주의 작물을 재배하는데 자급자족 수준이다. 무늬는 반농반어이지만 실질적인 분야는 어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p>
<p>박 계장은 “바다 현장 어디나 그렇겠지만 이곳에서도 인력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며 “제때 필요한 인력을 공급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고 강조했다.</p>
<p>그는 슬하에 1남 2녀를 뒀다. 양식을 하면서 애들 공부시킬 만큼 뒷바라지한 것으로 만족한다. 그는 후일 자녀가 양식업을 한다면 그때 상황에 맞춰 의사를 존중하겠다는 생각이다. 부인은 돌산의 명물 갓김치 사업을 하고 있다(아내의 손맛이 좋아 갓김치를 즐겨 찾는 이들이 많다고귀띔을 한다).</p>
<p>“자 이제 다시 항구로 돌아갑시다.”</p>
<p>그가 핸들을 꺾자 잔잔하던 바다에 포말이 인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바다는 더없이 아늑하고 평온해 보인다. 그는 그렇게 돌산의 바다가 베푼 현장에서 자족하며 산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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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진설명</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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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돌산항 앞바다에는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수리했던 굴강(掘江)이 있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11832675_0.jpg" alt="P69 박배근 돌산항 어촌계장.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양식장에서 건져 올린 홍합을 들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박배근 군내 어촌계장.</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11838026_0.jpg" alt="P70 돌산항 앞바다 섬들.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돌산항 앞바다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산재한다. 구름이 낀 하늘과 푸른 바다와 어울린 섬이 수채화처럼 아름답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12104826_0.jpg" alt="P71 홍합 종패.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11843323_0.jpg" alt="P71 부표를 정리하는 모습.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포도송이처럼 엉겨 있는 홍합 종패.(위)</p>
<p>박배근 씨가 부표를 정리하고 있는 모습.</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12116572_0.jpg" alt="P72 홍합 세척 모습.jpg 이미지입니다." width="50%"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12110607_0.jpg" alt="P72 껍데기를 벗긴 홍합.jpg 이미지입니다." width="50%" /></p>
<p>수확한 홍합은 인근 가공 공장에 납품을 한다. 홍합을 세척하고 있는 모습.(왼쪽)</p>
<p>껍데기를 벗긴 홍합.</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12122696_0.jpg" alt="P73 부표 교체 작업.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박 씨가 부표 교체 작업을 하고 도르래에 연결된 줄을 어선 기둥에 묶고 있다.</p>2017-09-26T02:11:18.000Z2017-09-26T02:24:38.000Z관리*바다를 담은 시<p>바다를 담은 시</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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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음악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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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박정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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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p>
<p>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p>
<p>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p>
<p>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p>
<p>산뚱 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p>
<p>두 잎의 불면,</p>
<p>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p>
<p>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p>
<p>밤새 겨울밤이 말달리는 소리, 위구르, 위구르 들려오는데</p>
<p>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p>
<p>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p>
<p>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p>
<p>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p>
<p>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p>
<p>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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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민음사. 200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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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p>
<p>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린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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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글 이대흠(시인)</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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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견딜 수 없어서 이별의 방식으로 ‘삼십육계’를 선택했던 적이 있다. 비겁한 선택이었다. 마음은 여전히 그녀라는 섬에 묶어두어서 도덕적으로는 지탄 받을 일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분명 비열한 행위였다. 바다를 지나면서, 산을 오르면서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내가 과연 그녀를 사랑하기는 했던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p>
<p>나는 어쩌면 하체만의 그녀를 사랑한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랑은 다 그런 것이라고, 내가 알고 있던 사랑이라는 관념을 고집하고 있었다. 나는 나를 조금도 무너뜨리지 않은 채 그를 들이려 했던 것이다. 결국 나의 도망은 내가 선택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와의 부딪힘으로 튕겨 나간 것이라는 인식이 든 것은 세월이 한참 지나서의 일이다. 나는 나마저도 제대로 사랑하지 않고 있으면서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 그것은 조작된 경전을 믿는 광신도 같은 것이었다.</p>
<p>다시 생각해보면, 그 때 그 시절에 내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은 막연한 그리움이나 동경 같은 것이었다. 자기합리화를 위해 필요한 수단으로써 그녀가 있어야 했던 것이다. 이런 터무니없고, 이기적인 감정으로 입술을 빨고 육체적 접촉을 꾀했던 것이다. 그것이 과연 사랑이었을까? 대부분의 사랑은 이러한 질문 앞에서 비로소 사랑이 된다. 하지만 그것을 사랑의 완성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다. 지혜롭지 않은, 미친 사랑쯤으로 기록하고 싶다.</p>
<p>이제는 먼 섬으로 남은 청춘의 한 때를 ‘격렬비열도’라고 불러본다.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린다. 한 때나마 목숨을 걸어보았던, 그 치기어린 시절의 사랑.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이면, 놓친 여자의 눈물처럼, 음악 같은 비도 내린다. 내가 이 시를 좋아하는 이유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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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4016143_0.png" alt="이대흠.png 이미지입니다." width="138" height="184" /></p>
<p>이대흠</p>
<p>1967년 전남 장흥군 장동면 만수리 생, 1994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작품 활동 시작</p>
<p>시집 『귀가 서럽다』 『물 속의 불』 『상처가 나를 살린다』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 장편소설 『청앵』, 산문집 『탐진강 추억 한 사발 삼천 원』 『이름만 이삐먼 머한다요』 『그리운 사람은 기차를 타고 온다』, 수상 《육사시문학상 젊은시인상》 《애지문학상》 등</p>
<p> </p>2017-09-26T02:05:40.000Z2017-09-26T04:41:14.000Z관리*바다에서도 도깨비불이 나타나는 자리를 가면 멸치가 많이 잡혔다네 학림도<p>강제윤의 섬과 삶</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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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바다에서도 도깨비불이 나타나는</p>
<p>자리를 가면 멸치가 많이 잡혔다네</p>
<p>학림도</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3430949_0.jpg" alt="ilovepdf_com-108.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글·사진 강제윤(시인, 섬연구소 소장)</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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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만선의 추억 그리운 도깨비 섬</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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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어린 시절 고향 섬마을 산속 외딴집에 살던 친구의 아버지는 밤마다 고갯길에서 도깨비를 만났다. 친구 아버지는 그때마다 술에 취해 있었고 도깨비는 언제나 씨름을 하자고 졸랐다. 하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 친구 아버지의 완승. 다리가 하나뿐인 도깨비는 씨름으로는 결코 다리 둘인 사람을 이길 수 없었다. 그런데도 지치지도 않고 씨름을 하자고 덤비는 미련함이라니! 도깨비, 세상에 이보다 어리숙한 신(神)이 또 어디에 있을까. 친구 아버지가 다음날 낮에 멀쩡한 정신으로 도깨비와 씨름하던 장소에 가보면 쓰다버린 빗자루가 있었다 한다. 여름밤이면 마당에 멍석을 깔고 앉아 들었던 다른 도깨비 이야기들도 결코 무섭지가 않았다. 섬은 온통 도깨비와 귀신투성이였다. 사람과 도깨비, 귀신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던 시절의 이야기다.</p>
<p>통영의 섬 학림도에도 도깨비가 유난히도 많았다 한다. 그래서 경로당에서 만난 노인의 도깨비 이야기는 끝이 없다. 도깨비는 민간신앙에서 믿어지는 초자연적 존재 중 하나다. 귀신은 사람이 죽은 뒤 그 영혼이 변한 것이고 도깨비는 돌이나 나무 같은 자연물이 변해서 생긴 것이라 믿어진다. 학림도의 도깨비는 주로 한밤중 산과 들에 나타났다. 노인은 어린 시절에는 도깨비불 구경을 많이 다녔다. 학림도 작은 시미기 뒷산 애기당에 도깨비불이 많았다. 애기당은 아이들이 죽으면 항아리에 담아다 내놓는 공동묘지였다. 아이들은 뼈가 부드러워 항아리 속에서 금방 녹아 없어져 버렸다. 그 애기당 부근에 엎드려 있으면 애기 우는 소리가 들리고 도깨비불이 켜져서 밤하늘을 돌아다녔다.</p>
<p>노인은 아버지에게 도깨비 애기를 많이 들었다. 노인의 아버지가 밤에 낚시를 하려고 바닷가에 앉아 있으면 어김없이 도깨비가 나타났다 한다. 도깨비는 “어이 친구 왔나?” 하면서 옆에 앉았다. 도깨비와 이런 저런 이야기도 했다. 물고기가 잡히면 도깨비는 그것을 손으로 주물럭거렸다. 아침 해가 뜨자 도깨비는 사라져버리고 이장님 아버지는 잡은 생선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생선을 꺼내자 알맹이는 없고 껍질만 남은 것이 아닌가! 그것은 필시 도깨비의 장난이었다.</p>
<p>바다에서도 도깨비불이 나타나는 자리를 가면 멸치가 많이 잡혔다. 섬에는 도깨비만큼이나 귀신도 지천이었다. 바다에서는 도깨비보다 주로 물귀신을 만났다. 고기잡이를 하다가 어부가 고단해서 뱃전에 누워 까무룩 잠이 들려고 하면 바다 속에서 털 난 손이 쑥 올라와 어부를 물속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 하지만 물귀신은 어부의 상투에 맨 은동구(은동곳) 때문에 어부를 끌고 갈 수 없었다. 여자의 비녀처럼 남자의 상투에 꽂던 장신구를 동곳이라 한다. 학림 섬사람들은 은이 잡귀를 쫓는 주술적 기능이 있다고 믿어서 늘 은동구를 부적처럼 지니고 다녔다. 섬에 귀신이나 도깨비가 많다보니 그것을 방지하는 비방도 성행했다. 집집마다 사진 액자에 탱주(탱자)나무를 잘라다 붙였다. 탱자가시가 무서워 잡귀가 안 붙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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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학 같은 새들이 모여드는 새섬</p>
<p>학림도(鶴林島)는 면적 0.722km2, 해안선 길이 7.5km의 기다란 섬이다. 55가구 120여 명이 살아간다. 학림도 인근 섬들에는 새들이 많다. 그래서일까. 학림도 또한 학 같은 새가 많다 해서 새섬이란 이름을 얻었다. 인근 섬사람들도 학림도라 하지 않고 다들 새섬이라 한다. 근처에 곤리도 또한 고니가 많이 날아 들어서 생긴 지명이다. 그래서 곤리도는 윗섬, 학림도는 아랫섬이라 부르기도 한다. 학림도는 물이 귀한 섬이었다. 지금은 해저 관로를 통해 진주 남강댐의 물이 섬까지 들어온다. 예전에는 가뭄이 심하면 식수공급선이 들어왔었다. 평상시에도 배를 타고 미륵도 달아마을까지 가서 물을 길어오거나 빨래를 해오곤 했다. 그도 아니면 물동이를 이고 산 너머까지 물을 길러 다녀야 했다. 물 때문에 겪은 여자들의 고생은 이루 다 말로 할 수가 없었다. 오죽했으면 “밤새도록 한 숟갈 두 숟갈 퍼 올려다 먹었다.”고 할까.</p>
<p>지금 학림도는 도미와 우럭 같은 어류 양식장이 많지만 옛날에는 섬 주변이 온통 황금어장이었다. 깔치(갈치), 조기, 삼치, 멸치가 지천이었다. 요새는 바다에 물고기의 씨가 말랐다 할 정도다. 학림도 앞바다는 평균 14미터 정도로 수심이 깊고 조류 유통이 잘 된다. 그러니 해마다 통영 바다를 덮치는 적조에도 피해가 적은 편이다. 그 바다 덕에 옛날에는 물고기가 득시글거렸었다. 지금은 큰 배들이 멀리 동중국해까지 내려가 싹쓸이 해버리니 이 바다까지 살아서 오는 놈들이 없다. 옛날 학림도 사람들은 통영 전통 어선인 통구미 배로 조업을 했었다. 먼 바다까지 나가지 않아도 만선이었으니 작은 어선으로도 족했던 것이다. 심지어 삼치 같은 큰 물고기에 쫓긴 멸치들은 뭍으로 튀어오를 정도였다. 정어리만큼이나 큰 멸치들을 그저 바구니에 주어 담기만 하면 됐다. 그야말로 바다의 황금시대였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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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바지락 캐기 ‘영 내리면’ 능력껏 채취</p>
<p>작은 시미기 앞 모래펄은 바지락 체험장이다. 마을의 공동 바지락 양식장 중 일부를 외지인들에게 개방한 것이다. 인근의 섬들 중 학림도에서 가장 많은 바지락이 나기에 가능한 일이다. 해안 도로를 따라 20여 분을 더 걸으면 큰 시미기다. 큰 시미기 해변의 바지락 양식장은 마을 사람들만 캘 수 있다. 마을 사람이라고 아무 때나 캘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촌계에서 ‘영을 내려야’만 캘 수 있다. 전라도 섬이나 해안 지방에서는 공동 양식장의 채취를 허가하는 것을 ‘개를 튼다.’고 하는데 이 지방에서는 ‘영을 내린다.’고 한다.</p>
<p>왜 하필 양식장의 바지락 채취허가가 나는 것을 영 내린다고 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이 부근 섬들이 삼도수군통제영의 통제를 받았던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연대도가 이순신 장군 사당인 충렬사의 사패지였듯이 이 섬사람들도 통제영의 부역에 동원되곤 했을 것이다. 또한 장정들은 누구나 어민인 동시에 수자리를 살던 군인이기도 했었다. 농사를 짓거나 고기를 잡아 생계를 잇다가 때가 되면 징집을 당하기를 반복해야 했다. 통제영의 명령을 받고 일하던 때의 기억이 전승되어 언어에 남은 것이리라.</p>
<p>바지락 양식장은 봄, 가을 몇 차례 영이 내린다. 영이 내린 날이면 주민들은 자신의 능력껏 바지락을 캐다 팔 수 있다. 보통 한 사람이 40-50kg 정도를 캐지만 솜씨 좋고 부지런한 사람은 100kg까지 캐내기도 한다. 학림도 지명유래집이나 주민들에 따르면 시미기란 지명은 마을에서 십리길이라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하지만 큰 시미기까지 실제 거리는 2킬로 남짓에 불과하다. 왕복 십리라면 맞겠다. 큰 시미기 서쪽 해안은 깎아지른 기둥 같은 바위들이 장관을 연출한다. 주상절리다. 섬사람들은 기둥바위 산이라 부른다.</p>
<p>이 땅 어딘들 없겠는가마는 이 섬에도 어김없이 비극적인 사랑의 전설이 내려온다. 학림도 동남쪽 큰 고래개와 검금굴 사이에는 상사바위란 이름의 바위가 있다. 옛날 이 섬의 어떤 총각이 처녀를 짝사랑 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었다. 총각의 혼은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뱀으로 변신해서 처녀에게 올라붙었다. 총각 귀신이 들린 처녀는 온갖 처방을 다 해봐도 떨어지지 않자 저 바위로 올라가 몸을 던졌다. 그렇게 총각도 죽고 처녀도 죽었다. 일방적이고 지나친 집착은 자신도 죽고 상대도 죽인다. 그것을 어찌 사랑이라 이를 수 있을까. 저 바위를 사랑바위라 하지 않고 상사바위라 한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상사는 사랑이 아니라 병인 것이다. 아, 그러나 상사만이랴. 때론 사랑도 병인 것을. 그것도 불치의 병인 것을. 환자가 낫기를 원치 않으니 결코 나을 수 없는 불치병. 그대에게 묻는다. 그대도 나처럼 그대의 병이 치유되지 않기를 원하는가. 섬에서 묻는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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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진설명</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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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통영 미륵도에서 학림도와 연대도 등을 순회하는 여객선</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3435046_0.jpg" alt="ilovepdf_com-109.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 학림도 마을 전경</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3450407_0.jpg" alt="ilovepdf_com-113.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 참깨를 말리고 있는 학림마을 골목</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3446721_0.jpg" alt="ilovepdf_com-112.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 참깨를 털어 갈무리 하고 있는 학림마을 노인</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3443067_0.jpg" alt="ilovepdf_com-111.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 학림도 앞바다, 오랜 항해 끝내고 침몰한 폐선</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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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3438919_0.jpg" alt="ilovepdf_com-110.jpg 이미지입니다." width="139" height="178" /></p>
<p>강제윤</p>
<p>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을 걷다』 『당신에게 섬』 『섬 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등의 저서가 있다.</p>
<p>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jeyoon.kang.7</p>
<p> </p>2017-09-26T02:05:13.000Z2017-09-26T04:40:37.000Z관리*세계의 섬 맛의 보석을 캐는 미식美食의 섬 호주 태즈메이니아<p>세계의 섬</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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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맛의 보석을 캐는 미식美食의 섬</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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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호주 태즈메이니아</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2631813_0.jpg" alt="ilovepdf_com-93.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글·사진 노중훈(여행 칼럼니스트)</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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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호주 동남쪽 바다에 떠 있는 섬이자 호주에서 가장 작은 주(州)가 바로 태즈메이니아다. 주도는 섬 남쪽에 자리한 호바트. 섬 전체 면적은 우리나라 3분의 2쯤 되지만 인구는 50만 명에 불과해 ‘청정 호주’에서도 가장 깨끗한 자연을 보유한 곳으로 정평이 나 있다. 태즈메이니아 면적의 40%가 국립공원 혹은 세계자연유산 및 생태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다.</p>
<p>어림잡아 10번 이상 호주를 다녀왔는데, 제일 인상적인 것은 역시 자연이었다. 수많은 물고기와 극피동물, 다양한 형상의 산호가 서식하는 케언스(Cairns)의 대보초는 바닷속 진경을 보여준다. 빅토리아(Victoria) 주의 그레이트 오션 로드(Great Ocean Road)는 특출한 주변 풍광으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 도로로 일컬어진다. 서호주의 피너클스(Pinnacles) 사막은 기기하고 괴괴한 암석들 천지다. 1~5미터 정도 되는 돌기둥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그런데, 자연과 달리 호주 음식에 관해서는 ‘날카로운 추억’이 별로 없다. 멜버른(Melbourne) 외곽의 와이너리에서 마신 몇몇 와인과 시드니(Sydney) 초기 이민자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록스(Rocks) 지역에서 돌아다녔던 몇몇 맥줏집이 그나마 되새겨볼 만한 기억이다. 하지만 ‘진짜 호주’라고 불리는 태즈메이니아(Tasmania)에 가보니 호주 음식의 저력을 체감할 수 있었다. 결론부터 내밀자면 호주는 맛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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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열린 태도가 만든 호주 음식의 저력</p>
<p>태즈메이니아에서의 식도락을 통해 새삼 느낀 호주 음식의 특징은 개방성이다. 특히 최근 호주 요리의 트렌드는 자유롭다는 것이다. 스스로 어떤 경계를 두고 자신을 옭아매려 하지 않는다. 몇 가지 결정적 요인이 있다. 무엇보다 식재료에 대한 낯가림이 없다. 자연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독창한 요리를 선보이는 호주의 스타 셰프 벤 슈리(Ben Shewry)는 레스토랑 소유의 텃밭뿐 아니라 출퇴근길에 농장, 공원, 바닷가에서 당일 사용할 식재료를 채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글 쓰는 요리사 박찬일 씨는 “호주 요리사들의 재료에 대한 호기심과 이해도가 상당하다.”고 평가한 바 있다. 호주 요리의 스펙트럼을 넓힌 데는 맛에 대한 열린 태도도 한몫했다. 영연방 일원으로 한때 영국 음식이 독장쳤지만 1990년대부터 남부 유럽과 아시아 음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호주의 맛에는 유럽, 인도차이나반도, 동북아의 다채로운 음식 문화가 혼재돼 있다. 일부에서는 호주만의 전통과 색깔이 없다고 힐난하지만 정작 호주 요식업계는 “전통을 만들어나가고 있다.”며 크게 개의치 않는다.</p>
<p>몇 년 전 호주정부관광청은 태즈메이니아의 수도이자 섬 남쪽에 자리한 항구도시 호바트(Hobart)에서 ‘인바이트 더 월드 투 디너(Invite The World To Dinner)’라는 미식 행사를 개최한 적이 있다. 말 그대로 세계 각국의 요리사와 음식 관련 저널리스트를 초대해 호주 음식을 뽐내는 자리였다. 이를 위해 호주 최고의 요리사 세 명이 총동원됐는데, 그들은 요리와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음식들을 선보였다. 앞서 언급한 벤 슈리는 몸집이 큰 붉은 캥거루 고기에 토종 견과류를 곁들인 요리를 발표했다. 호주에서 수상 경력이 가장 많은 레스토랑 중 하나인 키(Quay)의 피터 길모어(Peter Gilmore)는 돼지 목살 콩피에 전복, 누룩, 발효 곡물, 표고버섯, 해조류를 매치시켰다. 20여 년 전 시드니에 문을 열어 단 6개월 만에 최고 레스토랑의 지위에 오른 락풀(Rockpool)의 오너 셰프 닐 페리(Neil Perry)는 소고기 등심 스테이크에 홍차로 훈연한 굴 레드 커리를 더했다. 심지어 스테이크 옆에 김치를 배치시켰다. 짧게 발효시키고 식초로 신맛을 북돋은 일종의 백김치였다. 까다로운 입맛의 참가자들은 ‘의외의 발견’에 열광했으며, 호주 음식의 저력에 깊은 인상을 받고 돌아갔다.</p>
<p>미식의 섬이지만 태즈메이니아의 자연을 둘러보지 않을 수는 없는 일. 호바트 시내에서 B64 도로에 올라 12km가량 나아가면 웰링턴(Wellington) 산 정상에 도착한다. 호바트 최고의 전망대로, 바다와 도시가 어우러진 파노라마 뷰가 발아래 펼쳐진다. 정상을 뒤덮고 있는 거친 모양의 돌무더기와 주상절리 같은 바위기둥들에서는 태곳적 신비가 느껴진다. 호바트에서 태즈먼 하이웨이를 타고 넘어가면 로즈니 힐(Rosny Hill)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전망도 장쾌하다. 돌출된 부분에 각양각색의 집들이 모여 있고, 그 배후의 창창한 바다에는 순백의 요트들이 그림처럼 떠 있다. 아이를 동반한 가족 여행객에게는 보노롱야생동물공원(Bonorong Wildlife Park)을 추천한다. 캥거루, 코알라, 웜뱃 등을 만날 수 있다. 공원은 어미 잃은 새끼나 다친 동물을 치료하고 보호하다 다시 숲으로 돌려보내기도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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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청정 자연 속에서 즐기는 멋과 맛</p>
<p>태즈메이니아에서 배를 타고 15분 정도면 도착하는 브루니(Bruny) 섬. 브루니의 북섬과 남섬을 잇는 가느다란 지형인 넥(Neck)에는 나무 계단이 정상까지 설치돼 있다. 시선이 멀리까지 뻗어나간다. 브루니 섬은 태즈메이니아 주민들이 즐겨 찾는 미식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굴 농장인 겟 셔크트(Get Shucked)에서는 18호주달러를 내면 레몬과 함께 12개의 생굴을 먹을 수 있다. 굴완탄을 비롯한 아시아풍의 굴 요리도 판매한다. 와인과 음료도 준비돼 있는데, 청량한 맛의 사과주인 사이다(Cider)와의 궁합이 훌륭하다. 텃밭에서 재배하는 채소들은 굴 요리를 위한 소스를 만들 때 사용한다고 한다.</p>
<p>브루니 아일랜드 프리미엄 와인(Bruny Island Premium Wines)의 바 & 그릴에서도 신선한 지역 산물을 이용한 다채로운 요리를 내놓는다. 특히 할루미치즈를 곁들인 버섯 마리네이드가 입맛을 사로잡는다. 와인 중에는 2012년산 피노누아 리저브의 풍미가 빼어나다. 치즈 애호가라면 브루니 아일랜드 치즈 컴퍼니(Bruny Island Cheese Co.)에 들러야 한다. 창업주인 닉 해도우(Nick Haddow)는 10여 년간 여러 나라에서 치즈 메이커로서 일한 다음, 지난 2001년 브루니 섬 남쪽에 회사를 세우고 치즈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전통 방식을 고집하는데, 좋은 치즈를 만들기 위해 무엇보다 우유가 중요하다고 믿는다. 최적의 환경에서 소와 염소를 기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p>
<p>다시 태즈메이니아 섬으로 넘어와 음식 여행을 이어가보자. 뮤어스 어퍼 덱(Mures Upper Deck)은 호바트를 대표하는 해산물 레스토랑이다. 가리비구이와 새우튀김처럼 친근한 메뉴도 있지만 연어와 해초를 굴에 올려 먹는 점이 독특하다. 빅토리아 도크를 내려다보면 먹는 맛도 남다르다. 엘리자베스 거리의 에토스(Ethos)는 제철 산물을 이용해 그날그날 다른 코스 요리를 제공한다. 돈을 더 내면 각각의 음식에 맞는 와인까지 제공받을 수 있다. 에토스는 가장 오래된 부분이 거의 200년이 됐을 만큼 건물 안팎이 고풍스럽다. 1992년에 세워진 양조장 라크(Lark Distillery)는 싱글 몰트 위스키 제조의 명가로 인정받는 곳이다. 풍부한 보리와 깨끗한 물, 그리고 적합한 기후가 어우러져 세계적인 명주가 탄생한다. 독하면서도 뒷맛이 깔끔하다. 그랜드베베(Grandvewe)는 태즈메이니아에서 유일하게 양 치즈를 생산하는 곳이다. 참고로 소와 염소로부터는 일 년 내내 우유를 얻을 수 있지만 양은 연중 7개월만 우유를 내어준다. 목장 카페에서 양젖으로 만든 치즈와 아이스크림을 음미할 수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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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Travel Informatio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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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볼거리</p>
<p>마운틴 필드 국립공원은 태즈메이니아 최초의 국립공원이다. 1916년 선정됐다. 크고 작은 폭포를 품은 계곡을 지나면 습지가 형성돼 있는 정상에 다다른다. 유칼립투스가 빽빽이 들어찬 숲 안에 들면 경외감마저 밀려든다. 크레이들 마운틴 국립공원은 트레킹 마니아들이 꼭 한 번쯤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다. 65km에 이르는 트레킹 코스를 갖추고 있다. 와인글라스 베이는 태즈메이니아에서도 물빛이 가장 아름다운 해변이다. 호바트 시내는 걸어서 한나절이면 돌아볼 수 있다. 호바트의 ‘곳간’ 살라망카 마켓과 18세기 영국풍의 집들이 모여 있는 배터리 포인트, 캐주얼 레스토랑들이 늘어선 프랭클린 워프 등을 많이 찾는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2719689_0.jpg" alt="ilovepdf_com-102.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 height="245" /> </p>
<p>와이너리 & 숙소</p>
<p>호바트 외곽으로 나가면 와이너리 홈 힐(www.homehillwines.com.au)을 만날 수 있다. 단층 건물의 통유리를 통해 주변 포도밭 풍경이 쏟아져 들어온다. 피노누아 품종의 레드 와인을 추천한다. 레스트 포인트(www.wrestpoint.com.au)는 호주에서 처음으로 카지노가 설치된 호텔이다. 호바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기도 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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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2729684_0.jpg" alt="ilovepdf_com-101.jpg 이미지입니다." width="50%"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2725834_0.jpg" alt="ilovepdf_com-107.jpg 이미지입니다." width="5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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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진설명</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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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호바트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웰링턴 산 전망대.</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2639107_0.jpg" alt="ilovepdf_com-97.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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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태즈메이니아 곳곳에 위치한 양식장에서는 탱글탱글한 최고의 굴을 생산한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2653831_0.jpg" alt="ilovepdf_com-100.jpg 이미지입니다." width="46%"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2644790_0.jpg" alt="ilovepdf_com-98.jpg 이미지입니다." width="54%" /></p>
<p>? 레스토랑 락풀의 한 요리사가 글렌노키 예술조각공원에서 바닷가재를 굽고 있다.</p>
<p>? 생굴에 연어와 해초를 올린 음식.</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2649550_0.jpg" alt="ilovepdf_com-99.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 다양한 해산물 요리를 주문할 수 있는 레스토랑 뮤어스 어퍼 덱.</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2714693_0.jpg" alt="ilovepdf_com-104.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 태즈메이니아의 주도이자 항구도시인 호바트.</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2700901_0.jpg" alt="ilovepdf_com-105.jpg 이미지입니다." width="50%"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2705131_0.jpg" alt="ilovepdf_com-106.jpg 이미지입니다." width="50%" /></p>
<p>? 양젖으로 만든 고품격 치즈를 판매하는 그랜드베베.</p>
<p>? 브루니 아일랜드 치즈 컴퍼니의 치즈 숙성 창고.</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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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2738121_0.jpg" alt="ilovepdf_com-103.jpg 이미지입니다." width="139" height="186" /></p>
<p>노중훈</p>
<p>한국외국어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졸업. 여행신문 취재부 기자를 거쳐 2001년부터 프리랜서 여행작가로 활동. 지금까지 63개국 500여 도시 여행. 다양한 잡지, 사보 등에 여행 글과 사진 기고. mbc 라디오 ‘여행의 맛’과 ‘꿈꾸는 라디오’ 출연.</p>2017-09-26T02:05:13.000Z2017-09-26T04:34:41.000Z관리*바다와 길 떠오르는 태양과 푸른 바다를 따라 걷다 동해 ‘해파랑길’<p>바다와 길</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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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떠오르는 태양과 푸른 바다를 따라 걷다</p>
<p>동해 ‘해파랑길’</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2226936_0.jpg" alt="ilovepdf_com-84.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부산 오륙도에서 고성 통일전망대까지</p>
<p>바다길 770k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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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글 송기동 사진 (사)한국의 길과 문화 제공</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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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리콴유 싱가포르 총리 부부도 휴가 중 찾아</p>
<p>“화진포는 아름다운 해변과 평화로운 석호를 가지고 있다.(Hwajinpo has beautiful beaches and a serene lagoon)”</p>
<p>싱가포르 리콴유(李顯龍) 총리는 지난 2015년 12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화진포에 대한 글과 사진을 올렸다. 부인 호칭(何晶) 여사와 함께 연말 휴가로 한국을 찾은 리 총리는 서울 이태원과 비무장지대(DMZ), 설악산, 경주 남산 등지를 8박 9일간 여행했다. 특히 리 총리 부부는 설악산을 오른데 이어 고성 화진포 ‘해파랑길’을 걸었다. 리 총리는 당시 느낌을 유머러스하게 묘사했다.</p>
<p>“일요일 (설악산)트레킹에 비해 이것(해파랑길)은 꽤 힘든 일이었다. 내 아이폰에 따르면 난 1만5000보를 걸었는데 87층 건물을 오른 것과 같았다.”</p>
<p>리 총리 부부가 한국을 다녀간 후 1년 후인 지난해 12월, 240여 명의 싱가포르 단체 관광객들이 한국을 찾았다. 이들은 강원도 고성 ‘해파랑길’ 코스 등 리 총리 부부의 여행 코스를 그대로 따라 관광했다. 싱가포르에서 리 총리 부부가 다녀 온 ‘해파랑길’ 등 한국 여행지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기 때문이다.</p>
<p>동해안에 조성된 ‘해파랑길’이 힐링 도보 여행 코스로 인기를 끌고 있다. ‘해파랑길’은 동해에서 떠오르는 해와 푸른 바다를 길동무 삼아 함께 걷는 길이다. 파랑(波浪)은 너울(wave)과 파란(blue)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p>
<p>부산 오륙도 해맞이 공원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총 10개 구간 50개 코스로 나눠져 있는데 770㎞에 이른다. 순례길인 스페인 ‘산티아고 길’(782㎞)과 비슷한 길이이다. 총괄 민간 주관단체인 ‘(사)한국의 길과 문화’와 ‘(사)강릉 바우길’ 등 지역 민간 주관단체를 비롯한 부산·울산·경주·포항·영덕·울진·동해·삼척·강릉·속초·양양·고성 등 19개 지자체에서 공동으로 기존 길을 연결해 조성했다.</p>
<p>부산 구간(1~4코스)은 오륙도공원에서 대장정을 시작해 광안리해변과 미포~대변항~임랑해변을 거쳐 울산으로 이어진다. 울산 구간(5~10코스)은 동해에서 가장 해가 일찍 뜬다는 간절곶을 지나 명선도 일출로 이름 높은 진하해변, 국내 옹기 문화 일번지를 자처하는 외고산옹기마을, 소나무 숲을 이룬 솔마루길, 10리에 걸쳐 사철 푸른 태화강 십리 대밭길, 신라 문무왕의 설화가 깃든 대왕암을 거쳐 왜구의 침입을 알린 봉대산 주전봉수대에 닿는다.</p>
<p>경주 구간(10~12코스)은 정자항에서 출발해 동해안 용암 주상절리 중에서 으뜸으로 꼽는 강동화암 주상절리로 이어진다. 파도와 몽돌이 빚어내는 경쾌한 소리가 일품인 나아해변부터 문무대왕릉이 있는 봉길해변까지 11코스 5㎞ 구간은 기존 길이 폐쇄돼 차량을 이용해야 한다. 문무왕 수중릉과 감은사지 삼층 석탑, 이견대(문무왕이 용으로부터 만파식적을 만들 대나무를 건네받았다는 장소)는 1300여 년 전 신라 역사를 만날 수 있는 탐방로이다. 감포항을 출발해 양포항에 이르는 12코스는 송대말등대와 오류고아라해변, 연동마을을 거친다.</p>
<p>지역의 생생한 역사와 만나는 도보길</p>
<p>포항 구간(13~18코스)은 107.4㎞로 해파랑길 중에서 가장 길다. 과메기로 유명한 구룡포항과 연간 100만 명 이상이 찾는 호미곶이 포항을 대표한다.</p>
<p>영덕 구간(19~22코스)은 ‘블루 로드’로 불린다. 푸른 숲길과 바닷길이 교차하기 때문이다. 고려 후기 문신인 목은 이색 선생이 뛰노는 고래 모습을 보고 명명했다는 고래불해수욕장을 지나 울진으로 이어진다.</p>
<p>울진 구간(23~27코스)에 자리한 울진군 평해읍 거일리에는 대게 모양을 한 ‘울진대게 유래비’가 세워져 있다. 대게는 고려 시대 때부터 울진 특산물로 인정을 받아왔다. 다리 모양이 대나무처럼 곧다 해서 ‘대게’라고 하는데, 워낙 크고 단단한 까닭에 ‘박달게’로도 불린다. 관동팔경 중 하나인 월송정과 망양정에서 바라보는 동해가 장쾌하다.</p>
<p>삼척동해 구간(28~34코스)에서는 기묘한 바위들이 늘어선 추암해변이 이채롭다. 용화 레일바이크역과 궁촌 레일바이크역을 잇는 7㎞ 길이의 30코스는 레일바이크를 이용한 종주도 가능하다.</p>
<p>강릉 구간(35~40코스)은 ‘강릉 바우길’ 동해안 구간과 겹친다. 강릉 제일의 명품 숲으로 손꼽는 옥계해변 소나무 숲과 드라마 ‘모래시계’로 널리 알려진 정동진역이 탐방객을 반긴다. 37코스(금강초교~덕현리 구간)는 원주~강릉간 복선철도 공사 때문에 2017년 연말까지 우회 노선으로 걸어야 한다.</p>
<p>양양속초 구간(41~45코스)은 동양 최대의 해수관음상을 모신 낙산사와 순대 등 먹거리로 유명한 속초 아바이마을 등이 도보객의 발길을 붙든다. 또 속초 등대전망대에 오르면 환상적인 설악산과 시원스런 동해의 풍광을 안겨준다.</p>
<p>우리나라 최북단인 고성 구간(46~50코스)에서는 분단국가의 현실과 맞닥뜨린다. 화진포 인근 49코스는 싱가포르 리콴유 총리가 다녀간 곳이다. 마지막 50코스(제진검문소~통일전망대)는 걸어서 갈 수 없다. 통일안보공원에서 출입신고서를 작성하고, 택시 등을 이용해야 한다. 다만 15명 이상 인원이 1주일 전 통일안보공원에 미리 신고하면 군부대 협조를 받아 걷기가 가능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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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떠남, 그 하나로 족하다’</p>
<p>‘해파랑길’ 여행에 나서려면 우선 ‘(사)한국의 길과 문화’에서 운영하는 ‘해파랑길’ 홈페이지(haeparang.org)를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출발하기 전 준비 사항은 물론 각 코스별 지도가 상세하게 소개돼 있다. 배낭 무게는 줄이고, 하루 세 끼는 탄수화물 위주의 식단으로 하며, 두 끼 분량의 비상식량을 챙기고, 야간 도보 시에는 안전을 위해 배낭 뒤에 깜박이는 붉은 안전등을 달아 운전자가 보행자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할 것을 권장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체력에 맞는 코스를 선택해야 한다. 지나는 곳마다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 ‘클린 워킹’에 유의해야 한다. 몇몇 코스는 토목 공사와 군사적 이유로 통행이 제한되고 우회를 해야 하는데 홈페이지에서 이러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p>
<p>특히 각 코스 지도는 스마트폰에 어플리케이션을 깐 후 GPS 트랙 파일을 다운로드 받아 활용하면 좋다. 안드로이드 폰은 ‘산길샘 나들이’, 아이폰은 ‘트랭글’이나 ‘램블러’ 앱을 많이 사용한다. 각 코스별 GPS 트랙은 ‘해파랑길’ 자료실에서 받을 수 있다.</p>
<p>“어떠한 것을 위해, 무엇을 위해, 왜, 누구를 위해, 그토록 힘들게 어렵게 하여야 했는지 등을 생각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잊어보자는 생각으로 걷고, 걷고, 걸은 것이 즐겁고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박헌섭·김옥이 부부)</p>
<p>“무작정 길을 걸으며 느꼈던 무한한 고통과 환희, 그리고 ‘또 다른 나와의 끊임없는 대화’가 나를 한 단계 성숙케 했고 그것이 앞으로 생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는 점만으로도 소득은 분명히 있었다.”(김동철)</p>
<p>1938년생 이득해(79) 할머니 외에 많은 이들이 21일에서 36일에 걸쳐 ‘해파랑길’을 완주했다. 이들의 완주 후기를 읽다보면 ‘나도 한 번쯤 걷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p>
<p>프랑스 시인 르네 샤르는 “떠남, 그 하나로 족하다”고 했다. 해와 바다를 벗 삼아 걷는 ‘힐링 길’이 눈앞에 놓여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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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해파랑길 코스</p>
<p>▲01 ~ 04 코스 총거리 73.7km 부산 구간</p>
<p>▲05 ~ 09 코스 총거리 82.1km 울산 구간</p>
<p>▲10 ~ 12 코스 총거리 65.4km 경주 구간</p>
<p>▲13 ~ 18 코스 총거리 107.4km 포항 구간</p>
<p>▲19 ~ 22 코스 총거리 63.7km 영덕 구간</p>
<p>▲23 ~ 27 코스 총거리 77.8km 울진 구간</p>
<p>▲28 ~ 34 코스 총거리 99.6km 삼척·동해 구간</p>
<p>▲35 ~ 40 코스 총거리 88.2km 강릉 구간</p>
<p>▲41 ~45 코스 총거리 60.9km 양양·속초 구간</p>
<p>▲45 ~50 코스 총거리 66.3km 고성 구간</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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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진설명</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2235246_0.jpg" alt="ilovepdf_com-86.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 ‘동해 해파랑길’은 부산 오륙도 해맞이 공원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770㎞ 길이의 동해 ‘블루 로드’이다. 오징어 말리기 등 다양한 삶의 현장을 만날 수 있다.</p>
<p>? 해파랑길 10코스. 울산 정자항에서 경주 나아해변까지 14.1㎞ 구간이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2238988_0.jpg" alt="ilovepdf_com-87.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 지난 2015년 겨울 고성 ‘해파랑길’을 여행한 싱가포르 리콴유 총리 부부.(리콴유 총리 페이스북)</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2231148_0.jpg" alt="ilovepdf_com-85.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 해파랑길 1코스는 꼭 걸어봐야 할 부산 명품길로 꼽힌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2247349_0.jpg" alt="ilovepdf_com-89.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 해파랑길 21코스(영덕해맞이공원~축산항)는 하늘과 바다가 함께 어우러지는 고요한 길이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2255127_0.jpg" alt="ilovepdf_com-91.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 해파랑길 4코스 중간 지점에서 만날 수 있는 간절곶 소망우체통.</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2251658_0.jpg" alt="ilovepdf_com-90.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 동해에서 강릉으로 넘어가는 해파랑길 34코스. 묵호등대로 올라는 길에 논골담길 벽화가 있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2259163_0.jpg" alt="ilovepdf_com-92.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 해파랑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49코스 화진포 도보여행길.</p>
<p> </p>2017-09-26T02:04:17.000Z2017-09-26T04:25:36.000Z관리*고기잡이 여행 고창 돌무덤 장어잡이<p>고기잡이 여행</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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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고창 돌무덤 장어잡이</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1114520_0.jpg" alt="ilovepdf_com-72.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글 정기태 사진 위직량</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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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야트막한 강에</p>
<p>수백 개의 돌 쌓고 허물며</p>
<p>온몸으로 잡는 장어</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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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년째 해리천에서 자연 어업 이어온 문제정 씨</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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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무엇이든 첫 걸음을 떼는 일은 녹녹치 않다. 하물며 전국에서 유일무이하다는, 그 이름마저도 생소한 ‘돌무덤 장어잡이’ 현장을 둘러본다는 것이 그리 쉬울 리가 있을까. 지리한 장마철, 반짝 해가 나오는 날을 잡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지역별, 시간대별로 알려주는 기상청 일기예보는 아예 무시해야 했다. 대충 맞추는 것보다 틀리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까.</p>
<p>어슴새벽부터 뒤척이다 고창군 해리면을 찾아가는 날도 그랬다. 한 2주간 여 품 팔아 약속을 했는데 ‘고창-담양 고속도로’에 올라타자마자 비가 듣기 시작했다. 잔뜩 흐린 하늘처럼 맘이 영 답답하고 뒤숭숭했다. 날이 궂으면 작업하기기가 불편하고, 고기도 많이 들지 않음을 오랜 미립으로 아는 까닭이다.</p>
<p>금평리에서 만난 어업인 문제정(45) 씨의 표정도 밝지 않았다. 부러 에둘러 날을 잡은 터라 미안함에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있는데 그가 빨간 ‘다라’와 그물, 쇠꼬챙이를 포터 트럭에 싣고 먼저 길을 잡았다. 빗물 가득 괸 좁장한 고샅을 빠져나와 간척지를 옆구리에 낀 농로를 10여 분 달렸을까? 쇠뜨기·강아지풀·쑥·망초…가 드문드문 보이는가 싶더니 기다란 물줄기가 나신(裸身)을 드러냈다. 잔뜩 흙탕물을 머금은 개천 위로 왜가리·쇠백로·뜸부기·멧새가 나지막이 나는데, 수다쟁이 붉은머리오목눈이도 “삐리릭 삐리릭” 갈대숲에서 튀어 올랐다. 저도 갑작스런 인기척에 여지간이 놀란 모양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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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해리천에 기대여 산다”</p>
<p>이곳 해리천은 고창군 무장면 월림리가 발원지. 어느 야산 나무꾼의 땀방울과 농투산이들의 눈물송이들이 모여 도랑에서 개울로 몸집을 키우다 서해로 꼬리를 감춘다. 하상(河床) 폭 6~150m, 연장 14.1㎞인 지방 2급 하천으로 전 유역(47.7㎢)의 절반가량이 농경지다.</p>
<p>문 씨가 사는 금평리의 월산·목동·용호 등 4개 부락 100여 세대는 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으나, 십 수 년 전에 귀향한 그는 어업으로 생계를 꾸린다. 겨울 끝자락부터 5월까지는 ‘시라스’(실뱀장어)를 잡고 6~10월엔 바다에서 강으로 올라오는 장어잡이에 나선다고. “섬진강에서 파는 자연산 참게도 거짐 다 내가 공급한 거라 보면 되요.”라고 그는 말했다. 하여 “강에 기대여 산다.”는 말은 전적으로 옳다. 그곳에서 찬거리며 용돈이며, 아이들 세뱃돈과 학용품값도 마련했을 터이니까-.</p>
<p>장어잡이는 하루 두 번, 썰물 때 나간다. 손바닥만 한 것부터 10kg은 족히 넘음직한 돌을 차곡차곡 쌓아뒀다가 어두운 틈 속에 숨어있는 장어를 포획하는 방법이다. 작업은 돌무덤 주위에 너비 2m 남짓한 푸른 색 그물을 둘러치고 쇠꼬챙이를 단단히 박는 것이 우선이다. ‘일각망’(一角網)이라 불리는 그물 길이는 15m인데 그 끝에 고기를 한데 모아 가두는 ‘불꼬리’가 달려 있다.</p>
<p>가슴팍까지 차오른 강물에 들어간 뒤 그가 하나 둘씩 돌멩이를 들어 옆으로 던졌다. 돌무더기를 허물면서 1.5m 높이 내외의 새로운 돌탑을 다시 쌓는 셈이다. 이런 돌무덤이 금평리 지류에 35개, 보름에 한번 씩 하나하나 둘러보는데 보수하고 관리하기가 어려워 줄여볼 요량이라고 한다.</p>
<p>국지성 집중호우로 강물이 전날보다 많이 불은 탓일까. 안경을 쓴 채 머리끝까지 물속에 파묻고 돌을 건져내고 던지기를 시간 반 남짓. 하나, 둘, 셋…백열 넷, 백열 다섯…. 바닥에서 걷어내는 돌멩이가 백 개를 훌쩍 넘어서자 숫자 세는 것을 놓쳐 버렸다. 질펀한 뻘밭 경사진 곳에서 우산을 받치고 지켜보다 순간 헤아리지 못해버린 것이다. 아마 200여 개는 족히 되지 않았을까? 첨부터 끝까지 몸을 써서 해야 하는 노가다라 하루에 두 개 털기도 힘들 듯 싶었다. 문득 떠오르는 부질없는 생각하나. “아, 저 친구는 따로 근력운동을 하지 않아도 되것다.”는-. 그렇지만 실없는 사람이라고 놀릴까봐 정작 물어볼 수는 없었다.</p>
<p>새로 쌓은 돌무더기가 물 위로 빼꼼히 머리를 쳐들자 문 씨가 허리를 곧추 세우고 잠시 숨을 돌렸다. 엄청 고생했을 법한데 힘들다는 짜증 한번 없이 “장마 통에 인근 염판에서 간수를 빼내 물이 평소보다 더 짭잘하요. 무더위에 시원하게 비 맞고 일하는 맛도 그런대로 괜찮소.”라고 웃었다. “아마 일반인 중에서 내가 방송 출연료 받는 몇 사람 중 하나일거요. 안주면 안 찍어 줘요.”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p>
<p>그리곤 좀 전에 돌무덤 주위에 고정시킨 그물을 조심스레 걷기 시작했다. 장어가 빠져나가지 않게 한데 모으고 당겼다. 불꼬리를 집어 들자 “파다닥 파드덕-.” 몸을 비비꼬며 부대끼는 소리가 났다. 이날 잡은 장어는 십여 마리. 지척인 동호 해수욕장 인근 양어장을 탈출한 두 마리도 숨을 곳을 찾다가 다시 걸렸다. 부처님 손바닥-지지리도 운 없는 놈들이다.</p>
<p>자연산은 뱃줄기가 하얀 양식과는 달리 노리끼끼한 색깔이 돌았다. 비가 내렸음에도 불구, 마리 수는 제법인데 씨알이 작았다. 하지만 그날그날 강이 내어주는 속곳에 자족하며 감사하고 내일을 기약하는 게 바다와 강에 ‘기대여’사는 어부들의 삶일 것이다. 고되고 힘든 노동이지만 ‘꼬숩고도 정겨운 놀이’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물을 턴 빨간 다라엔 망둥이와 참게도 들어있었는데, 어린 장어 새끼와 함께 “고향 앞으로!” 다시 강으로 돌려보냈다.</p>
<p>“운저리도 회 치면 맛 있는디라, 왜 던져 버리요?”</p>
<p>이 순간을 목격한 사진기자가 소리쳤다. 못내 아쉬운 갑이다. 맞는 말이다. 헌데 좀 있으면 자연산 장어를 먹을 것인데 하찮은 망둑어가 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p>
<p>6~10월 썰물 때… ‘꼬숩고도 힘든’ 작업</p>
<p>문 씨가 잡는 장어는 뱀장어과, 뱀장어 속의 물고기. 조선후기 실학자 서유구(徐有?)가 저술한 ‘전어지’(佃漁志)에는 ‘…겨울과 봄에는 구멍 안에 숨었다가 5월 초에 비로소 나와서 논다. 이때에 잡은 것이 맛이 좋으며 강에는 어느 곳에나 살고 있다. 길이가 간혹 2~3척(60~90cm)이나 된다. 살이 야물고 지방분이 많으며 구우면 향기가 좋다. …’는 대목이 나온다.</p>
<p>한국에 회유하는 장어의 산란장은 수온 16℃ 이상의 난류가 흐르고 1천분의 35의 높은 함도(鹹度)와 수압이 강한 필리핀 북방 태평양 깊은 바다라는 게 정설. 지난 1973년 말, 일본 규슈(九州)대학 우치다 게이타로(內田惠太郞) 연구팀이 밝힌 조사 결과지만, 정확한 회유 경로와 습성은 아직 베일에 묻혀 있다.</p>
<p>수산학자 정문기 박사는 ‘어류박물지’(魚類博物誌)에서 ‘강으로 올라온 뱀장어는 하천과 호수의 단물에서 4~12년 간 서식하다가 8~10월께 바다로 내려간다. 염분이 없고 수압이 낮은 하천에서 살다가 심해로 돌아가기 전 하구 수역에서 체질 변화를 시킨다. 기수역(汽水域) 중에서 적응 훈련을 할 때 추운 겨울이 오면 바다 밑 감탕 속에서 월동에 들어간다.’고 기록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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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전남 고흥에선 이를 ‘뻘두적이’라고 부르며 지방에 따라 드물장어·배암장어·장치·비암치 등의 방언을 가지고 있다. 어부들은 갈퀴가 달린 창이나 써레로 바닥을 이리저리 긁어 잡았는데 나주 명산 구진포·강진 구강포·고창 풍천장어가 특히 유명했다. 영산강의 경우 써레를 이용해 뻘두적이를 잡는 목선이 일제 때 200여 척에 이르렀다고 전해오고 있다. - 정기태, ‘고기잡이 여행’</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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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일본의 경우 ‘우나기’(鰻)이라고 부르며 삼복더위(도요노우시노히/土用の丑の日) 복달임 음식 중 최고로 꼽는다. 간장 양념을 바르고 직화로 구워낸 뒤 산초를 살짝 뿌려 먹는 ‘카바야키’, 밥 위에 얹은 덮밥(우나동·우나쥬), 김이나 파 등과 버무리는 ‘히츠마부시’, 내장을 꼬치에 꽂아 굽는 ‘키모야키’가 대표적이다. 장어와 오이를 새콤하게 무친 ‘우자쿠’, 고추냉이(와사비)·생강·간장과 먹는 ‘시라야키’ 등등…심지어 탄산음료에 엑기스를 넣어 만든 ‘장어 콜라’도 나와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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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지자체 관심과 지원 절실</p>
<p>문 씨 부모가 운영하는 동네 점방 겸 식당 밖에서 바비큐 판에 숯을 지폈다. 빗소리를 들으며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금구이에 ‘소폭 잔’을 기울였다. 넌지시 물어보니 자연산 장어는 헐, kg에 20만원. 양식의 서너 배 값이란다. 그래도 멀리 서울 돈 많은 사장님이나 호텔 주방에서 자주 찾는다고 귀띔했다.</p>
<p>“장어가 멀 제일 좋아하는 줄 아요? 뱃속을 가르면 주로 게와 쏙새기(쏙)가 나와라. 돌무덤에서는 꼬리부터 빠져 나오지라. 꼬리로 헤엄치니까 사람들이 정력에 좋다고들 하는데, 영양학적으로는 다 똑 같다고 합디다. 나중에 장어를 먹을 때는 장사가 제일 안 되는 집에 가서 먹어야 더 맛있으요. 수족관에 있음서 육질이 단단해서라. 글고 아주 큰 것보다는 중간 정도를 고르쇼. …”</p>
<p>그는 “야행성인 장어도 사람하고 똑 같아라. 날 더우면 시원하고 그늘진 깜깜한 구멍을 찾아 파고 든께.”라며 돌탑 쌓는 포인트의 영업비밀(?)을 털어놨다. 고향에 돌아와 내수면 어업허가를 받은 지 13년. 해리천에 터를 잡고 전통 어법으로 장어를 잡아온 그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p>
<p>허나 아스라한 옛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돌무덤 장어잡이는 이제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양식에만 몰려들었지, 옛 방식을 고집하는 사람이 전국 어디에서건 눈을 씻고 봐도 없기 때문이다.</p>
<p>문 씨는 “다른 것들은 무형문화재로 지정, 후계자를 육성하고 계승하도록 도와주면서 전통 어법에 대해서는 누구 하나 관심이 없다”며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적 배려와 지원이 절실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신안군이 90년대 초 25척이던 홍어 잡이 주낙배가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연간 수천만 원씩의 보조금을 선주들에게 지원해 명맥을 잇게 하고, 지역 특산품으로 부활시켰던 사례는 그저 부러울 따름이라고. 귀찮고 시간을 많이 잡아먹지만, 방송사들의 촬영 요청을 마다하지 않는 연유도 꽉 막힌 행정기관의 인식을 바꿔보자는 속내라고 했다.</p>
<p>홀로 외로이 돌무덤 장어잡이를 고집하는 문 씨와 헤어지면서, 나는 소망했다. 그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또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대부터 내려져 온 이 전통 어법이 증손자의 손자에까지 이어지기를. 머리에 서리가 앉고 짤름대는 꾸부정 할아범이 됐을 때도 그가 세파에 굴하지 않고 지금처럼 해맑은 미소를 간직하고 있기를. 먼 훗날에도 여전히 우리 바다와 강에서 힘차게 꼬리치며 올라오는 뱀장어 떼를 볼 수 있기를. 그리하여 해리천의 돌무덤을 헤집는 젊은 어부들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나는 바랬다.</p>
<p>이런 저런 잡생각에 젖어 광주로 돌아오는 길, 사위는 낮게 깔린 먹장구름에 갇혀 있다. 줄창 쏟아지던 장대비는 더욱 굵어지고 있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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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염전이 바닷물을 가두는 것만큼 다만 견디기 힘든 건 기다림이다. 수 만 마리의 실뱀장어 떼가 꼬리를 치며 헤엄쳐 오듯 바람이 불어도 목 좋은 물골을 골라 깔아 놓은 그물에 찡긴 해초 한 자락 걸리지 않을 때가 더 많아 갈 때 밭이 고단한 잠 속까지 들어와 안개를 풀며 웅성거렸고 바람의 만조에 잠겨 마을의 지붕들이 자주 들썩거렸다. 오랜 기다린 그물일수록 기다림으로 터져 나갈듯 하지만 그 기다림이 다시 체념으로 비워지는 건 아니다. 잡힌 실뱀장어는 양어장에 팔려 쏠쏠한 벌이도 되고 기름진 사료로 디룩디룩 살이 쪄 한 접시의 장어구이로 자라기도 할 테지만 실뱀장어가 바닷말을 들르지 않고 비껴가도 앞바다가 체념으로 묽어지는 건 결코 아니다.…’ - 강윤후, ‘실뱀장어를 기다리며’</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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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다양한 장어류, 어떻게 다를까?</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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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여름철 ‘샤브샤브’로 즐겨 찾는 갯장어는 수심 20~50m 바다의 모래 진흙이나 암초 지대에서 산다. 제주도 남쪽 해역에서 겨울을 보내고 봄에 북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큰 것은 2m나 되는데 물고기나 조개 따위를 잡아먹고 산다. 정약전은 ‘자산어보’(玆山魚譜)에서 ‘입은 돼지 같고 뼈가 견고하며 능히 사람을 물어 삼킨다.’고 설명했다. 일본 말로는 ‘하모’(hamo)다. 아무것이나 잘 무는 습성에서 ‘물다’라는 뜻의 ‘하무’에서 비롯됐다. 지역에 따라 ‘개장어’ ‘놋장어’ ‘이장어’(통영) ‘참장어’(여수)라는 여러 방언을 가지고 있다. 고흥과 여수 지방에서는 주낙으로 낚아 올린다. 미끼는 주로 냉동 전어를 쓴다.</p>
<p>우리가 ‘아나고’라고 부르는 것은 붕장어다. 몸 옆에 한 줄의 흰 점이 있고 짙은 갈색이며 이빨과 몸길이가 작다. 흔히 “아나고를 먹은 다음 섹스를 ‘안 하고는 못 배긴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말하지만, 일본 명이 ‘아나고’(anago)다. 바닷물이 차가워지는 9월 이후 통발과 주낙으로 잡는다.</p>
<p>건강식품으로 알려진 장어구이나 민물 장어는 대부분 뱀장어다. 민물과 바다를 오가며 사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겨울철 연안 해역에서 6㎝ 내외의 실뱀장어를 그물(鮟鱇網) 로 잡아 양식한다. 제주도 서귀포시 천지연에 서식하는 천연기념물 무태장어도 같은 뱀장어 속(屬)이며, 전 세계적으로는 20여 종이 발견됐다.</p>
<p>술안주로 인기 높은 ‘곰장어’는 남해안과 제주도에서 나는 먹장어가 표준말이다. 눈이 피부에 묻혀 있는데, 오징어 등 다른 어류에 달라붙어 살과 내장을 파먹고 사는 기생성 물고기다. 경골류(硬骨類)에 속하는 뱀장어·갯장어·붕장어와 달리, 턱이 없고 입이 둥근 원구류(圓口類)에 속한다. 해방 후 지갑·구두 등을 만들기 위해 가죽만 사용하고 버렸는데, 선술집이나 포장마차에서 싼 값에 사다 구워 팔면서 우리 곁에 왔다. 바다 밑 모래 또는 진흙바닥에 몸을 파묻고 지내는 야행성으로, 통발과 그물로 잡는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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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그림설명</p>
<p>사나운 이빨 날렵한 꼬리 - 갯장어</p>
<p>몸 옆에 한 줄의 흰 점 - 붕장어</p>
<p>몸은 가늘고 꼬리는 납작 - 뱀장어</p>
<p>동그란 입 못난 얼굴 - 곰장어</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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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진설명</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1109730_0.jpg" alt="ilovepdf_com-73.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에서 장어를 유인하는 돌무덤 장어잡이. 돌탑을 쌓은 뒤 그물을 둘러쳐 야행성 장어를 잡는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1118921_0.jpg" alt="ilovepdf_com-74.jpg 이미지입니다." width="30%" /></p>
<p>? 어업인 문제정 씨.</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2011065_0.png" alt="제목 없음.pn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 돌무덤을 허물고 새로 쌓는 일은 고단하고 힘들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1652511_0.jpg" alt="ilovepdf_com-75.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 그물의 마지막 끝자락, 불꼬리를 확인하는 일은 늘 설레고 두근거린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1657217_0.jpg" alt="ilovepdf_com-76.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 어느 나무꾼의 땀방울과 농투산이의 눈물송이가 모여 개울로 몸집을 키운 해리천. 심원·상하·무장 등 4개 면민들의 질긴 삶이 염판의 소금기에 녹아 서해로 빠져나간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1709999_0.jpg" alt="ilovepdf_com-79.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 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늘은 어쩔깝세’ 내일을 기다리는 게 강과 바다에 기대여 사는 어민들의 삶이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1705637_0.jpg" alt="ilovepdf_com-78.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 장어구이의 참맛은 숯불을 지펴 소금구이로 먹는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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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1713899_0.jpg" alt="ilovepdf_com-80.jpg 이미지입니다." width="50%"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1718556_0.jpg" alt="ilovepdf_com-81.jpg 이미지입니다." width="50%"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1722945_0.jpg" alt="ilovepdf_com-82.jpg 이미지입니다." width="50%"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31727456_0.jpg" alt="ilovepdf_com-83.jpg 이미지입니다." width="5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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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고창 돌무덤 장어잡이</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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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해리천(기수역)</p>
<p>1.5m 내외</p>
<p>강바닥</p>
<p>그물고정용 쇠꼬챙이</p>
<p>일각망</p>
<p>1m 내외</p>
<p>불꼬리</p>
<p>장어</p>2017-09-26T02:03:51.000Z2017-09-26T04:21:39.000Z관리*한국어촌여지도 두 번째 여정 효심·돌담 살아 있는 섬의 가슴 전남 비금도 내촌마을<p>한국어촌여지도 두 번째 여정</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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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효심·돌담 살아 있는 섬의 가슴</p>
<p>전남 비금도 내촌마을</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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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2624947_0.jpg" alt="P36-37 하누넘 하트해변.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글 박성천 사진 최현배</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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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바다 바람 맞아 사람도 시금치도 튼실허요”</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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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바다와 섬의 숙명을 견뎌온 비금도</p>
<p>신안(新安)은 1004개의 섬이 있다 해서 ‘천사의 섬’이라 불린다. 정확히 1004개의 섬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천사’와 ‘1004’를 연결하기 위한 수사적 의미가 담겨 있다. 물론 그만큼 섬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p>
<p>신안의 섬들은 목포의 서쪽 다도해 해역에 펼쳐져 있다. 사람들은 다이아몬드의 형상을 닮았다 해서 ‘다이아몬드 제도’라고 부른다. 자은도, 암태도, 팔금도, 안좌도, 장산도, 신의도, 하의도, 도초도, 비금도 등이 바로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이들 섬은 ‘따로 또 같이’ 다정한 형제처럼 바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p>
<p>그 가운데 비금도와 도초도는 다이아몬드 제도의 꼭짓점에 해당한다. 이 두 섬을 지나면 가뭇없이 펼쳐진 흑산도의 바다가 이어진다. 그러므로 다이아몬드 제도는 비금도와 도초도까지 이름하는 것일 터이다. 비금도와 도초도는 지난 1996년 서남문대교(937m)가 개통되면서 하나로 연결되었다. 면적은 도초도가 비금도에 비해 조금 넓지만 두 섬은 어깨를 서로에게 내어주는 형제섬이 된 것이다.</p>
<p>비금도(飛禽島)는 섬의 형상이 날아가는 새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어감으로도 그렇고, 한자의 표기로도 그렇고, 시적인 이미지가 묻어난다. 목포에서 약 45km 떨어져 있지만, 다도해라는 해역이 가로 놓인 때문인지 조금은 멀게 느껴진다. 천일염과 섬초(시금치)는 전국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는 이곳의 특산품이다. 오늘의 비금도를 세상에 널리 알린 효자 품목이다.</p>
<p>그러나, 돈이 되는 특산품과 작물만이 지역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섬은 전통과 문화, 생태와 환경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는 지역이어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번 어촌여지도의 목적지는 비금도 내촌(內村)마을. ‘섬 속의 섬’이라고 할 만큼 내촌마을은 비금도의 전통문화가 살아 숨 쉬는 지역이다. 옛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지혜가 오롯이 남아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p>
<p>목적지인 비금도 내촌마을을 상상하며 압해도 송공항으로 내달린다. 목포 북항에서도 배가 있지만 신안의 따사로운 품을 가늠하기 위해선 압해도에서 철부선을 타는 것도 좋다. 압해도는 섬이 목포 앞바다를 지그시 누른 형상이라 하여 이름 붙여졌다 한다.</p>
<p>지금은 연륙교가 연결돼 목포에서 압해도는 언제든 승용차로 건널 수 있다. “문명은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러나 연륙교 밑으로 여울지며 흘러가는 바다는 “시간을 거스르는 것이 문화”라고 말하는 것 같다. 신안을 천사의 섬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아트 아일랜드’라고도 부르는 이유도 바다 때문이다. 예술의 섬이면서 문화의 섬이다.</p>
<p>송공항에서 비금도로 가는 첫 배는 7시 50분에 있다. 아침 일찍 서두르지 않으면 배를 놓치기 일쑤다. 더욱이 휴가철이나 성수기 때는 선착장 입구부터 줄이 늘어설 만큼 차량으로 붐빈다. 항구에 와보면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섬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압해도 송공항으로 이어지는 2차선의 도로를 달려 마침내 선착장에 도착한다. 풍광을 감상하며 달려오는 맛이 여간 쏠쏠하지 않다.</p>
<p>출발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항구에 가득 울려 퍼진다. 서서히 뱃머리를 돌린 배가 바다를 향해 미끄러지듯 내달린다. 따가운 햇살이 아침 바다 위로 쏟아져 내린다. 불그스름하게 빛나는 수면이 점차 은빛으로 물든다. 얼마쯤 지나자 안좌도와 팔금도가 눈에 들어온다. 옹기종기 박힌 섬들과 이웃하며 사이좋게 앉은 ‘다이아몬드 제도’는 말 그대로 수려 그 자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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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돌담과 우실에 담긴 지혜와 투박함</p>
<p>비금도(飛禽島)의 첫 인상은 독수리를 본 느낌이었다. 가산항 부두 첫머리에 독수리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서 있다. 45.25㎢에 이르는 면적과 89.2km의 해안선의 길이가 거대한 독수리로 이미지화 된다. 비금도는 원래 현재 논의 60~70%가 바다였다. 여러 개의 섬이 있었지만 수차례 간척이 진행되면서 작은 섬들이 하나의 큰 섬으로 편입됐다.</p>
<p>독수리 조형물 바로 옆에는 신안 천일염 보급의 시초인 박삼만 씨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마에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수리차를 돌리는 박삼만 씨의 모습은 굳은 결기가 서려 있다.</p>
<p>“지금으로부터 68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1946년 광복을 맞이하자 ‘먹고 살기 위해’ 만주에 갔거나, 평안도 염전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비금도로 돌아왔다. 이들을 대표하는 사람이 손봉훈(孫鳳勳), 박삼만(朴三萬) 씨. 손 씨는 만주에서 평양을 거쳐서 천일제염 현장을 보고 왔다. 당시 제염 인력으로 비금도 등 섬 주민들이 평안도까지 가서 생활했기 때문에 그런 연고가 작용해 가능했다. 박삼만 씨는 한 때 평남 용강군 귀성염전 기술자였다. 전통적인 방식인 화염을 해오던 주민들은 손봉훈, 박삼만 씨와 함께 비금도 수림리 앞바다 일부를 간척하여 천일염전을 만들었다. 지게로 돌과 흙을 모아 제방을 쌓았다. 그게 ‘시조염전’이라 불린다. 그 해 6월 준공한 천일염전지에서 하얀 소금, 아니 하얀 금(金)이 나오기 시작했다. ‘반드시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믿음은 하얀 금으로 돌아왔다.”</p>
<p>전통과 문화의 마을, 내촌마을로 향하기 전 먼저 비금도의 천일염의 유래에 대해서 톺아본다. 하얀 소금이 하얀 금(金)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만만치 않다. ‘비금도 소금’을 제일로 치는 것은 그만한 연유와 내력이 있을 터였다.</p>
<p>가산항을 벗어나자 소금의 고장답게 염전이 펼쳐진다. 넓은 염전 사이로 커다란 바위산이 뽐내듯 존재를 드러낸다. ‘덕산’(74m)이라 불리는 산인데 아래로 넓은 염전이 자리한다. 덕산은 문어적 표현이고 이곳 사람들은 구어적 표현인 ‘떡메산’이라고 부른다. 후자가 훨씬 정겨운 것은 떡메가 주는 풍성함과 촌스러움의 이미지 때문이다.</p>
<p>“비금도 염전은 총 길이가 약 10여 km에 달하지요. 주로 동쪽 해안에 염전이 자리하는데 저기 떡메산 아래쪽이 대동염전입니다. 1948년을 전후해 비금도 주민 450가구가 결성한 조합이 모태가 되었습니다. 약 100ha의 광활한 염전은 설립 당시로는 국내 최대 규모였다고 하네요.”</p>
<p>장미희(57) 비금면 자원봉사회장의 설명이다. 유명한 배우의 이름과 같은 동명이인이다. 비금도 홍보라면 자신의 일처럼 가이드를 자청한단다. 마음씨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애향심이 남달라 보여 이곳이 고향인가 물었더니 예상했던 대로다. 비금도에 내려온 지는 20여 년 가까이 된다고 한다. 그녀는 “젊은 시절 사업도 하고 큰돈도 만져봤지만 예상치 못한 일로 큰 손실을 입었다”며 “비금도에 들어온 이후 염전 일도 하고, 식당도 하면서 서서히 기반을 잡았다”고 말했다.</p>
<p>장 회장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내촌마을로 들어선다. 섬의 특성상 비금도 또한 바람이 많은 곳이다. 늦여름이지만 차장 밖으로 바람이 불어온다. 한겨울에는 바람의 기세가 만만치 않을 것 같다.</p>
<p>“내촌마을은 비금도뿐 아니라 신안에서 전통문화가 가장 잘 보존돼 있는 마을입니다. 인근에 해변이 가까이 있어 바닷바람이 센 곳이지요. 보다시피 마을을 에둘러 싸고 기다란 돌담이 이어져 있습니다.”</p>
<p>외지인을 맞이하는 것은 정겨운 돌담이다. 구불구불하기도 하고, 직선처럼 반듯하기도 하다. 골목마다 드리워진 돌담은 작은 요새를 닮았다. 담은 대략 2m 안팎에 길이는 3km에 이른다. 지난 2006년 등록문화재 제238호로 지정된 돌담길은 전통 시골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p>
<p>“저기 멀리 보이는 산이 선왕산입니다. 선조들은 산 중턱에서 돌을 날라 돌담을 쌓은 거지요. 물론 당시에는 유일한 운송 수단이 지게였을 거구요. 구불구불한 산길을 휘돌아 무거운 돌을 지게에 지고 내려왔을 수고를 생각하면 눈물겹지요.”</p>
<p>“내촌마을의 돌담은 옛사람들의 정성과 지혜의 결실”이라는 말에 절로 수긍이 간다. 오랜 세월이 흘렀을 터인데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돌 모양은 하나같이 뾰족하고 울퉁불퉁하다. 산이나 들판에 뒹구는 자연 석재를 그대로 축조했다는 방증이다.</p>
<p>“사람들의 얼굴과 성격이 제각각이듯 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담장을 쌓은 이의 정성도 정성이지만, 쓰임에 맞게 제자리를 찾아들어 간 돌들의 순응도 대단하지요.”</p>
<p>거칠고 척박한 환경을 이겨온 마을 주민들의 강인함이 느껴진다. 돌담을 따라 걷는다. 집집마다 색다른 꽃들이 피어 있다. 돌담 너머로 언뜻언뜻 보이는 꽃들은 수줍다 못해 앙증맞다. 색동호박, 접시꽃, 능소화…. 시골 돌담을 배경으로 피어난 꽃이라 더 예쁘고 살갑다. 돌담 시골길에 핀 꽃이 정원에 핀 붉은 장미보다 아름다운 이유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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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겨울철 섬초 전국적으로 명성</p>
<p>현재 내촌마을은 41가구 70여 명이 거주한다. 물론 60세부터 70대에 이르는 분들이 가장 많다. 주로 밭농사를 짓는데 특히 겨울철 섬초(시금치)를 많이 재배한다. 알려진 대로 비금도 섬초는 겨울 해풍을 이겨낸 탓에 맛 좋기로 유명하다. 1996년 비금농협에서 ‘섬초’라는 브랜드로 출하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p>
<p>“섬초는 9월 하순에 파종을 해 이듬해 3월까지 수확을 합니다. 겨울 채소 중에 시금치만큼 영양분이 풍부한 채소도 없지요. 겨울 한철 칼바람을 이겨 내었기에 비금도 시금치는 달고 맛이 있죠.”</p>
<p>비금도 섬초는 우리네 인생을 말해주는 듯하다. 고난과 아픔을 이겨 낸 인생이 깊이 있고 아름답지 않던가. 저편 골목 어귀에서 깨를 말리는 할머니가 보인다. 인사를 건네자 낯선 이들을 반갑게 맞아준다. “올해는 비가 많이 안 와서 깨 작황이 좋은 편이지라우. 요놈 잘 말려서 폴기도 하고, 명절 때 자석들 오면 쬐금씩 나눠 줄라고 그라요.”</p>
<p>김운단(82) 할머니는 깨를 뒤적거리며 만면에 미소를 짓는다. 정겨운 돌담과 할머니의 무심한 듯 순박한 표정이 조화를 이룬다. 80평생을 살아오면서 깨가 쏟아지듯 행복한 때가 언제였을까.</p>
<p>할머니의 안부를 묻고 마을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구석구석 들여다볼수록 귀한 동네구나. 향토적 서정과 문리의 느낌이 묻어난다. 좀 더 마을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 장미희 회장이 소개한 마을 분을 만나기로 했다(당초에는 내촌마을 이장님을 만나기로 했지만, 하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치통이 도져 목포에 있는 치과로 치료를 나갔다고 한다).</p>
<p>장 회장이 소개한 분은 이곳에서 나고 자란 강영종(66) 씨다. 그는 신안군청 사업소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 퇴직을 하고, 지금은 고향에 내려와 산다. 밀짚모자를 쓰고 농사일을 거드는 모습이 영락없는 농부의 모습이다. 그러나 안경 사이로 비치는 모습은 시골 선비의 인상이다.</p>
<p>“우리 마을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겠네요. 선왕산 자락에 위치한 터라 마을 분위기가 안온하지요. 무엇보다 공직에 진출한 이들이 많다는 점이 자랑이겠네요. 그만큼 교육열이 높다는 뜻이겠지요.”</p>
<p>마을 자랑을 하는 그의 말에 자부심이 느껴진다. 또한 “신안에서 관리보존 마을로 두 군데가 지정됐는데 내촌마을이 포함됐다.”고 덧붙였다.</p>
<p>“내촌의 더 큰 자랑은 경로효친마을이라는 점입니다. 전남 최초로 지정됐는데, 마을 입구에 표지석이 있습니다. 도청에서 40년 전부터 내촌을 경로효친마을로 지정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어요. 그만큼 애향심이나 효 사상이 다른 지역과 비교해 남달랐다는 의미지요.”</p>
<p>강 씨의 말을 듣고 보니 마을 입구에서 봤던 경로효친 표지석이 떠오른다. 지금도 향우회에서는 명절 때면 어르신들을 찾아뵙고 문안을 드린다. 장미희 자원봉사회장도 회원들끼리 혼자 사는 어르신이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찾아가 청소도 해주고 도시락도 챙겨준다.</p>
<p>“옛날 우리 마을에 김옥광이라는 효자가 있었답니다. 가난했지만 부모님을 극진히 봉양했지요. 그러다 연로한 부친이 병으로 돌아가시려 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넣었답니다. 부친이 돌아가신 이후에는 묘 옆에서 움막을 짓고 3년간이나 시묘살이를 했구요. 효자 밑에서 효자 난다는 말이 있듯이 그의 아들도 효성이 지극했답니다. 마찬가지로 김옥광의 손자도 부친과 조부를 본받아 효행이 남달랐구요.”</p>
<p>강 씨는 이 모든 것이 마을을 둘러싼 지형적 환경과 주민들의 공경 의식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한다.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보름 산당제를 지낸다. 예전에는 3일 정성을 드릴 만큼 중요한 행사였다.</p>
<p>강영종 어르신의 말을 듣고 나자, 내촌마을이 그저 그런 자연 마을로 보이지 않는다. 이곳의 도로명 주소가 ‘효자길’로 불리는 이유를 알겠다. 비금도 내륙에 자리한 탓에 소금은 생산하지 않지만, 세상이 썩지 않도록 방부제 역할을 해준다. 경로효친은 정신적 소금에 해당한다.</p>
<p>마을을 넘어 그 유명한 하누넘해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마을 담장과 유사한 돌담이 보인다. 해변과 선왕산을 사이에 두고 삼거리에 자리한 기다란 담이다. 명칭은 ‘우실’. 마을의 울타리라는 뜻으로 ‘울실’이라 불린다. 이곳은 예로부터 방풍의 역할을 넘어 마을의 신이 좌정한 신정지역으로 여겨졌다.</p>
<p>“내월우실은 모두 두 개의 담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대략 길이가 15m와 25m 정도 돼지요. 마을의 담장보다 높은 건 바닷바람이 마을을 덮치는 걸 막기 위해서지요.”</p>
<p>장미희 회장의 말을 듣다 말고 깜짝 놀라고 만다. 눈앞에 펼쳐진 하트해변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온다. 굽이굽이 해안도로를 따라 펼쳐진 풍경은 선경(仙景)에 다름 아니다. 하트 모양의조형물이 이채롭다. 하트 조형 사이로 눈을 대고 먼 바다를 바라본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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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슬픈 전설이 애틋한 하누넘해변</p>
<p>하누넘해변은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죽은 여인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누운 여자의 형상을 한 바위와 해변의 하트 모양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이곳은 드라마 ‘봄의 왈츠’ 촬영지로도 알려져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p>
<p>이밖에 내촌마을 인근에는 긴 백사장이 아스라이 펼쳐진 명사십리해수욕장이 있다. 아무리 밟아도 모래에 발자국이 남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다. 또한 ‘신의 한수’로 알려진 바둑기사 이세돌 기념관도 둘러볼 만하다. 기념관에는 비금도 도고리에서 태어나 ‘세상을 지배하는 돌’로 성장한 이세돌의 활약상이 전시돼 있다.</p>
<p>한편 염전이 많은 도고마을에서는 이와 관련한 체험을 할 수 있다. ‘햇볕, 바다, 그리고 바람이 만든 길’이라는 코스를 만들어 외지인들이 직접 걸으면서 비금도의 생태와 멋을 체험할 수 있다. 염전 체험, 섬초 수확 체험을 원하는 이들은 체험센터로 연락하면 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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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신안 비금도 내촌마을 여행 Ti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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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돌담과 우실 등 역사적인 내력을 먼저 파악하고 방문하는 것이 좋다. 또한 돌담과 우실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왜 중요하고 보존해야 할 문화재인지를 인문학적, 인류학적 관점에서 조명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단 내촌마을에는 마땅한 숙박시설이나 식당이 없다. 번거롭지만 면사무소 인근이나 명사십리해변 쪽에서 찾기를 권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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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어부의 밥상</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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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김에 싸서 간장에 살짝</p>
<p>뻘이 좋으니까 확실히 다른 맛</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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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시골밥상의 민어회</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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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2940986_0.jpg" alt="P44 민어회_1.jpg 이미지입니다." width="70%"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2946256_0.jpg" alt="P44 민어회_2.jpg 이미지입니다." width="3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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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비금도 일대에서는 민어가 많이 잡힌다. 임금님 상에 오를 만큼 귀한 생선이라 쉽게 접하는 음식이 아니다. 장미희 비금도자원봉사회장이 추천한 ‘시골밥상’ 식당으로 민어를 먹기 위해 들어선다. 벽면에 쓰인 글귀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모 감사합니다. 덕분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다음에 와도 반갑게 맞아주세요.”</p>
<p>상차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겁다. 톳나물, 깻잎볶음, 묵은지, 열무김치, 고추젓갈, 황석어 젓갈, 해삼, 멍게, 낙지, 우렁 등이 먼저 올라온다. 섬에서 난 것이라 첫눈에도 싱싱해 보인다. 이윽고 주 메뉴인 민어회가 등장한다. 잘 손질된 민어와 부레, 껍질이 정갈하게 놓여 있다. 불그스름한 빛과 백색의 빛, 분홍의 빛이 이질적인 조화를 이루며 식욕을 자극한다.</p>
<p>“민어회를 맛있게 먹는 방법은 따로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초고추장에 와사비를 찍어 먹지만, 저는 김에 싸서 살짝 간장을 찍어 먹거든요.”</p>
<p>맛있게 민어회를 먹는 법을 물었더니 식당 주인 김영숙(51) 씨가 소개해준 비법이다. 김 씨는 “워낙 민어를 좋아해서인지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고 한다. 또 하나, “상추에 맨밥과 민어를 싸서 먹어도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고 덧붙인다.</p>
<p>식당을 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자연산 민어회를 먹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들이 적지 않다. 김 씨가 “서방님”이라고 부르는 문제홍(51) 씨가 직접 바다에서 민어를 잡는다. “신안 바다는 뻘이 좋아 민어의 맛이 여느 지역과는 다르지요. 남편이 바다에 나가 직접 민어를 잡기 때문에 손님들에게 신선한 민어를 드릴 수 있어요.”</p>
<p>산지에서 바로 썰기 때문에 씹히는 맛이 다르다. 껍질을 벗기고 결대로 써는 게 아니라, 민어는 나름의 써는 결이 있다. 토막을 내서 썰어야 모양이 예쁘게 나온다고 귀띔을 한다. 부레, 뱃살, 살, 맛있는 순서대로 민어를 음미한다. 입안 가득 신안의 별미가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다. 여름에서 초가을에 이르는 지금이 민어가 많이 나는 철이다. 그만큼 맛도 좋다는 뜻이다.</p>
<p>회를 다 먹고 나자 민어매운탕이 나온다. 적당히 밴 기름이 입맛을 당긴다. 칼칼하면서도 매운 맛이 입안을 단번에 장악해버린다.</p>
<p>“우리 집은 비금도에서 나는 천일소금으로 간을 합니다. 여기에 다시마, 마늘, 고추, 호박을 넣지요. 달짝지근하면서도 적당히 매운맛이 포인트라고 할 수 있지요.”</p>
<p>문의 061-275-4667, 신안군 비금면 덕산리 읍동길 30-1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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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천일염의 산 역사</p>
<p>대동염전</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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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0ha 넘는 규모</p>
<p>2007년 등록문화재 제362호 지정</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3532900_0.jpg" alt="12.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대동염전을 알기 위해서는 비금도 떡메산(덕산)에 올라가야 한다. 정상에 올라 발아래 펼쳐진 광활한 염전을 보노라면 비금도 사람들의 근면과 끈기, 강인함을 느끼게 된다. 예전에는 아래가 모두 바다였다고 한다. 어디선가 바닷물이 흘러드는 소리가 귓가로 스미는 듯하다.</p>
<p>대동염전은 1948년을 전후해 비금도 주민 450세대가 염전조합을 만든 것이 토대가 됐다. 이 넓은 소금밭을 사람들이 대동염전이라 부른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겠다. 흔히 우리 조상들은 함께 행복한 세상을 ‘대동세상’이라 일컬었다. 아마도 대동염전에는 그러한 철학과 의미가 투영돼 있을 거다.</p>
<p>떡메산 아래 펼쳐진 대동염전은 소금밭을 이루는 부지들이 조화롭게 구성돼 있다. 저수지, 증발지(蒸發池), 결정지(結晶池), 해주(海宙)가 펼쳐져 있다. 천일염전의 원형을 잘 보여주는 이곳은 지난 2007년 문화재지정등록문화재(제362호)로 지정됐다.</p>
<p>대동염전을 일구기 위한 공사는 가산과 시랑도 그리고 떡메산을 잇는 방조제 만들기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간척지가 확보되면서 염전의 모습이 구체화된다. 100ha가 넘는 염전에서 소금이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1951년부터로 추정된다.</p>
<p>당시 비금도의 천일제염 기술은 전국에서도 알아줄 정도였다. 천일염전 기술자 양성소를 설치해 직접 인력을 양성했다. 이곳을 근거지로 천일제염 기술은 신안은 물론 남도의 여타 해안 지역에까지 퍼져나갔다. 우리나라 염전 역사의 토대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p>
<p>현재 대동염전은 주민들이 각기 나눠서 소유하고 있다. 규모가 큰 경우 회사 형태로 소유권을 갖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외지 사람들이 소유하는 방식과도 변별된다. 말 그대로 ‘대동’이라는 말을 실현해가고 있다. 떡메산 인근에 곧 소금박물관이 건립되면 이곳은 신안의 명소로 발돋움할 것이다.</p>
<p>문의 비금면사무소 061-240-3728</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2951560_0.jpg" alt="P45 대동염전.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 </p>
<p>사진설명</p>
<p>비금도 대동염전은 “함께 행복한 세상을 만들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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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진설명</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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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비금도 내촌마을 언덕길에 자리한 하누넘해변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하트해변이다.</p>
<p>이곳은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죽은 여인의 전설이 내려온다. 하트 형상 조형물에서 먼 바다를 바라보는 운치는 감동 그 자체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3401824_0.jpg" alt="11.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전국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비금도의 천일염은 지난 1946년 해방을 맞이해 평안도 염전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돌아오면서 생산되기 시작했다.</p>
<p>바닷물이 하얀 소금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오랜 기다림과 염부의 땀의 대가가 맞물려 이뤄진 결실이다. <비금면사무소 제공></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2630367_0.jpg" alt="P38 내촌마을 돌담.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2857196_0.jpg" alt="P38 이색적인 조형물.jpg 이미지입니다." width="80%"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2850675_0.jpg" alt="P38 독수리 조형물.jpg 이미지입니다." width="20%" /></p>
<p>내촌마을 돌담 풍경.(위) 비금도 인근에 자리한 이색적인 조형물.</p>
<p>1948년을 전후해 비금도 주민 450세대가 참여한 염전조합이 토대가 된 대동염전. 떡메산 아래 펼쳐진 대동염전은 100ha에 이를 만큼 광활하다. <비금면사무소 제공></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2909815_0.jpg" alt="P41 자원봉사회 장미희 회장.jpg 이미지입니다." width="30%" /></p>
<p>비금도 자원봉사회 장미희 회장.(위)</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4425357_0.png" alt="t.pn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2904129_0.jpg" alt="P41 내촌마을에서 만난 할머니.jpg 이미지입니다." width="50%" /></p>
<p>비금도 특산물 섬초(시금치).(가운데)</p>
<p>내촌마을에서 만난, 참깨 줄기를 말리고 있는 어느 할머니.</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2917019_0.jpg" alt="P42 내촌마을 효자비.jpg 이미지입니다." width="32%"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2922621_0.jpg" alt="P42 하누넘해변 라이딩 모습.jpg 이미지입니다." width="68%"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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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내촌마을은 전남 최초로 경로효친마을로 지정된 모범적인 동네다. 입구 언덕에 세워진 효자비.(왼쪽)</p>
<p>시원스레 펼쳐진 하누넘해변을 따라 관광객이 라이딩을 하고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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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2927486_0.jpg" alt="P43 내촌마을-지도.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 </p>
<p>찾아가는 길</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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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주소 전라남도 신안군 비금면 내월리 내촌마을</p>
<p>전화번호 010-5344-1839, 010-3601-8826</p>
<p>교통편</p>
<p>- 승용차</p>
<ul>
<li>서해안고속도로→목포 IC→목포여객터미널(목포북항, 송공항)</li>
</ul>
<p>- 여객선</p>
<ul>
<li>목포여객터미널-비금도(07:00, 13:00) 대흥 고속페리 061-244-9915</li>
<li>목포북항-비금도(05:55, 10:30, 15:20) 섬드리비금농협페리 061-244-5251</li>
<li>송공-비금도(07:50, 14:00) 대흥 고속페리 061-244-9915</li>
</ul>
<p>※ 출항 및 정확한 배 시간은 전화문의 후 타는 게 좋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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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p>2017-09-26T01:26:33.000Z2017-09-26T01:51:06.000Z관리*한국어촌여지도 두 번째 여정 ‘소금빌레’ 돌염전의 전통 제주 애월 구엄마을<p>한국어촌여지도 두 번째 여정</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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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소금빌레’ 돌염전의 전통</p>
<p>제주 애월 구엄마을</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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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1236359_0.JPG" alt="P26-27 구엄마을 소금빌레.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글 김용태 사진 박성배</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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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원담에 멸치 떼 들고, 소금판 빛나던 시절 있었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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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조선 명종 때 빌레뜨르 돌염전 시작</p>
<p>구엄마을은 제주시로부터 서쪽 16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다. 농업과 어업을 병행하는 마을로 420여 가구에 천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제법 큰 마을이다. 본격적인 휴가철이 지난 8월 말이라지만 관광객들의 방문은 식지 않아 보였다. 구엄포구 좌우로 뻗은 해안에는 검은 현무암들의 장관이 이어지고 여행객들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장엄한 풍경을 눈으로 카메라로 담기 위해 바쁘다.</p>
<p>제주 해안에서 현무암들을 발견하기는 백사장의 모래만큼이나 쉽지만 구엄의 현무암에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 있다. 구엄포구의 좌측으로 해안을 따라 길이 500여 미터에 이르는 평평한 암반 지대가 보인다. 용암이 흘러내려 굳은 거대한 암반 위로 오랜 세월 파도의 침식이 진행되면서 평평한 면이 생겼다. 제주 사람들은 ‘빌레뜨르’라고 부르는 파식대다. 일부 빌레뜨르 위로 황토색 선들이 보인다. 돌소금을 만드는 염전이다.</p>
<p>구엄마을은 예로부터 소금을 만드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엄쟁이(嚴藏伊)’라 불렸다. 구엄마을에서 돌염전이 시작된 건 조선 명종 14년(1559년)에 강려목사가 부임하면서라고 전해진다. 강려목사가 제염법을 현지 백성들에게 가르쳐 소금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생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문헌상의 기록일 뿐이며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고려시대에도 마을 이름이 ‘엄장포’ 또는 ‘엄장이’로 불렸기 때문이다.</p>
<p>구엄마을이 설촌된 건 고려 원종 12년으로 보고 있다. 당시 삼별초가 애월읍 고성리 항파두리에서 최후 항거를 위해 토성을 축조할 때 주민들을 동원하였다는 문헌상의 기록이 있다. 이때를 구엄마을이 설촌된 시기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시기는 미상이나 송 씨가 처음으로 이곳에 들어왔다는 설도 있는데 이는 구엄마을의 할망당에서 모시는 신위가 송씨할망인 것과 연관된 듯하다.</p>
<p>마을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 이장직을 맡고 있는 송승학 씨를 만났다. 포구의 동쪽, 해안도로 가장자리의 연자방아 옆에 천막 두 동이 쳐져 있었다. 한낮임에도 천막 아래에서는 왁자지껄한 윷놀이판이 벌어졌다. 공교롭게도 일 년에 한 번 있는 마을 청년회 야유회에 때를 맞춘 거다. 송승학 씨가 아이스박스에서 꺼내 준 시원한 캔 커피를 마시며 마을의 이모저모를 들었다. 그가 이야기를 하는 사이마다 다른 청년회원들이 주석을 달아주는 통에 마을의 사정이 밀물처럼 머릿속을 채워갔다.</p>
<p> </p>
<p>과거 해조류 풍성, 톳밥·톳물회 유명</p>
<p>과거 구엄마을의 포구에는 각종 해산물이 넘쳐났다. 특히 해조류들이 넘쳐났다. 해서 마을의 대표 음식이 톳밥, 톳물회였다. 참모자반도 넘쳐나서 배 밑이 걸려 지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도 봄이면 해조류를 채취하지만 과거처럼 넘쳐나던 모습은 이제 없다.</p>
<p>송승학 씨에게 마을 이야기를 듣는 중에 가까운 해안에서 바다 쪽으로 인위적으로 쌓아둔 돌담이 보였다. 원담이다. 과거에는 원담에 멸치 떼가 가득 고이기도 했단다. 그럴 때면 멸치 떼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 “멜 들어쪄!”라고 외쳐댔고 그 소식을 들은 주민들은 저마다 바구니를 들고 와 멸치를 잡았다. 마침 원담에서 고기를 잡는 사람이 몇 있어 가만히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데 도움이 됐다.</p>
<p>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오른 송승학 씨는 웃는 낯으로 이야기를 이어갔지만 구엄의 현재에 관한 내용은 다소 쌉싸름했다. 한치철인 요즘은 밤이면 해안도로에 차를 주차할 곳이 없을 정도로 낚시꾼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문제는 일부 낚시꾼들이 술판을 벌이기도 하고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는 거다. 그렇다고 식당들이 장사가 잘 되는 것도 아니고 해서 골머리를 앓고 있단다. 제주도청에서도 바다 청소 인력을 기존의 100여 명에서 200여 명으로 늘린 건 제주의 다른 마을들도 구엄과 별반 사정이 다르지 않다는 뜻일 거다.</p>
<p>마을 어디를 둘러보든 볼 수 있는 게 있다. 구멍 난 돌들이다. 해안가의 검은 몽돌부터 집들의 담장과 밭마다 둘러진 밭담에 이르기까지 돌이 없는 곳이 없다. 이는 구엄마을만의 특징이 아닌 화산섬 제주의 전반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왜일까. 구엄의 현무암들은 보다 애착이 간다.</p>
<p>구엄포구의 돌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연상된다. 구엄포구의 몽돌들은 제주공항을 만들 때 부지를 닦는 데 사용됐다. 그 넓은 공항에 사용됐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양의 몽돌들이 자리를 옮겼겠는가. 구엄포구 몽돌들의 수난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한림항과 애월항의 항만 공사 당시에는 폭약으로 포구의 암반을 폭파하기까지 하며 돌을 공수해갔다. 가까이는 마을의 해안도로 밑에도 구엄포구의 돌들이 매립되어 있다.</p>
<p>사람들이 사용한 건 돌만이 아니다. 구엄포구의 모래도 쓰였다. 제4공화국 당시 마을마다 시멘트가 제공되면서 구엄마을 주민들은 시멘트에 구엄포구의 모래를 섞어 집을 지었다. 그러니까 마을의 오래된 집들에는 포구의 일부가 섞여 있는 셈이다. 본격적으로 마을을 둘러보기 전에 들은 마을의 돌에 관한 이야기는 이후 제주도에 머무는 내내 내 시선을 마을의 돌들로 향하게 했다.</p>
<p>포구의 서쪽으로 500여 미터 가량 뻗은 ‘소금빌레(돌염전)’는 구엄의 돌과 사람이 공생의 형태를 띤 경우다. 구엄의 돌염전은 육지부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든 독창적인 염전이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구엄마을의 40호 이상의 가구에서 돌소금 제조를 업으로 삼아 살았다. 당시 소금빌레의 규모는 1,500평 정도였으며 연간 생산량은 17톤에 이르렀다. 그러나 1950년 즈음하여 서남해안의 값싼 천일염이 도내에 유입되면서 그 명맥이 끊겼다. 1910년 기준으로 구엄의 제염 면적은 887평이었는데 이는 도내 23개 염전 중 11번째 규모이다. 반면 생산량으로는 4위였으니 면적에 비해 생산량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거기다 돌염전에서 생산된 돌소금은 알갱이가 굵고 짠맛이 덜하며 감칠맛이 돌기에 품질 면에서도 우수했다.</p>
<p> </p>
<p>팔순의 조두헌 옹 돌소금 제염 시범</p>
<p>소금빌레에 관한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현재 유일하게 돌소금 제염이 가능한 조두헌(82세) 옹을 만났다. 조두헌 옹은 직접 소금빌레에 나와 돌소금 제염 과정을 일일이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소금빌레에 도착한 그는 먼저 도로 아래 있는 작은 창고에서 제염 작업에 필요한 도구들을 꺼냈다. 돌소금을 만드는 데 필요한 도구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좀팍(폭이 좁고 바닥이 평평한 바가지), 남박(우묵한 원통형 바가지), 수리대 빗자루, 수건, 물통, 차롱, 혹(물혹)1). 여기에 현장에는 없었지만 허벅이 더 있다고 한다. 그가 꺼내든 도구들은 다 플라스틱과 철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는데 원래는 전부 목재로 된 도구였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원래 사용하던 도구들은 4·3사건 당시 그의 집이 불에 타며 소실됐다.</p>
<p>소금빌레 작업의 시작은 호겡이2)(물 아찌3)는 돌)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된다. 구엄마을은 일부 지역에 벼농사가 가능할 정도로 찰흙 지대가 있다. 그 찰흙을 옮겨와 소금빌레 한쪽에 쌓아둔다. 이후 호겡이의 둑을 쌓는데 이 둑을 ‘두렁이’라고 하고 두렁 작업을 ‘두렁 막음’이라고 한다. 두렁 막음은 정교하고 노하우가 필요한 작업이다. 서툰 사람이 하면 물이 샌다. 해서 주로 경력이 많은 할머니나 어머니들이 했다. 두렁 막음이 끝나 두렁이 단단하게 굳고 나야 비로소 제염 작업을 시작할 수 있다. 가장 먼저 호겡이를 깨끗하게 청소해야 한다. 이때 수리대 빗자루와 수건(당시에는 헌옷을 사용했다.)이 사용된다. 청소가 끝난 호갱이에는 허벅이나 양동이를 이용해 바닷물을 옮겨 채운다. 이후로는 그저 시간이 소금을 만들어 주리라 생각할 수 있지만 아니다. 두 시간마다 지치기를 해주어야 한다. 호겡이는 저마다 암반의 형태에 따라 조금씩 굴곡이 있어 높낮이에 차이가 있는데 그러다 보니 곤물4)이 차 있는 곳이 있고 암반의 표면이 드러난 곳이 있다. 해서 두 시간 단위로 고인 물을 말라 암반 바닥이 드러난 곳에 뿌려 주어야 하는데 이 과정을 ‘지치기’라고 한다. 조두헌 씨는 지치기를 시범 보이며 잠시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p>
<p>“어머니가 ‘너 빌레 지치고 와.’라고 하면 이 작업을 하라는 거야.”</p>
<p>지치기를 제때 제대로 하지 않으면 바위에 염분이 눌어붙을 뿐 소금꽃이 피지 않는다. 일단 소금기가 눌어붙으면 곤물을 다시 부어도 염도 비율이 맞지 않아 소금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니 두 시간마다 호겡이를 돌며 지치기를 해주어야 하는데 마지막 호겡이까지 지치기를 끝냈다 싶으면 다시 처음 지치기를 한 호겡이에서 지치기를 할 시간이 된다. 그러니 그 노동의 양은 끝이 없는 것이었다.</p>
<p>조두헌 씨는 지치기를 할 때는 무작정 하는 게 아니라 어머니의 말을 잘 듣고 해야 했다고 한다.</p>
<p>“어머니가 ‘졸락졸락’ 지치라고 하면 가까운 거리로 살살 지치라는 뜻이고 ‘잘락잘락’ 지치라고 하면 멀리까지 양을 많이 해서 지치라는 말이야.”</p>
<p>추측컨대 그날의 날씨에 따라 어머니는 ‘졸락졸락’과 ‘잘락잘락’을 판단했을 거다. 지치기를 하다 보면 찰흙으로 만들어진 두렁에서 흙이 흘러나온다. 그 상태로 두면 소금의 빛깔이 탁하고 맛이 덜하다. 해서 곤물이 탁하다 싶으면 물통에 담아두었다가 분순물이 가라앉으면 깨끗한 곤물만 다시 호겡이에 부어야 한다. 곤물을 통에 퍼 담을 때 사용하는 게 좀팍과 남박이다. 남박은 곤물이 많을 때 한 번에 많이 퍼내기 위한 것이고 좀팍은 얕은 곤물을 효과적으로 퍼내기 위한 것이다.</p>
<p>이런 작업을 계속하면서 3단계의 다음 과정을 진행해야 한다. 일차적으로는 모든 호겡이의 염도가 같지만 두 번째는 이 저농도의 함수(곤물)를 몇 개의 호겡이로 모은다. 그렇게 해서 염분농도를 높여가는 거다. 이런 과정을 3단계에 걸쳐가며 진행해 고농도의 함수를 만든 뒤 계란이 뜰 정도의 농도에 이르면 좀팍과 대빗자루, 수건을 이용해 양동이에 담은 뒤 빌레마다 몇 개씩 있는 임시 보관함, ‘혹’에 옮겨 붓는다. 이때 수건이 사용되는 건 약 20일에 거쳐 완성된 고농도의 귀한 함수를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이렇게 해서 ‘혹’에 보관해 둔 함수는 일조량이 많은 날 꺼내 ‘소금돌’에 붓고 증발시켜 최종적으로 돌소금 결정체를 얻는다. 얼른 보기에는 비슷하게 평평해 보이는 호겡이지만 그 형태와 위치, 평평한 정도, 돌이 달궈지는 온도차에 따라 용도가 분류되는 거다. 그중에도 가장 평평하며 잘 달궈지는 최상의 돌이 ‘소금돌’로 선택된다. 겨울에는 소금돌의 역할을 가마솥이 대신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만든 소금은 ‘삶은 소금’이라고 한다.</p>
<p>이처럼 복잡하고 고된 작업이다 보니 활자화된 자료만으로는 돌소금을 재현하기 어렵다. 실제로 소금빌레 일을 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완성된 소금은 대바구니로 옮겨 각자 집에 보관했다고 한다. 소금빌레는 개인 소유로 가구당 20~30평 정도를 소유했으며 집안 대대로 상속되었다. 소유의 구분이 약식이다 보니 이따금 염전을 구분함에 있어 주인들 간에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p>
<p>돌염전에서 난 소금은 곡물과의 물물교환용으로 썼다. 장전, 소길, 납읍, 용흥리 등 중산간 마을에 가서 팔았는데 올 때 갈 때 무거운 짐을 지는 고된 일이었다. 그러니 소금빌레는 땀과 눈물 서린 삶이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귀한 수단이었다. 돌염전에 녹아 있는 이곳 사람들의 삶을 제주에서 나고 자란 문순자 시인은 「돌염전」이란 시에서 이렇게 그리고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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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결은 끝나지 않는 항거의 몸짓이다 주일날 교회 대신 문득 찾은 친정바다 여태껏 갈매기 몇 마리 저 이랑을 겨누고 있다</p>
<p>내 고향은 큰딸에게 돌염전 대물린다밭 대신 20여 평 유산으로 받아든 어머니 구릿빛 내력, 자리젓보다 더 짜다</p>
<p>돌소금 한 됫박이면 겉보리도 자리돔도 한 되 소금구덕 하나로 산간 마을 돌아오면 등짝에 서늘히 젖은 술주정도 묻어난다</p>
<p>엄쟁이에선 더 이상 천일염 못 만든다4.3으로 6.25로 다 떠나보낸 구엄마을 무얼 더 고백하라고 싸락눈 또 오시는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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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구엄마을에서는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다. 가장 이색적인 체험이라면 돌소금 만들기 체험이다. 맛보기로 한 시간 가량만 할 수도 있지만 여유가 있다면 며칠간 시간을 두고 소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다만 체험 시기는 햇빛이 강한 5~9월이며 비가 잦은 시기에는 소금빌레에서의 체험은 어려울 수 있다. 그럴 경우를 대비해 실내 체험장이 마련되어 있지만 기왕 돌소금 만들기 체험을 하려면 사전에 문의하고 가는 편이 좋겠다. 1인당 체험 비용은 1만 5000원이다.</p>
<p>구엄의 주요 해산 자원인 톳을 이용한 해녀 밥상 체험도 있다. 구엄마을의 선조들은 곡식이 모자라면 톳밥으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톳에는 아연 성분이 들어 노화 방지에 도움이 되고 철분은 우유의 550배나 함유되어 있다. 때문에 제주도 사람들에게 톳은 ‘바다의 불로초’라고 불렸다. 톳을 이용한 구엄마을의 대표 요리는 톳을 넣고 지은 톳밥과 톳물회이다. 톳을 넣은 영양밥을 만들어 본다면 맛과 영양을 동시에 챙길 수 있다.</p>
<p>어린 자녀들을 동반한 여행객이라면 바릇잡이 체험을 권하고 싶다. 바릇잡이란 얕은 바다에서 소라, 보말 등의 해산물을 채취하는 걸 말한다. 구엄마을 어촌계에서는 이러한 체험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올해도 보말잡이 체험을 준비하려고 100kg의 종패를 뿌려두었다. 안타까운 건 인근 초등학생들이 체험하도록 뿌려둔 보말들을 어른들이 싹쓸이해 가고는 한다는 점이다. 구엄의 주민들은 선조들의 유산으로 살아간다. 구엄의 유산에서 뒤에 올 이들에 대한 배려심을 배웠으면 하는 바람을 품는다.</p>
<p>그밖에도 선상 낚시와 배를 타지 않고 할 수 있는 대나무 줄낚시 체험이 있다. 가족 단위 여행객이든, 연인이든, 혹 홀로 떠나온 배낭여행객이든 체험거리가 충분한 구엄마을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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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각주</p>
<p>1) 혹(물혹) 진흙과 돌을 이용해 만든 외관상 우물 형태의 간수통. 이재수의 난 때에 천주교의 신도들이 이 혹에 숨어 구명했다는 사실이 전해진다.</p>
<p>2) 호겡이 진흙으로 둥글게 만들어 해수를 담을 수 있게 만든 증발지.</p>
<p>3) 아찌 (물을) 끼얹어 넣다.</p>
<p>4) 곤물 정제된 물, 염분 20% 안팎의 함수.</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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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제주 애월읍 구엄마을 여행 Ti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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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체험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다면 반드시 사전에 문의를 하길 바란다. 일정한 신청객이 모여야 가능한 프로그램들이 있는 탓이다. 구엄에서 숙박을 하는 이라면 미리 조식에 대해 준비를 하는 편이 좋다. 이른 시간에 문을 여는 식당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갯바위 낚시를 계획한다면 안전에 대해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현무암의 특성상 돌출된 부분들이 많아 부주의할 시 다칠 염려가 있다. 그리고 개인 쓰레기를 회수할 만한 봉지 정도는 꼭 지참했으면 하는 당부를 남기고 싶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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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어부의 밥상</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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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낚시로 잡은 한치에</p>
<p>제주 가시오이 넣고 상큼하게</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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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민수슈퍼식당의 한치회비빔국수</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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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1433226_0.JPG" alt="P34 한치회 비빔국수_1.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1438774_0.JPG" alt="P34 한치회 비빔국수_2.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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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여름철 구엄마을의 수족관을 보면 한치가 없는 곳이 없다. 포구의 어선들은 오후 7시가 되면 출항하여 자정을 즈음하여 귀항한다. 귀항한 배에는 한치가 가득이다. 때문에 한치를 재료로 한 요리가 많다. 가장 기본적인 한치물회를 비롯해 숙회와 먹물째 찐 찜요리도 있다. 하지만 이는 제주도 어느 지역을 가도 접할 수 있는 음식들이다. 여기서는 구엄의 특별한 한치요리를 소개하려고 한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1444805_0.JPG" alt="P34 한치회 비빔국수_3.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부녀회장 출신의 주인장인 고수년 씨가 운영하는 민수슈퍼식당은 얼핏 보면 식당이라기보다는 슈퍼의 느낌이 강하다. 그러나 막상 들어가 보면 메뉴가 제법 다양하다. 그러나 가장 메인 메뉴는 옛날통닭과 한치회비빔국수다. 인근 마을 주민들은 부러 이곳에 들러 안주 삼아 한치회비빔국수를 먹고는 한다.</p>
<p>주재료인 한치는 그물이 아닌 낚시로 잡은 것만 취급하여 급랭해 두었다가 사용한다. 면은 노란색이 예쁜 치차국수. 노란 면발 위로 붉은 양념장으로 버무려진 한치회가 입맛을 돋운다. 부재료로는 제주에서만 나는 가시오이를 비롯해 양파, 적양파, 적양배추, 들깻잎, 배, 돌나물, 그리고 다시마와 멸치 육수로 만든 양념장이 들어간다. 자극적인 양념 맛에 길들여진 이라면 다소 심심하다 느낄 수도 있는 맛이나 재료들 본연의 맛이 잘 살아 있다. 기본 3~4인분에 가격은 3만 원이다.</p>
<p>문의 064-713-1793, 제주시 애월읍 구엄길 7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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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반농반어 구엄마을</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1451029_0.JPG" alt="P35 마을 안 밭담.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 </p>
<p>농사가 실하고, 밭담은 아름답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1457265_0.JPG" alt="P35 하우스 내 오이.JPG 이미지입니다." width="50%" /> </p>
<p>구엄마을은 반농반어 마을이다. 실질적으로는 농가의 비율이 80%가 넘는다. 주로 경작하는 농산물은 오이, 풋마늘, 쪽파 등이다. 특히 오이농사가 주를 이루며 구엄 내 오이 생산량은 도내 소비량의 절반을 차지한다.</p>
<p>문상철(59세) 씨는 1983년도부터 오이 농사를 지었다. 당시만 해도 대나무를 이용해 비닐하우스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때 사용한 대나무는 육지에서 들여온 것이었다. 오이 농사가 시작된 40년 이전의 구엄은 참외와 수박, 담뱃잎 농사가 주를 이뤘었다. 담배건조장용 쇠파이프가 공급되면서 기존의 대나무 비닐하우스에 쇠파이프를 섞기 시작했다. 물론 현재는 대나무로 지은 비닐하우스를 찾아볼 수 없다.</p>
<p>“가시오이라는 품종인데 육지에서는 볼 수 없어요. 전량 도내에서 소비되니까요.”</p>
<p>그의 말대로 가시오이는 제주도에서만 소비된다. 역으로 제주도에서는 취청오이나 다다기 오이를 볼 수 없다. 이런 사례는 돼지고기도 마찬가지란다.</p>
<p>풋마늘은 제주에만 있는 재래종이다. 일반 마늘에 비해 마늘쪽이 자잘한 대신 쪽수가 많고 줄기가 가늘고 연하다. 풋마늘 역시 제주도 내에만 공급되는데 씨알이나 쫑이 아닌 줄기를 먹는다. 씨알은 크기가 작아 상품성이 떨어지기에 대부분 종자용으로 사용하거나 B품으로 판다. 하지만 줄기를 판매하는 게 마늘을 파는 것보다 이윤이 많이 남는다고 한다. 아직 마늘쫑이 올라오기 전인 3월에 수확한 연한 줄기를 이용해 제주사람들은 마늘지를 담근다. 간장과 식초를 이용해 만든 마늘지는 짭쪼름하면서도 새콤한 맛이 난다.</p>
<p>밭이 많은 구엄마을에는 자연스레 밭담도 많다. 제주를 미학적으로 보는 이들은 제주의 아름다움은 점, 선, 면의 조화에서 나온다고 한다. 밭담은 그중 선에 해당한다. 자세히 보면 밭담들은 직선인 형태가 없다. 하나같이 곡선이다. 곡선이어야 보다 견고한 탓이다. 제주의 돌과 사람들의 관계를 보다 보면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가 보인다. 제주의 돌은 농사를 짓는 데 척박한 환경을 상징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돌을 이용해 어린 작물의 줄기를 부러트리는 바람을 막았고 돌소금을 만들었다. 밭담으로 작물을 보호하고 원담에서는 물고기를 얻었다. 해녀들은 불턱에서 차가워진 몸을 녹였으며 돌로 쌓은 옛 등대인 도대불은 캄캄한 어둠 속 귀항하는 어선들의 길잡이를 해주었다. 때문에 구엄마을의 돌들을 따라 걷다 보면 짜고 뜨거운 삶이 보인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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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진설명</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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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구엄마을의 평평한 현무암은 소금빌레로 쓰였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1242730_0.JPG" alt="P28 전통어법 원담.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구엄마을 앞 바다의 원담. 예전의 멸치 떼 들던 시절은 아니지만, 지금도 마을 주민 몇몇이 가끔 재미삼아 문어, 소라를 줍기 위해 원담에 나온다. 백중(음력 7월 보름)이 지나야 그 재미가 쏠쏠하단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1301156_0.JPG" alt="P29 중엄마을의 현무암 감은코지.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제주의 해안은 화산 용암이 바다로 뻗어 생성된 현무암이 장관을 이룬다. 구엄마을과 이웃한 중엄마을의 현무암은 절경을 빚는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1255455_0.JPG" alt="P29 송승학 이장.JPG 이미지입니다." width="30%"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1249227_0.JPG" alt="P29 구엄포구를 나서는 낚싯배.JPG 이미지입니다." width="70%" /></p>
<p>12대째 제주에 사는 송승학 구엄마을 이장.(왼쪽)</p>
<p>구엄포구를 나서는 낚싯배. 구엄마을은 어부보다는 농부가 많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1503018_0.png" alt="구엄마을.pn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구엄마을은 과거에 논농사가 있어 찰흙이 났다. 그 찰흙 두렁이로 소금빌레를 구획 짓고, ①날씨에 따라 소금물을 졸락졸락(작게), 잘락잘락(크게) 지쳐서, ②호겡이에 소금이 피면, ③수리대 빗자루로 쓸어 모아, ④대바구니에 옮겨 집으로 가져간다. < 구엄리사무소 제공></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1308050_0.JPG" alt="P31 제염법을 설명하는 조두헌 옹.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소금빌레에서 제염법을 설명하는 조두헌(82) 옹. 몸이 기억하는 옛 이야기를 알아듣기 쉽게 막힘없이 풀어냈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1314988_0.JPG" alt="P32 구엄마을 벽화.JPG 이미지입니다." width="50%"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1324071_0.JPG" alt="P32 구엄마을 지나는 올레16길.JPG 이미지입니다." width="50%" /></p>
<p>구엄마을 안으로 한 겹 들어서면, 원주민이 운영하는 민박집의 핑크빛 담벼락이 보인다. 제주가 오롯이 그려져 있다.(왼쪽 위) 구엄마을을 지나는 올레 16길.(왼쪽 아래)</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1427471_0.JPG" alt="P33 팽나무 그늘 여행객.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그 길의 야트막한 구릉에 서 있는 팽나무 그늘 아래 여행객들이 쉬고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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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찾아가는 길</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6/20170926101421636_0.jpg" alt="P33 구엄마을-지도.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주소 제주 제주시 애월읍 구엄리 607-5</p>
<p>전화번호 064-713-2239</p>
<p>교통편</p>
<p>- 제주국제공항 → 구엄마을</p>
<ul>
<li>공항 - 37번 시내버스 타고 -하귀마을에서 하차한다음 - 시외버스 갈아타서 - 구엄리마을에서 하차</li>
</ul>
<p>- 제주시외버스터미널 → 구엄마을</p>
<ul>
<li>제주시외버스터미널 - (서회선시외버스 방면) - 하귀 1리 - 구엄리마을에서 하차</li>
</ul>
<p> </p>2017-09-26T01:12:39.000Z2017-09-26T01:21:02.000Z관리*한국어촌여지도 두 번째 여정 ‘새우 반, 사람 반’ 풍성한 어촌 인천 석모도 매음마을<p>한국어촌여지도 두 번째 여정</p>
<p> </p>
<p>‘새우 반, 사람 반’ 풍성한 어촌</p>
<p>인천 석모도 매음마을</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5/20170925162444410_0.JPG" alt="P16-17 인천 강화 만도리어장 새우잡이.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글 이보람 사진 김진수</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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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월 새우젓 축제에는 왁자지껄하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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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여름부터 준비, 9월 중순 본격 새우잡이</p>
<p>처서가 지났다고는 하지만 8월 말 인천 강화 석모도 매음리 어류정항의 낮더위는 아직도 여름이었다. 대여섯 척의 고기잡이배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부잔교에 의지한 채 정박해 있고 서너 명의 낚시꾼들이 부두 끄트머리에 앉아 낚시를 하고 있다. ‘뚝딱뚝딱’ ‘탕탕탕’ 고요한 항구의 적막을 깨는 소리가 들린다. 새우잡이 출항에 앞서 배를 손보고 있는 김영일(61) 씨의 어선이다. 그물을 올리다가 걸릴 수 있으니 네루(레일)를 탄탄하고 부드럽게 손질하는 중이다.</p>
<p>금어기가 끝나고 벌써 엿새째 바다에 나가고 있지만 김 씨의 어선은 오늘도 ‘맹탕’으로 돌아왔다. 본격적인 새우잡이 철이 아님을 알고는 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다에 나가는 것은 고기잡이를 업으로 하는 대부분 어민들의 공통된 마음일 것이다.</p>
<p>“아직은 때가 아니에요. 9월 중순 넘어 말부터나 본격적인 새우잡이가 시작됩니다. 놀면 뭐하겠어요. 선원들 월급을 공으로 줄 수도 없고… 알 수 없으니까 나가는 거예요. 혹여 하는 마음에. 어제 안 잡혔다고 해서 오늘도 안 잡히는 건 아니니까. 오늘은 없었지만 내일은 들겠지 하는 마음. 많이 잡히는 날에는 물때마다 나가지만 오늘처럼 새우가 아예 보이지 않으면 오후에 다시 나가지는 않아요.”</p>
<p>다음날도 새우를 잡을 수 있을지 자신할 순 없지만 그래도 함께 나가고 싶다면 아침 9시 30분까지 항구로 나오라는 약속을 받고 그와 헤어졌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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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0년대 초까지 곳배 이용 전통 어업</p>
<p>국가지정항인 어류정항이 있는 이곳은 인천시 강화군 삼산면 석모도 매음리다. 석모도를 포함한 강화는 전남 목포, 신안과 더불어 국내 3대 젓새우 생산지로 알려져 있다. 젓새우는 새우젓을 담글 때 쓰는 작은 새우로 지역 어민들의 주 소득원이다. 9~12월 잡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지역 어민들은 9월 중순부터 11월 중순까지 두 달간을 새우잡이 최적기로 보고 있다.</p>
<p>강화 지역 어민들의 새우잡이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황해도 피란민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강화도 인근은 임진강과 예성강, 한강이 만나는 곳으로 수심이 깊고 물살이 빠르며 뻘이 발달했기 때문에 만도리어장이나 장봉도어장, 선수어장, 새터어장 등 새우어장이 형성될 수 있었다.</p>
<p>9월 말이 되면 매음리 어류정항은 새우를 잡아 들어오는 어선과 인근 수협 경매장으로 새우를 실어 나를 차량, 직접 새우를 사러 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새우는 생새우로 팔리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배 위에서 바로 소금에 절여 독에 담그는 가을 새우 ‘추(秋)젓’으로 팔려나간다.</p>
<p>새우는 봄에 잡는 것을 오젓, 여름 것은 육젓, 김장용 가을 새우는 추젓이라 한다. 봄 새우 중에는 ‘대뜨기’라고 해서 말린 새우로도 판매가 된다. 가격은 크기가 굵은 육젓이 높지만 맛으로는 추젓을 제일로 친다. 강화 새우가 유명한 것도 이 추젓 때문이다.</p>
<p>매음 1리와 3리 어민들이 주축이 돼 형성된 매음어촌계는 주로 만도리어장을 이용한다. 40어가가 어촌계에 등록돼 있지만 새우잡이를 하는 이들은 22명이다. 나머지는 작은 낚싯배를 이용해 낚시객들을 실어 나르는 정도다. 이 매음어촌계를 이끄는 어촌계장이 어류정항에서 만났던 김영일 씨다.</p>
<p>“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많이 따라다녔지. 아버지 고향이 황해도인데 이북에서 피난 왔다가, 돈벌이가 뭐가 있었겠어요. 다들 새우잡이배를 타고 다녔지. 그때는 곳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며칠씩 들어오지 않고 새우를 잡곤 했어요. 우리 어촌계에 곳배 타봤던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p>
<p>아버지에 이어 2대째 새우잡이를 하고 있는 김 씨는 매음어촌계에 유일하게 남은 ‘곳배’ 새우잡이 세대다. 지금은 6~8t 정도 되는 소형 어선을 이용해 연안자망업을 하고 있지만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대부분 ‘곳배’를 이용해 새우를 잡았다.</p>
<p>김 씨가 얘기한 ‘곳배’는 곳(돌망태)에 돌을 넣어 배 밑에 매달아 배가 떠내려가지 않게 고정시켜두고 썰물이나 밀물에 밀려들어 오는 새우를 어망에 가두는 전통적인 새우잡이배다. 자체 동력이 없어 동력선에 이끌려 바다 한복판으로 가서 닻을 내리고 새우를 잡는다. 혼자 움직이지 못한다고 해서 전라도에서는 ‘멍텅구리배’라고 부른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조사한 ‘강화도 곳배’에는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p>
<p>“강화도 곳배는 원래 돛배로서 ‘시선(柴船)’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운 황해도·경기도 지역의 상선 및 화물선을 모태로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한강의 하류인 강화도를 근거지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 마포까지 오르내리던 배로, 땔나무나 수산물을 운반하였다고 한다. …곳배는 닻 역할을 하는 ‘고’를 이용해 배를 정박시키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며 ‘곳젓’배 라고도 부른다. …”</p>
<p>할아버지 때부터 새우잡이를 해오고 있다는 고관선(55) 씨는 곳배를 타보지는 않았지만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종이에 그림을 그려가며 곳배의 생김새를 설명해 준다.</p>
<p>“참나무로 곳을 만들었어요. 굵은 참나무로 열십자를 만들고 여기에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어 주는데 이게 다 가느다란 나뭇가지로 만들어요. 그리고 돌을 채우는 거죠. ‘고 박는다’고 하죠? 고정적으로 평평하게. 이걸 하나 또는 두 개 설치해 놓고 걸려 들어오는 새우를 잡는 거예요.”</p>
<p>오랜 세월 새우잡이배로 활용됐던 곳배는 1995년 ‘무동력 곳배를 이용한 해선망 어선이 조업 중 인명 피해 사고가 많은 데다 치어까지 잡아들여 어족 자원 고갈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폐선돼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지금은 배를 타고 오후 늦게 인근 바다에 나가 그물을 설치하고 6시간 후 물때에 맞춰 다시 바다에 나가 그물을 거둬들이는 연안자망업으로 변경해 새우잡이를 하고 있다.</p>
<p>새우 질로 따지자면 지금이 더 좋단다. 곳배를 이용한 해선망어업은 하루에 네 물(썰물 두 번, 밀물 두 번)을 모두 이용할 수 있는데, 새우가 한번 들어오면 안에 계속 들어있어 모양이 변형되거나 제때 건져 올리지 못할 때는 간혹 상한 새우가 나오기도 한다. 새우 질이 현재의 연안자망업으로 잡은 게 좋다는 건 물때에 맞춰 그때그때 잡은 걸 바로 판매하니까 싱싱하다는 의미다. 그물이 일자로 되어 있어 밀물 때 걸려 들어와서 그물을 건져 올리지 않으면 썰물 때 다시 빠져나가기 때문에 부지런히 바다에 나가줘야 한다. 먼 바다로 나가지 않고 연안에서 작업을 하는 것도 이 영향 때문이 아닌가 싶다.</p>
<p>아쉽게도 석모도에서는 곳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최근 다녀왔던 목포 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 남아있던 멍텅구리배를 봤던 기억을 꺼내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정부의 방침으로 모든 멍텅구리배(곳배)를 폐선시키고 보존용으로 남긴 배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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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최고 어획, 하루 200리터 30드럼까지</p>
<p>전날 어촌계장과 약속했던, 새우를 잡으러 나가는 시간은 오전 9시 30분이었다. 9시 조금 넘어 어류정항에 도착했더니 이미 막바지 준비를 하고 있다. 김영일 어촌계장과 베트남인 선원 2명이 함께였다. ‘조금’ 물때라 큰 기대를 하지는 않지만 1%의 희망을 안고 배의 시동을 켠다.</p>
<p>어장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출발한 지 10여 분 지나 도착한 곳은 매음어촌계 어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만도리어장이다. 그물 내려둔 곳을 표시한 부표가 여러 개 있다. 넓디넓은 바다지만 각자의 구역이 암암리에 정해져 있으리라 짐작해 본다.</p>
<p>“새우잡이는 감(感)이에요. 오래 다녔던 감에 의지해 찾아나서는 거죠. 요때는 물이 얼마큼 찼으니까 어느 층이 잘 잡히겠구나, 그물을 깊이 주고 낮게 주고, 멀리까지 나갈 때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몇 해리 안에서 작업을 해요.”</p>
<p>목표에 다다를 무렵부터 선원들의 움직임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방수 작업복을 덧입고 한쪽에 쌓여있던 바구니를 가져다 놓고, 무엇보다 표정들이 진지해졌다. 부표를 건져 올리기 시작하자 조타실에서 방향키를 잡던 계장도 합세해 줄을 감는다. 두 선원이 힘을 모아 그물을 잡아 올리자 바닷물 속에 잠겨 있던 그물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지켜보던 취재진이 더 긴장되는 순간이다.</p>
<p>배 위로 올라온 그물이 온전히 바닥을 드러내는데 허망함이 그지없다. 멸치 몇 마리와 새끼 갈치 두 마리가 고작이다. 아쉬워할 틈도 없이 두 번째 그물이 올라온다. 역시나 마찬가지로 새우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커다란 해파리 하나가 툭 떨어져 나온다. 세 번째 그물, 네 번째… 여섯 개의 그물이 모두 올라왔다가 다시 바닷물로 내려갈 때까지 그물이 지나가는 소리만 들려오고 모두의 표정은 담담했다. 이날 수확한 건 두 마리의 해파리와 꽃게 두 마리가 전부였다. 작업할 게 따로 없으니 30분이 채 안 돼 마무리 된다. 선원 한 명이 배에 실어왔던 물 호스를 이용해 갑판 위 바닷물 흔적을 말끔히 씻어내고 다른 한 명은 해파리를 손질해 버릴 건 버리고 쓸 만한 부위는 바구니에 넣어 준다. 계장은 다시 배를 돌려 뭍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오늘 작업은 이것으로 끝이다. 내일은 부디 배 가득 새우를 싣고 올 수 있기를 희망하며 배 키를 잡는다.</p>
<p>사실, 새우를 잡으러 나가기에는 많이 이른 시기이긴 했다. 추석 무렵이 새우잡이로는 최적기고 9월 중순부터 11월 중순까지 2개월을 본격적인 작업 시기로 본다. 어선들은 봄에는 꽃게와 병어, 밴댕이, 새우를 잡고 가을에는 새우를 주 소득원으로 잡는다. 가을에도 꽃게가 잡히긴 하지만 봄 꽃게와는 차이가 많다.</p>
<p>어류정항에는 회센터가 들어서 있다. 어촌계장이 운영하는 ‘창성호’를 비롯해 10곳이 넘는 횟집이 모여 회센터를 이룬다. 어선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 배 이름을 딴 횟집들을 차려놓고 회를 팔거나 새우를 판매하기도 한다. 대량으로 잡는 새우는 배에서 바로 소금에 절여 경매로 나간다. 강화에서 석모도로 들어가기 전 외포항 젓갈 수산시장을 만날 수 있는데 석모도에서 잡는 대부분의 새우가 이곳 경인 북부수협 위판장에서 경매된다. 타 지역 도매인들이 강화도 새우젓을 구매하기 위해 몰려오기도 한다. 외포항 젓갈시장에서는 매년 ‘새우젓 축제’가 열린다. 올해 14회 축제는 10월 13일부터 15일까지 사흘간이다.</p>
<p>어촌계의 연간 수익을 알고 싶었으나 헛일이었다. 석모도에는 매음어촌계와 사하동 어촌계 2개의 어촌계가 있지만 어느 마을이 어느 어촌계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이쪽 어촌계에 있다가 거주지를 옮긴 후에도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매음 어촌계의 경우는 매음 1리와 3리 어민들이 주를 이루고 다른 마을 어민들도 더러 섞여 있다. 매음어촌계에 40어가가 등록돼 있지만 어업 활동이 양식이 아니다 보니 그때그때 다르고 어선마다 다르다. 수협에 바로 위찰하는 경우도 있지만 개별로 판매하는 경우도 있어 결산이 되지 않는다. 본인이 얘기를 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는 얘기다.</p>
<p>“최고로 많이 잡힐 때는 하루에 200ℓ짜리 30드럼도 더 잡을 때가 있어요. 배에 싣고 간 소금이 모자랄 정도가 되면 항구로 들어왔다가 퍼내고 다시 나가는 거지요. 바로 차에 실어서 경매장에 풀어놓고 또 얼른 들어와서 가져가고… 그렇게 많이 잡히는 거는 한 달 정도로 보면 될 겁니다. 벌어들이는 수입도 수치로 따지기는 힘들어요. 해마다 다르니까. 드럼 당 200만 원이 넘어갈 때도 있고 100만 원에 못 미칠 때도 있고 그래요. 작년엔 인근 어촌계에 어업이 제한된 안강망어업을 한시적으로 허용하는 바람에 물건이 덤핑으로 나와 가격이 크게 떨어지기도 했어요.”</p>
<p>바닷가에서 만난 어느 어부의 이야기만으로 새우잡이 수입을 미루어 짐작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을 듯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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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석모대교 개통으로 관광객 10배 급증</p>
<p>매음리는 석모도 초입에서도 10여 분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마을이다. 새우잡이배들이 드나드는 항구 마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건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는 민머루해수욕장 덕분이다.</p>
<p>휴가 시즌이 끝난 평일인데도 해수욕장을 찾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해수욕을 즐기러 왔다기보다는 갯벌 체험을 하러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도 아니면 바다를 구경하러 나온 수도권 나들이객 정도겠다. 갯벌에서는 모시조개와 퉁구미(동죽조개), 칠게 등을 잡아볼 수 있다.</p>
<p>수도권에 인접한 섬마을이라서인지 편의 시설은 많다. 해수욕장 바로 앞에 편의점이 두 곳이나 있고 차로 3~4분 거리에도 편의점이 있다. 24시간이라지만 아침 7시에 문을 열고 밤 12시면 문을 닫는다. 해수욕장을 끼고 있는 매음 3리가 가장 번화가인 듯 보인다. 해변을 둘러 곳곳이 펜션이고 횟집들이다.</p>
<p>석모도 매음리에는 최근 들어 관광객이 크게 늘었다. 석모대교가 개통된 덕이다. 석모도는 지난 6월까지 외포리 선착장에서 여객선을 타야 갈 수 있는 섬이었다. 10분 정도 거리의 배 위에서 먹이를 찾아 몰려오는 갈매기 떼에 과자 하나씩 건네주던 추억은 석모도를 찾았던 이들에게는 하나씩 갖고 있는 추억이었을 것이다.</p>
<p>6월말 1.5㎞ 길이의 왕복 2차로 석모대교가 개통되면서 추억의 갈매기를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민머루해수욕장에서 반가운 갈매기를 만날 수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 즈음 아이들과 함께 해수욕장을 찾은 가족 관광객에게 갈매기가 찾아와 주었다.</p>
<p>“석모대교가 생기면서 관광객이 많이 늘었어요. 10배 늘었다고 보시면 돼요. 대부분 수도권에서 오시는 분들이 많지요. 1시간 거리로 가까우니까요. 관광객이 많아진 만큼 그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 양도 늘어 마을에서는 고민이 큽니다.”</p>
<p>해수욕장 앞에서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는 김상열(59) 매음 3리 이장의 고민이 남일 같지 않다. 해수욕장에서 어류정항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대형 공사장이 눈에 보인다. 골프장을 조성중이란다. 간척지였던 이곳은 과거 삼량염전이 있었던 곳이다. 한참 때, 새우가 대량으로 잡혔을 때 염전도 활성화 됐었다. 현재의 천일염 브랜드가 된 신안 지역보다 소금이 좋았었다고 자신한다.</p>
<p>“이곳에서 나는 소금으로 젓새우를 담그고 김장도 하고 그랬지요. 전라도 지방은 염도가 세서 쓴맛이 나지만 여기는 한강과 임진강이 가까워서 물이 달짝지근해 소금도 조금 달았더랬지요. 중국 소금이 들어오고 하면서 여러 이유로 정부에서 염전을 폐쇄시켜 지금은 소금이 나지 않아요.”</p>
<p>해수욕장 너머의 장구너머항에는 새우잡이배보다 작은 소형 어선들이 주로 정박한다. 낚시객들을 태우거나 인근에서 식당을 하는 어민들의 배가 대부분이다. 이곳에도 횟집과 펜션 민박이 여럿 자리하고 있다.</p>
<p>대교가 생기고 골프장이 들어서고 스파 시설과 휴양림을 지으려는 움직임이 보이면서 관광지로 발전된다는 점에서는 환영받을 일이지만 과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어촌 마을의 추억이 사라져 간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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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인천 석모도 매음마을 여행 Ti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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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석모대교가 개통된 탓에 매음리를 방문하는 데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 밤늦게까지 문을 여는 편의점이 있고 숙박 시설과 음식점도 많아 준비 없이 갑자기 떠나는 목적지로도 추천할 만한 곳이다. 다만 주말에는 관광객이 많기 때문에 숙박을 원할 경우 미리 예약을 하고 가는 게 좋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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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어부의 밥상</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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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작고 속은 좁아도</p>
<p>달고 고소한 맛은 꽉 찼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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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별천지 음식점의 밴댕이 회무침</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5/20170925162614027_0.JPG" alt="P24 밴댕이 회무침 1.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5/20170925162619505_0.JPG" alt="P24 밴댕이 회무침 2.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 </p>
<p>강화에 가면 꼭 먹어보고 와야 하는 음식이 하나 있다. 밴댕이다. 등은 푸르고 배쪽은 하얀 생선인 밴댕이는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에서 흘러내려온 약성황토의 퇴적물을 머고 자라 맛과 영양이 뛰어나다. 과거 임금님 수라상에 오르기도 했다는 강화 특산물로 ‘80대 노인이 밴댕이를 자주 먹으면 주책 부린다.’ ‘밴댕이 포식하고 외박하지 말라.’는 속어가 생길 정도로 최고의 스태미나 식품으로 꼽힌다. 밴댕이의 제철은 5~6월이다. 7월 중순까지도 잡히는데 이 때 잡아서 급랭한 다음 1년 먹거리를 저장한다. 제철에 찾으면 싱싱한 밴댕이회를 먹을 수 있다.</p>
<p>맛있는 밴댕이 회무침을 먹기 위해 석모도 맛집으로 알려진 ‘별천지’ 음식점을 찾았다. 민머루해수욕장에서 장구너머항으로 넘어가는 언덕 위에 자리한 별천지에서는 맛있는 저녁식사와 함께 서해의 일몰도, 민머루해수욕장의 전경도 한눈에 즐길 수 있다.</p>
<p>‘밴댕이 정식’을 주문하니 전라도 한정식 못지않게 많은 밑반찬과 회무침, 된장국이 함께 나온다. 2인분 치고 양도 상당하다. 가시만 발라낸 것 같은데 생선살이 몹시도 부드럽다. 갖가지 야채와 함께 새콤달콤하게 무쳐낸 회무침이 입맛에 딱 들어맞는다. 안주인이 직접 담갔다는 매실엑기스를 넣어서인지 대체적으로 음식이 달달했지만 맨입에 먹어도 좋을 만큼 입에 잘 맞아 젓가락이 멈추질 않는다.</p>
<p>‘밴댕이 소갈딱지’라는 말이 있다. 속이 좁은 사람을 두고 밴댕이라고 하는데 밴댕이보다 속이 더 좁은 사람을 ‘밴댕이 소갈딱지만도 못하다’고 비하한다. 이같이 맛있는 생선을 두고 속 좁은 사람에 빗대어 이야기하는 걸 안다면 밴댕이가 얼마나 억울해 할까 싶다.</p>
<p>“밴댕이라는 생선이 바다에서 나오면 오래 살지를 못해요. ‘팔딱’ 하고 죽어버려요. 그 만큼 성질이 급한 생선인데, 그래서 너그럽지 못하고 쉽게 토라진다고 해서 그런 말들을 쓰나 봐요. 밴댕이는 잡아오자마자 깨끗이 씻어서 비늘을 벗기고 가시를 발라 살만 오려낸 다음 급랭을 시킵니다. 그래서 사계절 맛볼 수 있어요. 회나 회무침 외에 구워도 먹고 젓갈로 담가 먹을 수도 있어요.”</p>
<p>별천지에서는 밴댕이 회무침 외에도 각종 활어회, 꽃게탕, 병어조림도 맛볼 수 있다. 민박을 겸하고 있어 아침 식사도 가능하다.</p>
<p>문의 032-932-9936,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1048-1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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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강화군이 개발한</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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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5/20170925163748824_0.png" alt="석모 미네랄 온천1.pn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석모 미네랄 온천</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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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서해 바다 바라보며 즐기는 노천탕</p>
<p>고온의 미네랄 온천수에 몸과 마음 힐링</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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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매음리에는 민머루해수욕장과 보문사라는 유명 사찰이 있지만 최근 관광객들에게 각광받는 곳이 있으니 올 1월에 개장한 ‘석모 미네랄 온천’이다. 강화군이 조성한 강화 유일의 대중온천이자 온천수 노천탕으로, 특히 서해바다를 바라보며 지평선으로 넘어가는 석양을 감상하며 온천을 즐길 수 있어 인기가 높다.</p>
<p>온천수는 460m 화강암 등에서 용출되는 51℃ 고온의 미네랄 온천수를 인위적인 정화 없이 식혀서 원수로 사용한다. 칼슘과 칼륨, 마그네슘, 염화나트륨 등이 풍부하게 함유돼 있다. 온천수의 각종 미네랄 성분은 아토피 피부염이나 건성 등 피부 개선에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피부에 쉽게 흡수되어 미용이나 보습, 혈액 순환을 돕는다. 관절염과 근육통 등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몸과 마음의 안정을 취하기 좋다. 물맛은 짜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5/20170925163755262_0.png" alt="석모 미네랄 온천2.pn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온천은 실내탕과 노천탕(15개), 황토방, 옥상 전망대, 족욕탕 등으로 구성돼 있다. 족욕탕은 관광객들을 위해 무료로 개방하고 있으며 비누나 샴푸 등의 사용은 제한한다. 미네랄 온천을 제대로 즐기기 위한 팁도 있다. 첫 입욕은 38~39℃의 탕에서 시작한다. 입욕 전 머리부터 발끝까지 충분히 물이 젖도록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하면 온천욕의 효과가 배가된다. 이마에 살짝 땀이 날 정도가 적당한 온도다. 온천욕 후에는 담수로 씻어내지 말고 수건으로 가볍게 닦아 내는 정도가 좋으며 휴식 후 재 입욕을 반복한다.</p>
<p>석모대교 개통으로 이용객이 늘면서 대기 시간이 길어졌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남녀 각각 100개씩의 옷장이 준비돼 있어 추가 인원이 올 경우 대기를 해야 한다. 입구에 있는 무료 족욕 체험을 하면서 차분히 기다려보거나 인근에서 1박을 할 경우 다음날 일찍 찾아가기를 권한다. 노천탕 이용 시 레시가드나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준비하지 못했을 경우 옷을 대여해야 한다. 면티나 면바지 차림은 들어갈 수 없다. 온천 이용시간은 오전 7시부터 오후 9시까지. 매월 첫째·셋째 화요일은 휴무다.</p>
<p>온천 이용료는 성인 9000원, 어린이(4~7세) 6000원이며 20명 이상 단체는 8000원에 이용이 가능하다. 65세 이상 노인이나 유공자, 장애인, 다자녀가구, 삼산면 주민들은 어린이 요금으로 이용할 수 있다. 결제는 신용카드나 체크카드, 문화누리카드로만 가능하고 현금은 받지 않는다.</p>
<p>문의 032-933-3810, 강화군 삼산면 삼산남로 865-1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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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진설명</p>
<p>석모 미네랄 온천. <강화군 제공></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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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진설명</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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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인천 강화 만도리어장에서 새우잡이를 하고 있는 김영일씨와 선원들. 새우잡이를 나서기에는 이른 시기라 엿새째 빈 그물을 올려야 했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5/20170925162452386_0.JPG" alt="P18-19 석모도 어류정항의 낚시객들.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석모도 어류정항의 낚시객들. 비교적 조용한 어류정항은 바다낚시와 캠핑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다.</p>
<p> </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5/20170925162500996_0.JPG" alt="P19 멍텅구리배.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5/20170925162509026_0.JPG" alt="P19 연안자망업으로 새우잡이.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강화와 목포, 신안 등 서해바다에서 새우잡이에 사용됐던 곳배(멍텅구리배). 1995년 정부 정책으로 폐선된 후 목포 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 보존용으로 남아 있다.(위)</p>
<p>지금은 물때에 맞춰 그물을 거둬들이는 연안자망업으로 새우잡이를 하고 있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5/20170925162540151_0.JPG" alt="P20 김영일 매음어촌계장.JPG 이미지입니다." width="30%" /></p>
<p>김영일 매음어촌계장.(위)</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5/20170925162519702_0.JPG" alt="P20 강화 추젓.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5/20170925162548703_0.JPG" alt="P20 외포항 젓갈시장 조기.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전국에서 가장 인기가 좋다는 강화 추젓. 석모도에서 잡는 대부분의 젓새우는 경기 북부수협 위판장에서 경매된다.(가운데)</p>
<p>외포항 젓갈시장 외부에 널려진 조기. 목포에서 잡아온 것들이란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5/20170925162555778_0.JPG" alt="P21 민머루해수욕장.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매음3리에 있는 민머루해수욕장은 석모도에 있는 유일한 해수욕장이다. 석모대교 개통 이후 평일에도 찾는 관광객들이 크게 늘었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5/20170925162602586_0.JPG" alt="P22 민머루해수욕장을 찾은 관광객들.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석모도 민머루해수욕장을 찾은 관광객들이 갈매기 떼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p>
<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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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p>
<p>찾아가는 길</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5/20170925162608182_0.jpg" alt="P23 매음마을-지도.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주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어류정길 176</p>
<p>전화번호 032-932-8988</p>
<p>교통편</p>
<p>- 승용차</p>
<ul>
<li>서울-올림픽대로-김포한강로-김포대로-중앙로-석모대교-매음리</li>
<li>부산-중앙고속도로(부산-대구)-경부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li>
<li>광주-호남고속도로-논산천안고속도로-43번국도-평택시흥고속도로</li>
</ul>
<p> </p>2017-09-25T07:26:40.000Z2017-09-25T07:44:19.000Z관리*한국어촌여지도 두 번째 여정 고소한 가을, 전어 황금 어장 경남 사천 대포마을<p>한국어촌여지도 두 번째 여정</p>
<p> </p>
<p>고소한 가을, 전어 황금 어장</p>
<p>경남 사천 대포마을</p>
<p> </p>
<p>글 송기동 사진 김진수</p>
<p> </p>
<p>“용왕님이 주는 대로 먹어야지, 욕심 안 부려”</p>
<p> </p>
<p> </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5/20170925161557982_0.JPG" alt="P06-07 경남 사천 사천만.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p>
<p> </p>
<p>미식가들 발길 이어지는 ‘전어 마을’</p>
<p>“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간 며느리 돌아온다.”</p>
<p>“가을 전어 머리에는 깨가 서 말.”</p>
<p>얼마나 맛있으면 이런 속담이 생겨났을까? 경남 사천시 대포동은 7월 중순부터 늦가을까지 전어를 즐기려는 미식가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마을이다. 마을 어부들이 마을 앞바다에서 갓 잡아온 싱싱한 자연산 전어를 이곳에서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천 대포마을의 본격적인 여름은 전어로 시작되고, 가을 역시 전어와 함께 깊어간다.</p>
<p>“최고의 ‘골든타임’이 지금입니다. 날 밝아질 때와 어두워질 때…”</p>
<p>동녘 하늘이 시나브로 불그스레 물드는 오전 5시께, ‘남양호’ 정강주(64) 선장(대포마을 어촌계장)이 4번째 그물을 내리기 시작했다. 키를 잡은 정 선장이 배를 왼쪽으로 크게 선회시키는 동안 부인 임영애(61) 씨가 붉은 점멸등이 달린 부표를 먼저 바다에 내렸다. 5분여 만에 뱃전에 실려 있던 250m 길이의 그물이 검붉은 아침 바다로 스르르 풀려나갔다. 잠시 후, 부표를 회수하고 오른쪽 뱃전에 설치된 기계를 가동해 그물을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 은빛 반짝이는 전어가 한 마리, 두 마리 잇따라 그물코에 걸려 올라왔다.</p>
<p>“(전어가) 빛이 나죠.”</p>
<p>부인 임 씨가 능숙한 솜씨로 그물에서 전어를 한 마리씩 따서 선창에 훌쩍 던져 넣었다.</p>
<p>정 선장 부부의 2.68톤 배에 동승해 대포항을 빠져 나온 시간은 새벽 2시 25분. 행여나 약속 시간에 늦어 배를 놓칠까봐 잠을 설쳤다. 포구에 도착했을 때 바람이 잠잠해도 갯내음이 물씬 풍겨왔다. 컴컴한 바다를 헤치고 나가는 동안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들이 초롱초롱했다.</p>
<p>항을 출발한 지 15분 후 사천만 한가운데에서 첫 그물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물 작업을 마친 후 배 중앙에 있는 선창을 열고 산소를 주입, 전어를 맞을 준비를 마쳤다. 전어를 ‘파닥파닥’ 싱싱하게 살아있는 상태로 마을 식당에 넘기는 것이 관건이다. 그물을 수거하기 시작해 그물에 걸린 전어를 떼어 내고 그물추까지 거두기까지는 20여 분이 걸렸다.</p>
<p>“전자 해도에는 ‘진주만’이라고 나와 있는데 우리는 ‘사천강’이라고 부릅니다. 전어가 지금 맛 들었어요. 솔직히 말해서 특히 사천강 전어가 맛있습니다. (손님들이) ‘오리지널’ 전어 달라고 그래요.”</p>
<p>사천만은 남강댐에서 방류된 민물과 남해 바닷물이 섞이는 해역이다. 정 선장 부부가 본격적으로 전어잡이에 나서는 때는 금어기가 풀리는 7월 16일부터이다. 10월 말 또는 11월 말까지 하루 2~3차례, 새벽과 늦은 오후에 바다로 나가 전어를 잡는다. 날이 새면 고기가 없고, 더욱이 한낮은 햇볕이 수면에 반사돼 엄청 덥기 때문에 피한다. 한 번 나오면 보통 3~4회 정도 그물을 내린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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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매년 7월 말 자연산 전어축제</p>
<p>사천 지역에서는 어린 전어를 뼈째 썰어 먹을 수 있는 7~8월 여름 전어를 선호한다. 이에 발맞춰 사천시는 타 지역보다 이르게 매년 7월 말에 ‘삼천포항 자연산 전어축제’를 개최해오고 있다. 기름기가 오르고 뼈가 세지는 가을 전어는 포를 떠서 먹거나 구이에 적합하다고 한다.</p>
<p>그물을 내리는 포인트는 매일매일 다르다. 정 선장은 어군 탐지기에 의존하지 않고 그날의 ‘감’을 따른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어황이 좋은 편이다.</p>
<p>“(어군 탐지기) 전파를 쏘면 물고기들이 도망가 버립니다. 전어들이 물위로 뛰어오르는 걸 육안으로 보거나, 물 때리는 소리를 듣고 판단합니다.”</p>
<p>3시 20분에 내렸던 두 번째 그물을 15분 후 걷어 올리자 예기치 않게 전어 외에 ‘오도리’(보리새우)와 ‘뻘떡게’, ‘백조기’도 가끔씩 딸려 나왔다. 어부의 호의로 싱싱한 날것 상태의, 씹을수록 고소하면서 단맛이 도는 ‘오도리’를 맛볼 수 있었다.</p>
<p>정 선장은 젊은 시절 부산으로 나가 10년 정도 목수로 일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30여 년째 전어를 잡고 있다. 오랫동안 작업을 해오다 보니 말을 하지 않아도 손발이 척척 맞는다. 정 선장은 포인트를 잡아 배 속도를 조절하며 방향을 잡고, 부인은 제때 그물을 내리고 걷었다.</p>
<p>정 선장 부부는 전어잡이로 유명한 마도와 인연이 깊다. 정 선장에게는 진외가(아버지 외갓집), 부인 임 씨는 고향이다. 마도를 화제로 삼자 임 씨의 얼굴이 밝아졌다.</p>
<p>“식당에서는 회, 무침, 구이 간단히 세 가지 밖에 안 해먹지만 (마도에서는) 전어 갖고 먹는 방법이 여러 가지라예. 옛날에는 이리 (전어) 배를 따 갖고 요리 양념 발라 쪄 먹는 것도 있고요. 매운탕도 있고, 전어 배에서 구워 갖고 오는 거 시럭 국에 넣어서 끓여 먹고, 배만 갈라 갖고 포 떠 먹고, 지짐도 부쳐 먹고 여러 종류라예. 가을에 잡으면 짚에 엮어 갖고 달아매 놓았다 무하고 지져 먹고… 여기는 모릅니다.”</p>
<p>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친손녀, 외손녀 할 것 없이 모두 생선을 좋아한단다. 세 차례 그물을 내리고 걷어 올리고 나자 어느새 까맣던 동녘 하늘이 희끄무레 밝아오기 시작했다. 산 위로 밝게 빛나는 샛별이 눈에 들어왔다. 5시 30분에 네 번째 그물을 완전히 걷어 올리고 귀항을 서둘렀다. 항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6시. 부두에 배를 댄 후 선창에 넣었던 전어를 꺼내 무게를 단 후 식당에 넘기면 하루 일과가 마무리된다. 이날 3시간 35분 동안 4차례 그물 작업 끝에 잡은 전어 양은 기대보다 적은 25㎏가량. 정 선장의 말 한 마디가 귀에 쏙 들어왔다.</p>
<p>“30~50㎏ 사이가 참 좋아. 용왕님이 주는 대로 먹어야지. 욕심 안 부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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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마도 갈방아소리 전승되는 ‘황금 바다’</p>
<p>예나 지금이나 사천만(사천강)은 전어잡이 ‘황금 어장’이다. 또한 1592년 5월 29일,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 함대가 첫 출전한 거북선을 앞세워 왜선을 격파한 ‘사천해전’의 역사적인 바다이기도 하다. 현재 대포마을 전어잡이 배는 9척. 고령화에 따라 13척에서 4척이 줄어들었다. 어촌계 회원은 92명이다. 9척의 배가 그날 갓 잡은 싱싱한 전어를 마을 9곳의 전어 식당에 공급하고 있다.</p>
<p>왜 사천만(사천강)에서 잡은 전어가 유독 맛있다고 하는 걸까? 10대부터 전어 배를 탔다는 주민 석종표(64) 씨는 이렇게 말했다.</p>
<p>“‘황토 지장수’를 먹고 자란 전어이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서 전어가 맛있습니다. 황토라는 말은 진주 남강에서 물을 방류하니까 거기서 황토가 흘러나오는데, 그 민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데서 전어가 서식하니까 여기 전어가 유명합니다. (전어) 수요를 못 당해 다른 지역산 가져오면 (대포 전어) 먹어 본 미식가들은 딱 알아예.”</p>
<p>손암 정약전(1758~1816) 선생은 흑산도 유배 생활을 하며 집필한 해양 생물 백과사전 <자산어보>(玆山魚譜)에서 은백색의 전어가 ‘화살처럼 생겼다’고 해서 ‘화살 전(箭)’자를 사용해 전어(箭魚)라고 기록했다.</p>
<p>“큰 놈은 한 자 정도로, 몸이 높고 좁으며 검푸르다. 기름이 많고 달콤하다. 흑산에도 가끔 나타나나 그 맛이 육지 가까운 데 것만은 못하다.”(정문기 옮김 <자산어보-흑산도의 물고기들>)</p>
<p>비슷한 시대를 산 풍석 서유구(1764~ 1845) 선생은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에서 ‘돈 전(錢)’자를 사용하는 전어 유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p>
<p>“…상인이 염장하여 서울에서 파는데 귀천이 모두 좋아한다고 하였다. 또 그 맛이 좋아 사는 사람이 돈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전어(錢魚)라고 한다.”</p>
<p>전어는 아가미 뒤 상단에 검은 점이 있어 ‘점박이’라고 불린다. 특히나 전어는 작은 크기에도 쓰임새가 많은 생선이다. 머리뿐만 아니라 내장까지 먹을 정도로 버릴 데가 없다. 더구나 전어 내장 중에서도 위로 담은 ‘전어밤젓’ 또는 ‘돔배젓’은 “마도에 사돈이 있어야 구할 수 있다.”고 말하던 귀한 젓갈이었다.</p>
<p>전어를 잡는 어로 방법도 바뀌었다. 과거 돛단배에 노를 젓던 시절에는 배 두 척(본선, 지선)이 짝을 이뤄 지선이 그물을 끌고 전어 떼를 원형으로 둘러싸 잡았다. 그물에 걸린 전어들은 가래질을 해서 떠 담았다. 전어잡이의 시초는 전어 떼를 발견하면 갑자기 뱃전을 두드려서 전어를 놀라게 하여 잡는 ‘뚜드름’ 방식이었다고 한다.</p>
<p>특히 전어잡이로 유명한 마도에서는 면사(綿絲) 그물이 썩지 않도록 갈(소나무 껍질)을 돌절구에 넣고 장정 4~6명이 돌아가며 3~4시간씩 방아질을 해 가루로 만든 후 이를 펄펄 끓여 그물을 염색해야 했다. 이때 작업을 하며 부르던 노동요가 현재 전승되고 있는 ‘마도 갈방아소리’이다.</p>
<p>요즘 전어잡이는 엔진을 장착한 선박과 나일론사 그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과거에 비해 손쉽다. 대부분 부부가 소형 배를 타고 조상들이 대를 이어 전어를 잡던 마을 앞바다에서 전어를 여전히 잡고 있다. 하지만 요즘 대포동 전어잡이 어부들은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정강주 어촌계장이 속 고민을 털어놓았다. 10톤이 넘는 근해 어업 배들이 야간에 사천만 안까지 들어와 조업을 하고 있는데도 관련 기관 단속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호소다.</p>
<p>“연안에 사는 영세 어업인들 좀 보호를 해 주십사하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근해 허가를 가지고 연안에 들어와 작업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요. 연안 배 가지고 해야 됩니다. 그것은 법상 ‘쌍끌이’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쌍끌이를 해도 그 배는 잡지를, 절대 규제를 못하고 있거든요. 작년에 (우리 배가) 그물에서 고기를 빼내려 하는데, 그 사람들 배가 우리 그물 위로 지나가요. 실제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니까요. 십몇 톤 되는 것들이 훅 지나가면 우리 작은 배들은 ‘바가지 놀 듯이’ 합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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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해상 황토 바다펜션에서 특별한 추억</p>
<p><사천시지>에 따르면 “대포동은 본래 진주군 남양면 지역이었다. 1906년(광무10년)에 고성군에 속했다가 1912년 사천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양면 심포·대례·노례동의 각 일부를 통합해 대포리가 되었다. 1956년 7월 8일 남양면이 삼천포시로 편입되면서 대포동으로 개칭되었고, 1969년 대포동과 노룡동을 합하여 노대동이 되었고, 1995년 5월 1일 노대동과 백신동이 합하여지면서 남양 2동에 속했다가 1998년 행정동 통·폐합에 남양동에 속하게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p>
<p>일제강점기인 소화 14년(1939년) 10월 1일 발간된 ‘지역행정구역명칭 일람’을 들춰보면 남양면에 대포리와 백천리, 노룡리, 신벽리, 송포리, 죽림리, 좌룡리 등 7개 마을이 속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p>
<p>전어 음식점이 몰려 있는 곳은 대례(大禮)마을이다. 마을 앞바다에 있는 ‘한여’(큰 여)에서 유래했다. 들물 때는 모습을 감추었다가 썰물 때는 모습을 드러낸다. 또 심포는 ‘지픈개’로 지면이 다른 마을보다 얕아서 물이 많이 몰려든 데서 붙여진 지명이다.</p>
<p>대포동에는 100가구 2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이 가운데 92명이 65세 이상이다. 최고령은 101세 할머니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이렇게 건강한 사람 있는 곳이 없다.”면서 ‘장수 마을’이라고 자부한다. 논농사 외에 밭농사(마늘, 콩, 깨)와 키위를 재배한다. 마을 앞 해변을 삼삼오오 모여 청소하던 어르신들은 전어와 얽힌 옛 이야기를 들려줬다.</p>
<p>“옛날에는 전어 잡아오면 발대에 널어 가지고 말려 놓았다가 웃동네에 팔러 가는 거라. 덕곡마을까지 1시간 거리를 (전어를) 이고 가서 보리쌀 바꿔 오고, 진고동 깨 먹고 살았다 아니가.”</p>
<p>특히 대포마을은 지난 2007년 어촌체험마을로 지정됐다. 체험 프로그램으로는 ▲바다위 낚시(1~12월) ▲쏙잡이 체험(3~11월) ▲바지락 캐기(1~4월, 12월) ▲석화 따기 체험(3~4월) 등을 운영한다. 대포마을의 자랑은 해상 황토 바다펜션(6동)이다. 마을 앞바다에 떠 있는 23~30㎡ 정도 규모 돔하우스 형식의 펜션으로, 숙박하면서 바다낚시와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내부는 전기 난방이 되고 편의 시설로는 TV와 냉장고, 가스레인지, 싱크대, 화장실까지 갖추고 있다. 성수기(7~9월)와 비수기(10~6월), 주말과 평일 예약은 홈페이지(www.seapensun.net/html/main.php)에서 가능하다.</p>
<p>이와 함께 가로 30m, 세로 10m 규모의 ‘바다펜션 낚시터’(입장료 1인당 1만5000원)도 일출 때부터 일몰 때까지 운영하고 있다.</p>
<p>지인 소개로 경남 함안에서 네 번째 왔다는 한 40대 낚시꾼은 “고속도로와 가깝고, 편하고, 좋은 낚싯대 없어도 참숭어·감성돔이 심심찮게 잡혀 헛방은 안 하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전어 마을의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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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경남 사천 대포마을 여행 Ti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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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대포항에서 삼천포항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호젓하면서도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한다. 점점이 떠있는 섬들과 죽방렴, 해넘이를 볼 수 있다. 특히 삼천포항 인근 ‘실안낙조’는 전국 9대 일몰지로 손꼽힌다. 정유재란 당시 왜군과 최후의 결전을 벌이다 희생된 조명연합군 군사들의 넋이 잠든 ‘조명군총’과 지난 2002년 개관한 ‘항공우주 박물관’도 사천 여행길에서 빠뜨리지 말아야 할 곳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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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어부의 밥상</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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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천만 새벽 바다에서 펄떡이던 전어</p>
<p>점심땐 미식가들의 입 속으로</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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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대포 용이횟집의 전어 회, 무침, 구이</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5/20170925161733761_0.JPG" alt="P13 전어 회 무침 구이.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 </p>
<p>“전어는 생 거도 맛있고, 무쳐도 맛있고, 구워도 맛있고, 밥을 비벼도 맛있죠. 전어는 마지막까지, 머리부터 꼬리, 내장까지 다 먹는 거니까.”</p>
<p>대포 용이횟집 조갑남(63) 사장은 ‘전어 예찬론’을 펼친다.</p>
<p>“여기 안바다 고기(전어)가 최고 맛있어요. (사람들이) 여기 전어는 항상 다른 데 보다 맛있대요. 물이 좋아요. 깨끗하고, 고기가 싱싱하고요.”</p>
<p>조 사장은 대포마을 앞 바닷가가 매립되기 전인 1989년부터 28년째 지금 자리에서 전어 전문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마을 내 9개 전어 식당 가운데 가장 먼저 문을 열었다.</p>
<p>전어를 이용한 요리는 회와 무침, 구이. ‘전어 3종 세트’다. 전어 금어기가 풀리는 7월 16일부터 10월 말까지 전어를 맛보려는 미식가들로 식당 거리가 붐빈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5/20170925161739692_0.JPG" alt="P13 전어 회.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흔히 전어는 가을에 먹는 생선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천은 광양 등 타 지역보다 이르게 전어를 먹는다. 7~8월 여름 전어가 어려서 최상의 세꼬시(뼈째 썰어 먹는 것)로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9~10월 가을 전어는 고기가 크고 뼈가 세서 포를 떠야 해 구이용으로 적합하다고 한다.</p>
<p>식당 입구에 놓인 큼지막한 수족관에는 은빛 비늘 반짝거리는 전어들이 무리지어 헤엄치고 있다. 새벽에 사천만에서 동네 어부들이 잡아온 싱싱한 전어를 받아 2시간가량 깨끗하게 손질을 한 다음 상에 올린다. 물량이 달려도 타 지역산 전어를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손님들이 맛을 보면 미세한 식감 차이를 금세 알아채기 때문이란다.</p>
<p>먹음직스럽게 참깨를 듬뿍 뿌린 전어 회와 무침, 구이가 한 상 가득 차려 나온다. 조 사장은 ‘전어 3종 세트’를 회→무침→구이 순으로 먹는 게 좋다고 조언한다. 회는 찰지면서 담백하고, 무침은 새콤하면서 맛깔스럽고, 구이는 기름지면서도 고소한 맛을 입 안 가득 안겨준다. 된장과 초장, 고추냉이 중에서 골라 식성대로 찍어 먹거나, 상추에 싸 먹는다.</p>
<p>마무리는 ‘비빔밥’이다. 남은 회에 초장을 뿌려 밥과 비비거나, 무침을 남겨 밥과 비벼 먹는다. 이때 콩가루를 넣고 비비는 것이 이채롭다. 밥에 전어를 올려 된장과 먹기도 한다.</p>
<p>전어는 단백질과 칼슘, 지질, 무기질, 비타민 등 영양분이 풍부해 몸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p>
<p>“전어는 등 푸른 생선이라 몸에 좋지요. 아침 오고, 점심 오고, 저녁 오고 하루 3번 오는 남자가 있어. 빈혈이 심해 두 달 먹더니만 빈혈이 없다고 그래. 지금도 진주 대학병원 있는 사람이 회를 많이 떠 가요. 각시가 아픈데, (전어)회 먹고 나면 안 아프다고 그래.”</p>
<p>7월 중순~10월 말 ‘전어철’이 끝나면 일반 회를 판다. 전어에 이어 문어를, 겨울에는 물메기탕, 대구탕, 봄에는 주꾸미 샤브샤브, 도다리 쑥국 등을 주로 한다.</p>
<p>문의 055-834-4850, 경남 사천시 대포길 25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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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경남 무형문화재 제28호</p>
<p>마도 갈방아소리</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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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전어잡이 면사 그물 물들일 갈방아 찧으며</p>
<p>메기고 받는 ‘바다 다듬이질’ 소리</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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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우리 전어 잡으러 바다로 가세~!.”</p>
<p>지난 7월 29일 경남 삼천포항 전어축제 특설무대. 경남 무형문화재 제28호인 ‘마도 갈방아소리’ 공개 행사가 열렸다. 이날 경남 사천 마도 갈방아소리 보존회 박용준(87) 예능보유자와 김봉언(기능보유자 후보) 회장, 황둘선(사무장)·박영철·이우섭 전수조교를 비롯한 이수자와 회원 50여 명이 다섯 마당으로 나눠 마도(馬島)에서 전어잡이를 할 때 부르던 ‘갈방아소리’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과거 면사(綿絲) 그물에 ‘갈’을 먹이고, 어선 두 척으로 전어를 둘러싸 잡아 만선해서 돌아오는 모든 과정을 30여 분 동안 진행해 갈채를 받았다.</p>
<p>갈은 소나무 껍질을 의미한다. 갈방아소리는 갈을 방아질 할 때 부르던 소리이다. 최근까지 전어잡이로 유명했던 마도는 사천만 아래에 자리한 작은 섬이다. 삼천포대교와 창선대교가 징검다리를 삼는 늑도 북쪽의 신도와 저도 한가운데에 있다.</p>
<p>갈방아소리는 전어잡이를 할 때 사용하는 면사 그물에 갈을 먹이기 위해 방아질을 할 때 부르는 노동요다. 마도 전어잡이 어부들이 면사 그물이 썩지 않도록 소나무 껍질을 돌절구에 넣어 방아를 찧어서 가루로 만든 후, 대형 솥에 넣어 그물을 삶으며 피로감도 잊고 작업 능률을 올리기 위해 부르던 소리가 ‘갈방아소리’이다. 그물에 갈을 먹이면 방부 효과가 있어 쉽게 썩지 않는다.</p>
<p>주민들은 전어를 ‘전애’ 또는 ‘전에’라고 발음한다. 과거 전어를 잡던 사천만 바다 역시 ‘강지바다’라고 부른다. 선박 엔진 보급과 나이론사 그물 등 어구의 현대화에 따라 갈방아질은 사라졌으나 다행히 갈방아소리는 끊기지 않고 전승되고 있다. 마도 갈방아소리는 지난 2004년 3월 경남 무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됐으며, 50여 명의 보존회 회원들이 공동체 생활 속의 전어잡이 노동요인 ‘갈방아소리’의 명맥을 잇고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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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면사 그물 썩지 않도록 갈(소나무 껍질) 먹여</p>
<p>마도 갈방아소리는 ▲첫째 마당-갈방아 찧는 마당 ▲둘째 마당-갈을 먹이고 퍼는 마당 ▲셋째 마당-뱃고사 지내는 마당 ▲넷째 마당-고기 잡으러 가는 마당 ▲다섯째 마당-만선을 기뻐하는 마당으로 구성돼 있다.</p>
<p>첫째 마당은 소나무 껍질을 돌절구에 넣고 장정 4명이 번갈아 가며 방아질을 한다. 방아를 찧어 한 가마니를 만드는데 5~6시간씩 걸린다. 앞소리와 방아 찧는 소리가 잘 맞으면 멀리서 듣기에 마치 다듬이 소리와 같아서 ‘바다의 다듬이질 소리’라고 했다. “자~! 선원들~! 우리 신나게 갈방아 한번 찧어 보세”</p>
<p>박용준 예능보유자 등 앞소리꾼이 소리를 하면, 나머지 뒷소리꾼과 방아꾼들이 “에이야 디이야 갈방애야” 로 받아 부른다.</p>
<p>둘째 마당은 가루로 만든 갈을 아낙들이 함지박에 퍼 담아 머리에 이고 무쇠솥(갈솥)에 옮긴 후 물을 붓고 불을 지펴 갈물을 끓인다. 팔팔 끓는 물에 그물을 담갔다가 꺼내 말린다. 하얀 그물이 솥을 거쳐 붉은 색으로 변한다. 앞소리와 뒷소리를 짧게 먹이고, 받는다.</p>
<p>“이 그물로(어~여)/ 싣고가서(어~여)/ 강지바다에(어~여)/ 도장원 해보자(어~여)/ 점박이 큰놈은(어~여)/ 소금에 굽고(어~여)/ 전애머리는(어~여)/ 깨가 서 말(어~여)/ 전애 밤젓은(어~여)/ 사돈께 보내라(어~여)…”</p>
<p>셋째 마당은 출어에 앞서 무녀가 선주, 어부들과 함께 풍어를 기원하는 뱃고사를 지낸다. 남해안 별신굿의 형태를 갖춘다.</p>
<p>“서천국 사바세계 해동조선 경상남도/ 관은 사천시 앉은거와는 마도접수더니/ 해를 다녀 월을 다녀…”</p>
<p>넷째 마당은 바다로 나가는 노(櫓) 소리와 배 두 척이 원형으로 그물을 치고 당겨 전어를 둘러싸 잡는 장면이다. 당시는 전어 떼를 발견하면 갑자기 뱃전을 두드려서 전어를 놀라게 해서 그물로 몰아 잡았다. 그물을 당길 때 부르는 소리가 ‘사리소리’, 전어를 퍼 담을 때 부르는 소리가 ‘가래소리’이다.</p>
<p>“어기여차 가래 소리에(에헤야 가래야)/ 행선한 지 이틀 만에(에헤야 가래야)/ 만선풍어 가래로세(에헤야 가래야)/ 남해용왕 서해용왕(에헤야 가래야)/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에헤야 가래야)/ 칠산바다에 애중선 뜨고(에헤야 가래야)/ 강지바다에 전애 떳구나(에헤야 가래야)/ 강지바다에 전애 뛴다고(에헤야 가래야)/ 모중방 구석에 몽치메 뛸라(에헤야 가래야)…”</p>
<p>다섯째 마당은 전어 배가 만선기를 날리면서 선창으로 들어오는 대목이다. 어부와 주민들이 만선을 기뻐하며 함께 모여 춤추고 노래를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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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지원 확대와 국가 무형문화재 승격 기대</p>
<p>마도 갈방아소리는 지난 2001년 경남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우수상, 2002년 충주에서 열린 제43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서 문화관광부장관상을 수상한 바 있다.</p>
<p>마도 갈방아소리 전수관(사천시 선진공원길 326번지)은 지난 2010년 11월 개관했다. 현재 보존회 회원은 54명. 마도에서 여전히 살고 있는 박용준 예능보유자를 비롯해 마도가 고향이면서 삼천포에 나와 사는 주민 외에 멀리 진주에 사는 회원도 있다. 회원들은 한 달에 두 차례 전수관서 모여 갈방아소리를 연습한다.</p>
<p>회원들이 고령이다 보니 애로가 많다. 공연 때 사용하는 축소 모형 배도 좀 더 가볍게 만들었다. 이전에 사용하던 목선은 너무 무거워 운영하기가 힘들었다. 공연 때 배를 움직이기가 쉽지 않고, 공연 전후 운송도 크레인을 동원해야 해 비용도 많이 들어갔다.</p>
<p>김봉언 회장은 “마도라는 섬이 우리 지역의 자랑이니까 전승해 나가야 한다. 단체 종목 전승하기가 힘들다. 밥벌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하루 일과를 버리고 가는데 젊은 사람들이 안 하려고 한다. 정부에서 단체 종목에 지원을 많이 해줬으면 하고, 국가 중요 무형문화재로 승격됐으면 한다.”고 말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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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진설명</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5/20170925163150521_0.jpg" alt="마도 갈방아소리 1.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돛단배에 노 저어 전어를 잡던 시절, 갈(소나무 껍질)을 방아질 하고 그 그물로 전어를 둘러싸 잡아 가래로 퍼담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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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5/20170925163155544_0.png" alt="마도 갈방아소리 2.pn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마도 갈방아소리</p>
<p>예능보유자 박용준씨</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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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전어 얘기 다 할라카먼 말도 못합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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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박용준(87) 마도 갈방아소리 예능보유자는 마도에서 평생을 전어와 함께 했다. 16살에 전어 배를 타 70살 가깝도록 사천만 ‘강지바다’에서 전어를 잡았다. 그는 “(갈방아소리는) 아버지, 형님들 하는 걸 따라서 배웠다.”고 말한다.</p>
<p>8월초, 예능보유자를 만나기 위해 삼천포항 구항(어항)에서 마도행 배에 올랐다. 뭍과는 직선거리로 불과 1.1㎞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작은 섬이다. ‘전어만 바라보고 살 때’는 저도와 마도 인구를 합쳐 500여 명이 살았고, 주막집도 여러 집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마도 인구는 35가구 76명이다. 엔진을 장착한 배와 나이론사 그물이 사용되며 마을 해변에서 해오던 갈방아질은 끊겼다. 마을에서 만난 예능 보유자의 바람은 많은 젊은 사람들이 ‘마도 갈방아소리’를 익혀 오래도록 이어나갔으면 하는 한 가지다.</p>
<p> </p>
<p>그물에 갈(소나무 껍질)은 왜 먹이나요?</p>
<p>옛날에는 면사를 안 썼습니까? (그물이) 썩어버려. (그물이) 삶을수록 좋고, 갈칠 할수록 오래 갑니다.</p>
<p> </p>
<p>갈은 언제 먹여야 하나요?</p>
<p>음력으로 6월부터 12월까지 전어를 잡아. 6개월 사업인데, 전어 잡는 기간에 15일 만에도 하고 20일 만에도 하고 자주 해야 합니다. 겨울 동안 놔두었다가 이듬해에 다시 합니다.</p>
<p> </p>
<p>갈은 어디서 구하나요?</p>
<p>하동 장에서 사와. 소나무 껍질만 많이 팔아요. (마도에서 하동 장까지) 돛을 달고 노를 저어서 갑니다.</p>
<p> </p>
<p>삶을 때 갈 외에 풋감(땡감)도 넣나요?</p>
<p>(갈 솥에) 큰 물 20동이를 부어요. 나무가 많이 들어요. 염나무, 장작… (갈)가루 내서 물 팔팔 끓여요. 풋감은 안 들어갑니다. 자주 하면은 (그물이) 붉었다가 까매져요. (그물을) 손질해서 삶고, 손질해서 삶고 자꾸 해요. 지금은 편안하고 좋다 아닙니까.</p>
<p> </p>
<p>갈방아소리는 어떻게 배웠나요?</p>
<p>아버지, 형님들 하는 것 따라서 배워 가지고 하는 것인데.</p>
<p> </p>
<p>왜 사천만 ‘강지바다’에서 전어가 많이 잡히나요?</p>
<p>강지바다 뻘이 좋으니까 전어가 봄부터서 들어와요. 아주 물가(해변)까지 들어옵니다. 전어잡이 가면은, 굵은 전어가 알배 가지고, 직접 잡았거든. 이 바닥 뻘 먹고 커나놓으니까 맛도 있고. 지금은 (전어 맛이) 전에만 못해요.</p>
<p> </p>
<p>돛단배 시절에 전어는 어떻게 잡았나요?</p>
<p>(배 두 척이) 싸가지고 잡아. 옛날에는 전어배가 아니라 ‘싸잇배’라고 해. 싼다고 해서. 본선 9명, 지선 3명 12명이 탑니다. 선장, 깃대잡이(선두), 그물 놓는 사람 2명, 노 젓는 사람 4명, 밥하는 사람(잡일), ‘뒷발무상’(그물을 뒤에서 올리는 사람)… 역할이 다 있어요. (그때는) 돛단배가 12척까지 있었는데 지금은 4척이 전어잡이 합니다. 요새는 기계로 (배 한 척당) 둘이서 합니다.</p>
<p> </p>
<p>뱃전을 두드려서 잡았다던데</p>
<p>그물을 뱅~ 놔놓고 두드리고 다닙니다. 전어들이 두드리는 소리에 놀래서 (그물 쪽으로) 도망가게 해서 잡아.</p>
<p> </p>
<p>만선해서 마을로 들어올 때는 어땠나요?</p>
<p>소리 나는 것 두드리며 물동이 같은 것 두드리고 들어와. 전라도 고흥배, 장삿배 큰 배가 소금을 한배 싣고 와 (염장해서) 전어 싣고 갑니다. 그때는 마리를 셌어요. 나무로 돼 있는 동이, 한 동이가 2000마리야. 전어 얘기 다 할라카믄 말도 못합니다.</p>
<p> </p>
<p>앞으로 바람은?</p>
<p>지금 내가 힘을 못써요. 젊은 사람들이 (보존회에) 많이 들어오면 좋겠는데, 우리 동네 사람만 해도 안 할라케요. 제일 그게 문제입니다. 젊은 후계자 여럿이 하면서 (갈방아소리를) 이어 나갔으면 좋겠는데, 특히나 (젊은) 동네사람들, 마도 사람들이 이어서 하면 좋겠는데 안 할라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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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진설명</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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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동쪽 하늘이 붉게 물드는 시간, 정강주·임영애 씨 부부가 네 번째 그물을 걷어올리고 있다. 주민들이 ‘사천강’이라고 부르는 사천만은 전어를 잡는 ‘황금 바다’ 이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5/20170925161605818_0.JPG" alt="P08 삼천포대교 야경.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경남 사천시 삼천포항과 남해군 창선면을 연결하는 삼천포대교 야경.</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5/20170925161623084_0.JPG" alt="P09 정강주 어촌계장.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5/20170925161611307_0.JPG" alt="P09 은빛 전어.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밝은 표정을 짓는 정강주 대포마을 어촌계장.(위) 그물코에 걸려 올라온 ‘은빛’ 전어.(가운데)</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5/20170925161617252_0.JPG" alt="P09 전어잡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어민들.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새벽 전어잡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대포마을 어민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5/20170925161629111_0.JPG" alt="P10 전어를 옮기는 어민들.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새벽에 잡은 전어를 옮기는 어민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5/20170925161715502_0.JPG" alt="P11 파도를 보며 즐거워하는 아이들.JPG 이미지입니다." width="50%"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5/20170925161722344_0.JPG" alt="P11 해상 황토 바다펜션.JPG 이미지입니다." width="50%" /></p>
<p> </p>
<p>삼천포대교 아래에서 파도를 보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왼쪽) 대포마을에서 운영하는 해상 황토 바다펜션.</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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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찾아가는 길</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25/20170925161727974_0.jpg" alt="P12 대포마을-지도.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주소 경남 사천시 대포길 255</p>
<p>전화번호 055-834-4988/ 010-9117-4988</p>
<p>홈페이지 seantour.com/village/daepo/main/</p>
<p>교통편</p>
<p>- 승용차</p>
<ul>
<li>서울→경부 고속도로→대전~통영간 고속도로→사천 IC→대포 어촌체험마을</li>
<li>부산→남해 고속도로(순천 방향()→진주→사천 IC→대포 어촌체험마을</li>
<li>광주→남해고속도로(부산 방향)→곤양IC→서포면소재지→사천대교→대포마을</li>
</ul>
<p> </p>2017-09-25T07:16:03.000Z2017-09-25T07:33:19.000Z관리*해양 풍경화의 시대 폭풍 속의 배<p>바다 갤러리</p>
<p> </p>
<p>해양 풍경화의 시대</p>
<p><strong>폭풍 속의 배</strong></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20326685_0.jpg" alt="img387.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글 이연식(미술평론가)</p>
<p>바다를 그린 그림의 등장</p>
<p> </p>
<p>서양미술에서 바다는 중요한 주제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자연을 주제로 삼은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은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유럽인들이 자연을 점점 더 의식하게 되면서이다. 풍경화는 오래도록 인물화에 비해 덜 중요한 장르로 여겨졌지만 17세기 이후로 몇몇 뛰어난 화가들이 풍경화의 위상을 높였다. 물론 어떤 장르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것은 개인의 자질 이전에, 사회와 문화가 그 장르에 유리하도록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바다를 그린 그림은 유럽인들이 ‘지리상의 발견’을 통해 유럽 바깥으로 활발하게 돌아다니면서부터 나왔고, 해상 무역을 주력으로 삼았던 네덜란드가 약진하면서 미술의 여러 장르 중에서 어엿한 한 자리를 차지했다.</p>
<p>오늘날에도 어느 정도는 그렇듯 과거에는, 특히 범선 시대에는 항해는 불편하고 고통스러웠다. 잠자리는 좁고 불결했고, 신선한 식료품이 부족해서 승무원들은 갖가지 질병에 시달렸다. 물론 제대로 씻기도 어려웠다. 요즘은 <캐리비안의 해적>같은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수없이 제작되는데, 이 영화에서 갑판에 등장 인물들이 모여 서 있는 장면을 보면, 몇 달 동안 목욕도 하지 않고 옷을 빨아 입지도 않았을 저들이 서로 얼마나 악취를 풍겨댔을까, 하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된다.</p>
<p>항해는 이처럼 여러 모로 불편한 것은 물론이고, 위험했다. 배는 예기치 못했던 폭풍을 만나고 암초에 걸려 침몰하는 경우가 많았다. 18세기에는 해마다 5천 명의 영국인이 해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고 보고되었다. 그럼에도 무역 활동과 식민지 개척을 위해 유럽인들은 줄기차게 바다를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폭풍에 휘말리고 연안에서 좌초하는 배를 그린 그림이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의 조제프 베르네(Claude-Joseph Vernet, 1714–1789) 같은 화가는 배와 바다, 해난 사고를 그려서 명성을 누렸다. 베르네는 배를 덮치는 파도를 조금이라도 생생하게 보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돛대에 묶어 달라고 해서는, 몇 시간이나 파도를 직접 몸으로 맞으면서 관찰했다.</p>
<p> </p>
<p>낭만주의의 발전과 해양 풍경화</p>
<p> </p>
<p>왜 위태로운 장면과 재난의 장면을 그린 그림이 인기를 끌었을까? 이는 18세기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유럽에서 유행했던 소위 ‘낭만주의’라는 예술 사조와 관련된다. 낭만주의는 그 자체로는 통일적이지 않고 여러 갈래의 성격을 지닌, 복잡하고 모순적인 사조이다. 낭만주의와 대조되는 사조가 ‘고전주의’인데, 고전주의는 엄밀하고 단정한 규준을 추구하는 예술이었다. 과거의 문화와 유산, 구체적으로는 오랜 세월 잊혔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18세기 중반부터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에 대한 향수가 확산되었고, 옛 유물들이 연달아 발견되면서 고전주의는 한동안 유럽에서 널리 유행했다.</p>
<p>이와 달리 낭만주의 예술은 규준이나 제도에 얽매이는 것을 거부하고 인간의 내면에 담긴 자유로운 감성을 드러내려 했다. 낭만주의는 체제와 규준에 대한 환멸과 부정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 유럽인들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계몽주의와 산업의 발달, 정치적 격변을 통해 세상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 이 시기에 유럽을 휩쓸었던 정치적 격변은 더 좋은 세상을 만든 것 같지 않았고, 자연과 대결하는 입장에서도 여전히 인간의 힘은 충분치 않아 보였다. 자연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인간의 의지를 짓뭉개곤 했다. 낭만주의는 이처럼 인간에 대해 느끼는 불투명성과 자연에 대해 느끼는 불투명성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 대한 반응으로 진행되었다. 프랑스의 낭만주의가 시민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격변을 배경으로 성장한 것과 달리, 독일과 영국의 낭만주의는 거대하고 압도적인 자연 앞에서 미물(微物)과도 같은 인간의 조건에 대한 명상에 빠져들었다.</p>
<p>이런 때문에 18세기 중반부터 유럽의 풍경화에서는 자연에 대한 불안과 경이로움을 표현한 그림이 많아졌고, 바다를 항해하던 배가 겪는 폭풍우와 난파는 인기를 끌었다. 해난 사고야말로 인간이 자연의 거센 위력 앞에 무력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주제였다.</p>
<p> </p>
<p>터너와 폭풍우</p>
<p> </p>
<p>영국을 대표하는 풍경화가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는 이처럼 풍경화를 둘러싼 조건이 성숙했을 무렵에 태어나 활동했다. 터너는 14세 때 로열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수채화를 배웠고, 스무 살 무렵부터 유화를 그렸다. 24세 때 아카데미의 준회원이 되었고, 3년 뒤에 정회원이 되었다. 일찍부터 그의 그림은 좋은 평가를 받았고, 1804년에는 자신의 화랑을 개설할 정도로 수완이 좋았다.</p>
<p>터너의 초기작인 <난파>(1805년)는 마치 관객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인 것처럼 현장감이 넘친다. 이 뒤로 터너는 자연의 거센 위력 앞에 인간이 만든 것들이 허망하게 무너지거나, 무력하게 흔들리는 양상을 즐겨 그렸다. 그의 그림 속에서 헛되이 분투하는 인간 자신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자연을 숭배하고, 영혼의 주도권을 잃은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의지나 감정은 아무런 가치를 갖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p>
<p>일찍부터 명성을 누리며 부족한 것 없이 살았던 터너는 나이가 들수록 ‘이상한’ 그림을 그렸다. 터너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을 더 이상 그리지 않았다. 자연의 근본적인 성격을 파악하려 했고, 예술을 이루는 근본적인 구성 요소를 탐구했다. 터너가 나이 예순이 훨씬 지나서 그린 <눈보라 속에서 출항하는 증기선>(1842년)은 당시 미술계에서 한바탕 소란을 불러일으켰다. 돛단배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이제 증기선의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폭풍우를 너끈히 견딜 만큼 배가 크고 튼튼하지는 않다. 그림 속의 증기선은 당장이라도 파도에 휘말려 사라질 듯 위태롭다. 터너는 앞서 프랑스 화가 베르네가 그랬던 것처럼, 파도를 좀 더 잘 관찰하기 위해 선원들에게 자신의 몸을 돛대에 묶어 놓도록 부탁했다. 그는 네 시간 동안 물보라를 맞았다. 하지만 이 그림에 대한 반응은 좋지 않았다. “비누 거품과 회반죽 덩어리”라는 조롱을 받았다.</p>
<p>뒤로 갈수록 터너는 배, 건축물, 인물 등을 구체적으로 그리는데 관심이 없어졌다. 물감의 덩어리와 붓질이 뒤엉킨 그의 그림들은 종종, 완성된 것인지 어떤지조차 판단하기 어렵게 되었다. 터너는 우주가 하나의 총체라는 생각, 자연의 모든 것에 신성(神性)이 담겨 있다는 범신론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는 당시 유럽에서 그리 드문 생각은 아니다. 한데 터너는 그런 자연을 그리려면 그림 속의 사물을 분명하게 묘사하는데 매달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범신론의 임장에서 자연의 위력을 절감하는 순간은 바로 폭풍우의 순간이다. 뜻하지 않은 국면에 분출하는 자연의 압도적인 힘은 필연적으로 재앙의 모습을 띠게 된다. 이 과정에서 피학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위대한 존재와 하나가 되는 감정으로 이끈다. 폭풍우가 가득한 바다를 그린 풍경화는 자연이라는 주제를 통해 인간을 돌아보게 하는 그림이었다.</p>
<p> </p>
<p>-----</p>
<p>사진설명</p>
<p> </p>
<p>조제프 베르네, <지중해에서의 폭풍과 난파>, 1767년</p>
<p> </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20332278_0.jpg" alt="img391.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 </p>
<p>윌리엄 터너, <난파>, 1805년</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20339509_0.jpg" alt="img393.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터너, <눈보라 속에서 출항하는 증기선>, 1842년</p>
<p> </p>
<p>-----</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20458149_0.jpg" alt="img395.jpg 이미지입니다." width="116" height="156" />이연식</p>
<p>미술사가. 미술과 관련된 저술, 번역, 편집, 강의를 한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와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미술이론과 전문사 과정을 졸업했다. 저서로 『미술영화 거들떠 보고서』(2006) 『위작과 도난의 미술사』(2008) 등이 있다.</p>2017-09-11T03:03:30.000Z2017-09-11T03:34:51.000Z관리*바다와 영화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비거 스플래쉬>(2015)<p>바다와 영화</p>
<p> </p>
<p>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비거 스플래쉬>(2015)</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5459924_0.jpg" alt="img371.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strong>지중해의 섬 판테레리아</strong><strong>, </strong></p>
<p><strong>낙원의 이면</strong></p>
<p> </p>
<p>글 한창호(영화평론가)</p>
<p>이탈리아의 남쪽 시칠리아 근처에는 조그만 화산섬들이 제법 많다. 영화 덕분에 유명해진 섬들도 있다. 이를테면 스트롬볼리(Stromboli) 섬인데,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고전 <스트롬볼리>(1950)가 이 섬에서 촬영된 뒤, 지중해의 무명 섬은 일약 유명 관광지로 변했다. 이제 스트롬볼리뿐 아니라 쪽빛 바다와 맑은 하늘을 품은 지중해의 섬들은 거의 다 유명 관광지가 됐다. 이런 변화에 약간 비켜 있던 섬이 판테레리아(Pantelleria)이다. 이 섬은 시칠리아와 아프리카 북부 튀니지 사이에 있다. 지도상의 직선거리로 보면, 시칠리아보다 튀니지에 더 가까이 있다. 유럽의 지중해라기보다는 아프리카의 지중해에 속해 보이는 곳이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비거 스플래쉬>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던 이곳 판테레리아 섬을 배경으로 찍은 멜로드라마다.</p>
<p> </p>
<p>튀니지에 가까운 판테레리아 섬</p>
<p>구아다니노 감독의 공간에 대한 특별한 감각은 출세작 <아이 엠 러브>(2009)에서 이미 드러난 바 있다. 밀라노와 산레모를 배경으로 했던 <아이 엠 러브>에서 두 도시는 겨울과 여름, 회색과 붉은색, 억압과 사랑(앞은 밀라노, 뒤는 산레모) 등의 의미로 대조됐다. 영화는 밀라노의 상층부 가족의 ‘질서와 자유’를 다루고 있는데, 밀라노는 질서를, 산레모는 자유를 상징하는 내용이었다. 말하자면 공간 자체가 풍부한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비거 스플래쉬>에서도 공간에 대한 구아다니노의 감각은 여전히 주목된다. 당신은 아프리카에 가까운 지중해의 무명 섬을 떠올리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p>
<p>영화는 록 스타 마리안(틸다 스윈튼)이 젊은 애인인 사진작가 폴(마티아스 쇼에나에츠)과 함께 맨몸으로 별장의 수영장에 누워, 책을 읽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지중해 특유의 뜨거운 태양, 푸른 하늘, 편안한 공기가 기분을 나른하게 만드는 곳이다. 마리안은 최근의 공연에서 성대를 다쳐 수술을 했고, 이곳 판테레리아에서 휴양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유럽, 곧 문명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외딴 섬에서, 두 사람은 마치 그 모든 제약에서 해방된 듯한 몸짓을 하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두 사람에게 판테레리아 섬은 문명에서 벗어난 ‘완벽한 자유’의 공간처럼 보인다. 이들은 사람들로 붐비는 해변에는 전혀 가지 않고, 섬 내부에 있는 작은 호수에서 물놀이를 하며, ‘자발적인 고립’을 즐기고 있다. 사람들도 별로 없고, 귀에 거슬리는 소음도 들리지 않고, 오직 호수의 잔잔한 물결소리, 그리고 벌레소리들만 들리는 곳이다.</p>
<p>이곳에 마리안의 옛 애인이자 음반 프로듀서인 해리(랄프 파인즈)가 딸 페넬로프(다코다 존슨)와 함께 찾아오면서 영화는 멜로드라마의 삼각관계를 그리기 시작한다. 방문객들이 이곳에 오는 순간부터 마리안을 사이에 두고 두 남자, 곧 옛 애인 해리와 현재의 애인 폴은 긴장관계에 놓인다. 또 한편 조숙한 딸(이라는) 페넬로프를 두고 부친 해리와 폴 사이에도 불편한 삼각관계가 그려진다. 해리의 말에 따르면 딸은 1년 전에 찾았다고 하는데, 영화 내내 두 부녀는 진짜 가족관계인지 아닌지 분명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섬의 평화는 순식간에 깨졌고, 네 사람은 사랑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심리적 싸움을 벌이는 것이다.</p>
<p>아프리카 난민들의 피난처</p>
<p>그런데 네 명의 백인이 펼치는 심리적 갈등 뒤로 생존에 목숨을 건 아프리카 흑인들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며 <비거 스플래쉬>는 이야기의 외연을 넓혀간다.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에서 2011년부터 내전이 악화됐고, 정치적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난민의 수는 급격히 늘어났다. 아프리카를 탈출하려는 난민들이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이 주로 시칠리아 인근의 섬들이다. <비거 스플래쉬>의 경찰 간부가 말하길, 판테레리아의 사정은 아무 것도 아니며, 이탈리아 최남단 섬인 람페두사에는 이미 난민의 수가 주민의 두 배를 넘었다고 말한다.</p>
<p>람페두사의 인구가 6천 명인데, 2011년에는 한 때 난민의 수가 5만 명에 육박하기도 했다. 사정은 이렇게 악화됐지만, 알다시피 독일 이외의 다른 유럽 국가들은 난민 대처에 소극적이다. 2013년 새 교황 프란시스코가 첫 공식방문지로 람페두사를 찾았지만, 난민에 대한 교황의 호소도 별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한 가지 아름다운 소식은 람페두사의 주민들이 몰려드는 난민들을 내치지 않고, 전부 받아들이고 있는 점이다. 그래서 람페두사의 주민들은 매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고 있는데, 그렇다고 이들이 심각한 난민 문제를 홀로 떠맡을 수는 없을 것이다. <비거 스플래쉬>는 난민들의 존재를 멜로드라마의 배경에 등장시켜, 이 문제는 이제 유럽의 일상이 됐다는 점을 놓치지 않고 있다.</p>
<p>영화 속에서 아프리카의 난민들은 마치 백인 주인공들, 곧 우리의 죄의식을 자극하듯 불현듯 나타나고 곧 사라지곤 한다. 이를테면 폴이 페넬로프와 함께 수영을 즐기려갈 때, 이들의 앞엔 이제 막 지중해를 건너온 아프리카의 남자들이 경찰의 수사를 피해 숨을 곳을 찾고 있는 식이다. 백인 남녀가 사랑의 공간을 찾아가는 호사를 누릴 때, 흑인 난민들은 목숨을 부지할 은신처를 찾는 행위가 대조되는 것이다. 판테레리아의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물은 바닥이 보일 정도로 맑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은 누군가에겐 낙원일 테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어서 벗어나고픈 감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p>
<p>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중해의 섬을 떠올리면, 특히 그 섬이 아프리카에 가까이 있다면, 문명에서 풀려난 해방 같은 원초적인 자유를 상상할 것이다. 헤밍웨이가 아프리카로 여행하는 마음, 이를테면 <킬리만자로의 눈>(1938)의 흥분도 바로 이런 야만에 대한 열정이 아닌가. <비거 스플래쉬>의 주인공들도 아프리카적인 해방감을 찾아 갔고, 영화의 대부분은 그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후반에 이를수록 영화는 자연에도 문명의 이기주의가 침범해 들어가고 있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 보여주고 있다. 특히 백인 남녀들이 경찰의 조사를 받을 때, 건물 바깥의 닭장같이 생긴 임시 수용소에서 흑인들이 마치 동물처럼 갇혀 있는 장면은 ‘문명인의 죄의식’을 고발하기에 충분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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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진설명</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5504010_0.jpg" alt="img373.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비거 스플래쉬’는 판테레리아 섬을 배경으로 한 멜로드라마다.</p>
<p>판테레리아 섬 시내 모습. 여자 주인공 틸다 스윈튼.</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5511955_0.jpg" alt="img379.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5516704_0.jpg" alt="img381.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 주인공 네 명은 사랑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심리적 갈등을 벌인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5508021_0.jpg" alt="img377.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 북아프리카풍의 해변 모습.</p>
<p>? 영화는 이제 유럽의 일상이 된 난민문제를 다루고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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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5521070_0.jpg" alt="img383.jpg 이미지입니다." width="116" height="152" />한창호</p>
<p>영화평론가. 이탈리아 볼로냐대학에서 영화학 라우레아 과정 졸업한 후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영화, 그림 속을 걷고 싶다』, 『영화와 오페라』 등이 있으며, 공저로 『필름 셰익스피어』 등이 있다.</p>
<p> </p>2017-09-11T02:57:42.000Z2017-09-11T02:57:42.000Z관리*섬 이야기 코트다쥐르 포구에서의 하룻밤<p>섬 이야기</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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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코트다쥐르 포구에서의 하룻밤</strong></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3951434_0.jpg" alt="img354.jpg 이미지입니다." width="50%"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3955523_0.jpg" alt="img356.jpg 이미지입니다." width="50%" /></p>
<p>글·사진 함정임(소설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p>
<p>토마스 만의 걸작 소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무대는 제목에서 지시하고 있는 대로 이탈리아 수상(水上) 도시 베네치아이다. 베네치아는 세 개의 석호(潟湖)를 거느리고 있고, 소설의 주 무대는 이들 석호들과 함께 아드리아해에 떠 있는 리도 섬이다. 리도 섬은 베네치아 영화제가 열리는 섬이기도 한데, 베네치아 본섬을 대문자 S자 형으로 가르는 대운하(Canel Grande) 끝, 산 마르코 부두에서 바포레토(수상버스)를 타고 십오 분 거리에 있다. 소설 주인공 아센 바하는 독일에서 존경과 명예의 정점에 오른 쉰 살의 소설가이다. 그는 역작의 집필을 마친 뒤, 피로와 의무감에서 벗어나고픈 충동으로 베네치아로 향한다. 그런데 그가 처음부터 베네치아를 꿈꾼 것은 아니다. 매년 여름이면 머물던 산중의 별장이 수리가 늦어지는 바람에 별장과는 전혀 다른 방향인 남쪽 바다로 가게 된 것이다. 아센 바하는 리도 섬에 여장을 풀자마자 불편한 심기에 사로잡히고, 다시 짐을 싸서 산 마르코로 향하는 배를 타는데, 무슨 조홧속인지, 사공에 속아, 배는 다시 리도 섬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는 리도 섬으로 되돌리는 뱃머리에 앉아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속으로는 ‘기분 좋은 실수’라 여기며 쾌감을 느낀다. 그리고는 처음에는 그냥 지나쳤던 아드리아 해의 ‘아주 멋진 부두’와 배와 물결과 사람들의 본 모습을 세밀하게 감상하게 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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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그리하여 아셴바하는 다시금 그 아주 멋진 부두를 보게 되었으며, 배를 타고 다가오는 사람들의 경외심에 가득 찬 시선에다 이 공화국이 보여주는 환상적인 건축물의 휘황찬란한 구조물들을 보게 되었다. 궁전의 가벼운 듯한 웅장함과 탄식의 다리, 사자상과 예수 그리스도상이 있는 물가의 주랑들, 그리고 동화에나 나옴직한 사원의 현란하게 튀어나온 측면이 보였으며, 성문 길과 거대한 시게탑도 한눈에 보였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육지로, 즉 기차를 타고 베니스에 도착하는 건 이를 테면 궁전에 들어갈 때 뒷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는 것과 같으며 지금처럼 배로 물결 높은 바다를 건너와야만 바로 전혀 기대하지 못한 이 도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거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토마스 만, ‘베네치아에서의 죽음’</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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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우회로들을 경험한다. 그 우회의 과정에서 삶의 의미와 지혜를 터득하는 것처럼, 여행지에서 만나는 돌발적인 상황들은 여행을 더욱 극적이고 풍요롭게 해준다. 극적인 것은 짧은 순간에 낯선 장면, 낯선 상황을 매우 정밀하게 톺아보고, 사유하고, 결정하게 만들어준다. 그 과정에 쏟은 집중력의 결과는 다양한 추억의 층위를 거느리며, 회상 행위를 풍요롭게 해준다. 아센 바하가 ‘기분 좋은 실수’라 부르며 리도에 체류하는 것처럼, 나에게도 자의든 타의든 감쪽같은 착오로 인해 목적했던 곳이 아닌 엉뚱한 포구에 머물렀던, 당혹스럽지만 결과적으로는 ‘잊지 못할’ 추억들이 있다. 칸느 옆 주앙레펭 포구에서의 하룻밤이 그것이다.</p>
<p>주앙레펭은 코트다쥐르(쪽빛 해안)으로 불리는 남프랑스 지중해안의 칸느와 앙티브 사이에 있는 작은 포구이다. 칸느는 국제영화제의 도시로, 앙티브는 피카소 박물관으로 명성이 높다. 짧은 기간 남프랑스 해안을 돌아보는 여행자라면, 칸느 아니면 니스의 숙소에 머무는 것이 상례이다. 내가 칸느나 니스가 아닌 쥐앙레펭에 묵게 된 것은 여행의 돌발성이 주는 선물과 같았다. 이십대 때부터 나는 카메라백을 어깨에 짊어지고 두 발로 유럽을 누벼왔다. 매체의 변화 흐름에 따라 여행의 형식도 달라졌는데, 비행기 티켓부터 현지 숙소, 렌트카, 공연까지 한 두 달 전에 직접 예약하고 떠나는 여행법만은 고수해왔다. 그리고 거기에는 거의 실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해 지중해안 여정에서는, 무슨 조홧속인지, 선호하는 숙소에 뒤따르는 매우 착한 가격에 그만 전혀 엉뚱한 곳을 예약하고 현지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p>
<p>르 클레지오와 로맹 가리, 샤갈의 족적이 뚜렷한 니스에 며칠 체류한 후, 칸느로 향했다. 도중에 앙티브에 들러 여유롭게 피카소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내륙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향수 도시 그라스까지 답사했다. 밤이 되어서 여장을 풀기 위해 칸느로 입성했다. 그런데 숙소 주소지를 찾아가니 위치가 칸느 해변이 아닌, 그 옆, 이름도 생소한 주앙레펭(Juan les pains)이라는 포구였다.</p>
<p>살다보면, 현실이 어느 순간 소설이 되고, 소설이 화답하듯 현실에 공명하기도 한다. 돌발적으로 나타나 추억의 무늬가 아로새겨진 장소가 누군가의 삶의 이력에서 도드라지게 눈길을 끄는 경우가 있다. 칸느 옆 주앙레펭이 포구가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그로부터 몇 년 뒤, 미국 소설가 피츠 제럴드의 여정을 쫓으면서이다. 파리, 뉴욕, 니스 등 <위대한 개츠비>의 집필 시기와 공간, 그리고 출간 역사를 살피는 과정에서 주앙레펭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피츠 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1920년대 말 뉴욕의 재즈 시대를 열고 있다. 그런데 소설보다 먼저 이곳 주앙레펭에서 밤마다 피츠 제럴드를 비롯 몇몇 젊은 아메리카인들이 재즈를 들었고, 그들을 따라 작가와 뮤지션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지금도 1월이면 주앙레펭 재즈 페스티벌이 열린다.</p>
<p>유난히 바닷가 포구를 사랑한 작가들을 기억한다. 쿠바 아바나 인근 코히마르에 살면서 <노인과 바다>를 쓴 헤밍웨이, 북프랑스 노르망디 해안 에트르타에서 유년기를 보냈던 추억을 되살려 <어떤 인생>(한국어 번역본 ‘여자의 일생’)을 쓴 모파상, 그리고 선원으로 대양을 떠돌았던 경험을 녹여낸 <모비 딕>의 허먼 멜빈. 그리고 남프랑스 코트다쥐르의 포구들에서 불멸의 첫사랑을 <위대한 개츠비>로 풀어낸 피츠 제럴드.</p>
<p>칸느 옆 주앙레펭 포구에 다시 가야 한다. 스치듯 떠나보내는 하룻밤 인연이 아니라 ‘기분 좋은 실수’가 매개해준 제대로 된 소설의 역사를 쓰기 위해.</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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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진설명</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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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한적하고 아름다운 코트다쥐르 지중해 쪽빛 해안.</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4003645_0.jpg" alt="img364.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코트다쥐르 앙티브의 평온한 풍경.</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3959600_0.jpg" alt="img362.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코트다쥐르 앙티브의 피카소박물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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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4007861_0.jpg" alt="img366.jpg 이미지입니다." width="115" height="155" />함정임</p>
<p>소설가. 전북 김제 출신으로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광장가는 길’로 등단했다. 이화여대 불문과와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저녁식사가 끝난 뒤』, 『무엇보다 소설을』 등의 작품집을 펴냈다. 현재 동아대 한국어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p>2017-09-11T02:39:50.000Z2017-09-11T02:52:24.000Z관리*김준의 갯살이 소유할 수 없는 바다, 가꾸어야 할 마을어장<p>김준의 갯살이</p>
<p>소유할 수 없는 바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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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가꾸어야 할</p>
<p>마을어장</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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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3557846_0.jpg" alt="img346.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3553274_0.jpg" alt="img344.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 </p>
<p>글·사진 김준(광주전남연구원 책임연구위원)</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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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여기는 왜 이렇게 집값이 비싸요. 시골집인 데다 주변에 땅값 생각해도 너무 비싸네요.</p>
<p>바다를 볼 수 있고 해변을 거닐 수 있는 집을 구하려고 전국 바닷가를 돌아다니다 전라남도 장흥 한 갯마을이 마음에 들어 부동산 시세를 물었다가 깜짝 놀랐다. 비쌀 것이라 생각했지만 너무 비싸다. 도시나 농촌 부동산은 땅값에 건물 값 그리고 개발가능성을 생각해 값이 매겨진다. 이러한 원칙을 적용하면 집은 낡고 땅값도 싸고 개발가능성도 적은 어촌마을 집값은 헐값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왜 이곳 집값은 비싼 걸까.</p>
<p>그 마을 갯벌은 득량만 최고의 바지락 밭이다. 득량만은 고흥군, 보성군, 장흥군으로 둘러싸인 우리나라 최고의 수산자원보호구역이다. 고갈되고 있는 바닷물고기나 갯벌생물을 위한 마지막 보루다. ‘방주’와 같은 곳이다. 그런데 목적이 조금 ‘불순’하다. 인간 중심의 발상이기 때문이다. 그 원인도 사실은 인간의 행위로부터 시작된 것이다.</p>
<p>갯벌에는 낮은 나무작대기가 줄지어 박아져 있다. 꼭 고추나무가 쓰러지지 말라고 묶기 위해 세워 놓은 것이다. 그렇게 나누어진 갯벌 크기는 모두 같고, 갯수는 마을 호수와 같다. 그러니까 집집마다 똑같은 규모의 바지락밭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개인 밭만 아니라 마을 공동 바지락 밭도 있다. 보성이나 고흥에서는 이를 두고 ‘방천’이라고도 한다. 일종의 ‘갯밭’이다. 제주 살림살이에 중요한 역할을 해 왔던 ‘우엉팟’과 같다. 집앞에 있는 텃밭과 같다.</p>
<p>개인밭이야 물이 빠지면 필요할 때 가서 캐면 되지만 공동밭은 정해진 날에 함께 일을 하고 똑같이 나눈다. 바지락 종패가 자체 번식하지 않을 때 어린 바지락을 사다가 뿌린다. 바지락밭은 논밭처럼 사고 팔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집에 딸려 있어 집을 사면 바지락 밭도 따라오기도 한다. 반대로 바지락밭 이용 권리를 마을 공동체에서 회수하는 마을도 있다. 집값이 비싼 경우는 전자에 해당한다.</p>
<p>소유라 함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유자가 사고팔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이다. 이를 근대적 소유라고 한다. 배타적 소유, 독점을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갖는 특징이다. 그러니 파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식에게 상속해 줄 수 있다. 그런데 어촌에는 다른 셈법이 적용된다. 소유하는 집과 공유하는 갯밭(바다밭)이 결합되어 있다. 우리 어촌이 갖고 있는 특징이다. 갯밭이 발달한 어촌은 더욱 집값이 비싸다. 갯밭을 제주에서는 바당이라 하며 완도, 여수, 진도에서는 ‘갱번’이라고도 한다. 수산업법에 따르면 ‘마을어업’*에 해당되는 곳이다. 갯벌이 발달한 서해안에서는 갯벌이 여기에 해당되지만 동해와 남해 그리고 제주에서는 얕은 바다도 해당된다.</p>
<p>이곳에서 바지락, 꼬막, 백합, 굴, 김, 미역, 매생이 등 자연산 패류나 해조류를 채취하거나 양식한다. 도시나 농촌 사람들은 이런 마을어업이 집값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문할 만 하다. 이를 이해하려면 마을어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p>
<p>마을어업 허가 자격은 해당 마을 어촌계, 영어조합법인, 지구별 수협에만 있다. 그러니 마을어업에 참여하려면 어촌계원이거나 법인이나 수협 조합원이어야 한다. 보통 어촌계원으로 참여한다. 어촌계원이 되려면 먼저 그 마을 주민이 되어야 한다. 집을 사야하고 마을에서 정한 기간을 거주해야 한다. 집을 갖고 거주하게 되면 마을어업에 참여할 자격을 갖게 된다. 물론 실제로 참여하는 것과 자격을 갖는 것은 다르다.</p>
<p>이렇게 해서 얻은 권리는 원칙적으로는 자식에게 상속되지 않는다. 집은 상속되지만 갯밭은 상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어촌마을에 사는 김씨가 사정이 생겨서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 사람은 마을 앞 바지락 밭에 참여해 일 년 5백만 원 소득을 올려왔다. 그럼 이사를 하면서 집값에 5백만 원 정도를 더해서 팔 수 있을까. 그렇게 할 수 없다. 집은 팔 수 있지만 마을어업 권리는 지분으로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상속될 수 없는 ‘공유자원’이다. 그런데 실제로 거래되는 집값을 보면 마을어업 소득이 높은, 즉 좋은 어장을 가지고 있는 어업활동에 참여하려고 생각한다면 보통 집값보다 비싼 값을 치러야 한다. 마을어업에 참여할 자격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p>
<p>어촌에 따라서 집을 사는 즉시 마을어업 참여권을 주는 경우도 있고, 일정한 기간 거주한 후 주는 경우도 있다. 가입 절차가 까다로운 마을은 마을회의에서 가입 여부를 결정하는 투표를 하기도 한다. 이렇게 절차가 복잡한 것은 공유자원의 지속성과 관리를 위한 규칙이다. 이를 두고 어촌으로 귀촌하려는 사람들이 어촌은 폐쇄적이다 진입장벽이 높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속내를 알게 되면 이러한 규칙이 이해가 된다. 40여 년 전 한 가구에 10여 명이 살던 시절에 농사보다 김 양식이나 굴 양식에 의존했다. 양식기술이 발달하지 못했기에 대부분 멀리 나가지 못하고 마을어장에 의존했다. 이때는 규칙이 정말 엄격했다. 공유자원의 이용과 관리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농사지을 땅도 없었지만 돈을 만들 수 있는 것은 김이나 굴 밖에 없었다.</p>
<p>농민들에게 땅은 목숨보다 귀하다. 그래서 지주에게 혹은 일제강점기 토지수탈로 농지를 잃었을 때 그 땅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땅을 잃은 것은 목숨을 잃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어민들에게 농지처럼 귀한 것이 마을어장이다. 그곳이 미역바위, 바지락밭, 김 양식장, 낙지잡는 어장이다. 제주에서 물질하는 해녀에게 우무가사리와 미역을 뜯고 전복과 소라를 따고 미역을 베는 ‘바당’이 그렇다. 그래서 ‘갯밭’이라 할 수 있고 바다밭이라고도 한다. 그곳에 하는 양식어업을 미역농사, 바지락농사, 굴농사라고 불렀다.</p>
<p>가끔 해안을 거닐거나 도로를 따라 운전을 하다 보면 갯벌이나 바다에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이곳은 바지락, 굴 양식장이니 채취하면 수산어법에 의해 벌금을 물리고 처벌을 받는다고 적혀 있다. 이런 곳은 모두 마을어업을 하는 곳이다. 공유자원이다 보니 ‘먼저 잡는 사람이 주인’이라는 논리가 앞서기도 한다. 미국의 생물학자 가렛 하딘은 1968년 발표한 ‘공유지의 비극’처럼 말이다. 하딘은 지하자원이나 초원, 공기, 바다 물고기 등 모두가 함께 누려야 할 자원을 마구잡이로 사용하거나 남획하여 고갈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어민들은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 ‘마을규약’ 혹은 ‘어촌계규약’을 만들었다.</p>
<p>많이 늦었지만 방치할 수 없는 곳이 마을어장이다. 마을어장이 하는 역할이 크기 때문이다. 수산물 채취 공간만 아니라 서식지 공간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곳이 무너지면 바다가 위험하다. 인간과 바다생물의 완충지이다. 지구의 생물다양성의 마지막 보루가 그곳이다. 태풍이나 해일이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그 위험과 맞서는 곳도 마을어장이다. 그곳에 사는 어패류는 인간이 배설한 온갖 것들을 정화하는 일을 한다. 뿐만 아니라 푸른 별 지구에 생명수를 저장하는 것도 마을어장이라는 지구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을어장을 잘 보전해야 하는 이유, 미래세대에게 건강하게 물려줘야 할 이유다. 그 역할을 어민이 맡고 있다. 귀어귀촌하는 분들도 새겨야 할 부분이다. 바다와 마을어장이 소중한 이유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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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마을어업은 ‘일정한 지역에 거주하는 어업인의 공동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시장군수의 허가를 얻어서 수면을 구획하여 패류나 해조류 등 정착성 수산동물을 관리 조성하여 포획 체포하는 어업’을 말한다. 강원, 경북, 제주는 평균 수심 7m 이내 나머지는 평균 수심 5m 이내 수역의 범위에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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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진설명</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3601757_0.jpg" alt="img348.jpg 이미지입니다." width="50%"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3605266_0.jpg" alt="img350.jpg 이미지입니다." width="50%" /></p>
<p>? 갱번이라는 마을어장에서 공동으로 미역을 채취해 직접 가공 판매하고 있는 어민들(전남 진도 관매도 마을어장)</p>
<p>? 장흥군 안양면 수문리 갯벌, 주민들이 똑같은 크기의 갯밭을 가지고 있다. 텃밭처럼 찬거리가 필요할 때 나가서 바지락을 캔다. 노인들에게는 생활비와 용돈을 마련해 주는 효자다.</p>
<p>? 하루 채취량을 어촌계에서 할당하고 있다.(충남 태안 황도 마을어장).</p>
<p>? 충청남도 원산도 마을어장, 화력발전소로 김 양식장을 잃고 부녀회를 중심으로 바지락어장을 개발해 생업을 잇고 있으며, 마을기금도 마련한다. 어머니들이 캔 바지락을 남자들이 지게로 운반하는 모습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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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3608864_0.jpg" alt="img358.jpg 이미지입니다." width="116" height="155" />김준</p>
<p>26년 동안 어촌과 섬 연구를 하고 있다. 현재 광주전남연구원 미래전략연구실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해양수산부 연안습지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민국갯벌문화사전』 『김준의 갯벌이야기』 등이 있다.</p>
<p> </p>2017-09-11T02:38:19.000Z2017-09-11T02:38:25.000Z관리*특별 기고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의 고장 진동면 고현리<p>특별 기고</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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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의 고장</p>
<p>진동면 고현리</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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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글·사진 최정윤(부경대학 명예교수)</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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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창원시 진동면 사무소에서 동남 방향으로 약 10분 거리를 택시로 가면 전국에서 미더덕 산지로 유명한 어촌마을을 만나게 된다. 우해이어보에서는 이 미더덕을 이름 없는 해충(海蟲)의 하나로 표현하였다. 우산자락에 펼쳐진 1백여 호의 마을로 진동면 고현리(古縣里)로 알려져 있다. 삼국시대에는 8진현(八鎭縣)이, 고려말에는 우산현(牛山縣)이, 선초 태종조에 와서는 진해현(鎭海縣)이 설치된 곳이다.</p>
<p>조선 왕조 말엽 고현리라는 마을 이름이 생기기 전 진해현을 거쳐간 역사적 두 인물이 담정(潭廷) 김려와 동무(東武) 이제마다. 두 사람은 다 같이 조선후기 개화사상에 투철한 실학파였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김려는 1801년에 진해현으로 유배되어 고현리 우산자락 초막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수산학서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를 남겼다. 이제마는 고종 말년에 진해현감으로 부임해 의술로 민생안정을 펴는 데 열정을 쏟은 인물이다. 그러나 이제마(李濟馬)에 대해서는 TV드라마 덕분으로 그가 조선의학의 새로운 경지를 연 사상의학(四象醫學)의 선구자라는 사실이 많이 알려졌지만, 담정 김려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지극히 한정되어 있어 아쉬움이 있다.</p>
<p>김려(1776~1834)는 선조시대 연흥부흥군 김제남의 후손으로, 호를 담정(潭廷)이라 하였으며, 약관 진사에 성균관 유생으로 들어갔으나 정조21년의 양학 탄압사건, 일명 ‘정사년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이로부터 유배생활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p>
<p>경상도 진해 땅으로 유배될 당시 김려의 나이는 25세였다. 유배지를 옮겨 다니는 동안 그에게 남은 희망이라고는 실사구시의 학문을 닦는 길 말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곧 정신을 가다듬어 진해 바다의 어족관찰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유배생활 2년이 지날 무렵 자신이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것들을 하나하나 분류하여 어족의 이름과 모양, 성정과 맛에 관한 것들을 적어나갔다. 또 그것을 잡는 시기, 잡는 방법, 유통에 관한 조사내용도 함께 정리했다. 우리나라 초유의 어보(魚譜) 작성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p>
<p>진해의 어촌 풍경, 남도 여인들의 생활모습, 아전 양반들의 행태와 관아 남문 밖 주막과 화류(花柳)거리의 풍경 등, 이런 것들은 따로 모아 「우산잡곡」에 담기로 했다.</p>
<p>1803년 가을을 맞아 드디어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는 탄생의 결실을 보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어보였다. 우산잡곡(牛山雜曲) 42수도 여기에 함께 실었다.</p>
<p>서문에서 담정은 ‘계해년(1803) 늦은 가을 한고(寒皐)의 한 유배객은 진해 우소헌(雨篠軒)에서 이 책을 쓴다’고 하면서 우해(牛海)는 진해의 별칭이며, 또 이어보(異魚譜)라 한 것은 ‘물고기라 할 수 없는 이상한 해산물과 셀 수 없는 수충(水蟲)들도 많아 그렇게 명명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 책은 정약전의 자산어보(1814)보다 11년 전에, 서유구의 난호어목지(1820년경)보다는 약 17년 앞서 저술되었다.</p>
<p>우해이어보에는 총 100여 종의 어종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서 특별히 관찰한 72개 어종에 대해서는 다시 이것을 어류 50, 갑각류 20, 수충 2종으로 분류하여 그의 생물적 특징과 어법, 유통문제에 관해서 어종마다 상세하게 다루었다.</p>
<p>담정은 어보의 저술 동기를 ‘지금까지 내가 이곳 진해에 와서 보고 듣고 느낀 점들이 많은데, 이런 것들을 모두 글로 적었으므로 훗날 성은(聖恩)을 입어 살아서 돌아갈 날이 오면 세상에 이것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고 적었다.</p>
<p>조선시대 유배객의 삶은 어디에서나 험난한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담정의 진해 유배생활은 그러한 고통을 창조적으로 승화시킨 소중한 기회였다. 그는 어보작성의 뜻을 ‘무료한 유배생활을 달래기 위해서 취미삼아 한 일이 아니었다’고 밝힌 바와 같이 적거지에서의 쓰라린 세월을 원망과 고독으로 허비하지 않고 오히려 실학의 가치를 이어가는 실천의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p>
<p>내용 가운데 대표적인 어종 몇 종을 들어 보기로 한다. 먼저 문절어(文節魚)에 대해서다. ‘문절어는 일명 수문(睡?)이라 하여 몸체는 투명하며 긴 턱살과 광대뼈가 나와 있는데, 물이 얕은 해변과 모래가 있는 곳에 많이 산다. 이것은 죽을 쑤어 먹을 수도 있고 회로 먹으면 그 맛이 더 좋다. 내가 조울증이 심해 셋집주인에게 부탁해 매일 죽으로, 또 회로 먹었더니 매우 효과가 있었다’라고 적고 있다.</p>
<p>‘개불’에 대한 흥미있는 내용도 있다. 그는 개불을 해음경(海陰莖)이라 이름 짓고, ‘이것은 마치 말(馬)의 음경과 비슷한데 머리와 꼬리가 없고 바다 밑 바위에 붙어살며 자르면 피가 난다. 이것을 깨끗이 말려서 부드럽게 빻은 가루를 젖(모유)에 섞어 음위에 바르면 금방 발기한다’고 했다. 서양에서는 이 해산물에 대해 페니스피시(penis-fish)라고 하는 이상한 이름을 붙이고 있거니와 생선횟집에서 사람들이 개불을 즐겨 찾는 이유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p>
<p>문어에 대해서는 고제(?蹄)라 이름 짓고, ‘고요한 밤 깊은 계곡 달빛이 고운데 이끼 낀 물가에 문어 그림자 어지럽다. 어촌 여인 정분난 땡중인 줄 알고 바쁘게 자리에서 일어나 사립문 열어주네’라 하여 달빛에 비친 문어의 모습을 마치 머리 벗은 산승에 비유한 풍자적인 설명도 덧붙이고 있다.</p>
<p>우해이어보는 조선 후기 한 지식인이 남긴 의식의 산물이다. 이러한 불후의 역작이 진해를 거쳐 간 한 유배객에 의해 이루어지고, 진동면 고현리는 그의 역사적 고장이었다는 것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p>
<p>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수산학서 「우해이어보」에 관한 연구와 평가는 지극히 미진한 형편이다. 오래전에 고 박구병교수(부경대학교)에 의해 그 내용이 간단히 소개되고, 최근 경성대학교 박준원 교수의 완역본(2004)이 여기에 관한 연구의 전부다. 자산어보는 여러 측면에서 연구되고 소설로도 쓰여지고 있다. 흑산도 사리(沙里)에 가면 정약전을 추억할 수 있는 ‘복성재’와 ‘자산문화회관’을 찾을 수 있고, 그에 관한 지식이 일반화되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p>
<p>지난 가을과 봄에 진해의 우산과 우해를 찾기 위해 진해시를 거쳐 진동면 고현리를 두 차례 방문했다. 아무래도 우산(牛山)이 위치하는 진동면 고현리와 담정과의 관계에 대한 확신을 떨칠 수 없었다. 진해의 다른 이름 우해(牛海)와 우산잡곡의 제자(題字), 우산(牛山)의 정확한 소재지를 밝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다.</p>
<p>현재 진해시와 창원군 진동면을 통틀어 우산(牛山)이라 이름 하는 산은 진동면 고현리의 우산 밖에 없다. 바로 고현리 뒷산의 이름이며, 그 아래의 바다 이름이 우해(牛海)이다. 우산에 올라 그 아래로 펼쳐진 해안과 섬들, 멀리 동남으로 터진 바다를 바라보면 그 옛날 머나먼 유배지에서 느꼈을 담정의 아픈 심정이 가슴에 와 닿는다.</p>
<p>책의 서문에서 그는 ‘내가 사는 집은 섬과 가까이 있고, 바다와 맞닿아 있어서 뱃사람들과 자주 만날 수 있었다’고 쓰고 있다. 우산잡곡에서는 해마다 거제도 사람들과 고성의 아낙네들이 포구로 배를 몰고 와 해산물과 생마(生麻)를 교환하는데, 이때 고현리 시장거리는 활기를 띤다고도 했다. 또, ‘양도의 여인들은 튼튼하며 연미정에는 거룻배가 많으나 파도가 높다’고도 했는데, 양도(羊島)는 현재의 고현리 바로 앞의 섬 이름이며 연미정은 고현리 앞 또 다른 섬 연도(燕島)를 가리킨다. 담정이 그린 다채로운 고현의 역사적 풍경이다.</p>
<p>200여 년 전 담정이 여기에 귀양 와서 기거하고 글을 썼다는 우소헌(雨篠軒)은 혹시 우산의 앞맏재 아래 바닷가 어디쯤에 있었던 초가집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고증을 거쳐 고현리 선창가에 ‘담정 김려의 행적비’같은 표지석 하나쯤 세워두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싶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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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진설명</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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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3202881_0.jpg" alt="img338.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진동면 고현리 전경.</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3207446_0.jpg" alt="img340.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담정 김려의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 1803).</p>2017-09-11T02:31:16.000Z2017-09-11T02:33:11.000Z관리*귀어 일기 “내 고향 바다만 한 곳이 없었지요”<p>귀어 일기</p>
<p><strong>“</strong><strong>내 고향 바다만 한</strong></p>
<p><strong>곳이 없었지요</strong><strong>”</strong></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2425441_0.jpg" alt="img316.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글 박성천 사진 최현배</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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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서울 제과업 접고 귀어한</strong></p>
<p><strong>마량항 어부 김성호 씨</strong></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2434306_0.jpg" alt="img318.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처음엔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바닷일</p>
<p>전복양식에 정성, 도시 직장인 수입보다 나아</p>
<p> </p>
<p>바다는 잠잠했다. 푸른 수면 위로 6월의 햇살이 쏟아져 내린다. 풍랑이 치지 않는 바다는 유순한 동물을 닮았다. 작업선의 기계 엔진소리가 평온한 바다 위로 흘렀다.</p>
<p>마량항 어부 김성호 씨(52)가 작업선의 엔진 레버를 당기자 크레인이 하늘로 솟는다. 끝에 달린 집게발처럼 생긴 갈퀴가 부드럽게 펼쳐진다. 햇볕을 받은 갈퀴가 날카롭게 빛난다.</p>
<p>김 씨가 다시 레버를 작동하자, 갈퀴가 서서히 둥그런 부표를 들어올리기 시작한다. 길이는 130m다. 어림잡아 100줄은 넘을 것 같다. 부표와 부표 사이에는 기다란 줄이 걸려 있다. 갈퀴가 부표를 끌어당기자 줄 사이에 달린 다시마 덩어리가 딸려 올라온다. 줄레줄레 딸려오는 다시마 줄기가 도르레에 감기기 전, 옆에 있던 외국인 어부(스리랑카)가 낫처럼 생긴 어구로 다시마 줄을 자른다.</p>
<p>“쓱쓱.” 작업선 아래로 뭉텅이채 다시마 줄기가 떨어진다. 젖은 옷가지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 같다. 다시마 향기가 작업선 안에 물큰하게 번져온다. 짙은 갈색의 다시마는 보기에도 풍성하고 싱싱하다. 대략 넓이가 30cm는 될 것 같다. 길이도 족히 2m가 넘어 보인다. 선미 쪽에는 작은 호스를 타고 연신 물이 흘러내린다. 다시마에 묻은 뻘이나 이물질을 씻어주기 위함인 듯 하다.</p>
<p>다시마를 채취하는 김 씨의 표정이 밝다. 잘 가꾼 다시마를 수확한다는 기쁨에 피곤한 기색도 찾을 수 없다. 채취한 다시마는 인근 전복 양식장으로 옮겨 먹이로 줄 예정이다.</p>
<p>“1줄에 130m 정도 되는데 보통 3~4t의 무게가 나갑니다. 전복의 먹이로 쓰는데 요놈들이 엄청 먹거든요. 12월에 종자를 줄에다 이식하면 한 5개월 정도 자랍니다. 보통 5월부터 수확해 전복 먹이로 줍니다. 그나마 직접 양식해 먹이로 쓰니까 감당하지, 만약 사료를 준다고 하면 수지는커녕 전복 양식 자체를 할 수 없을 겁니다.”</p>
<p>크레인 작업을 끝낸 김 씨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한다. 그 사이 외국인 어부는 작업선 아래 흩어진 부표를 정리한다. 쉬면서 하라고 김씨가 손짓을 한다.</p>
<p>“다시마 좋지요?”</p>
<p>“육지에서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 같아요.”</p>
<p>이편의 말에 김 씨는 ‘그럴 것이다’라며 고개를 끄덕인다.</p>
<p>“지금이 다시마를 수확하는 시기입니다. 7월에 들어서면 수온이 높아져 녹을 수 있거든요. 일부는 먹이로 주고 남은 것은 저장을 합니다.”</p>
<p>그가 다시 작업선 선실로 들어가 운전대를 잡는다. “전복 먹이를 주기 위해 인근 양식장에 가야 하거든요” 김 씨가 방향타를 조작하자 작업선이 부드럽게 수면 위로 미끄러져간다. 12t 작업선 ‘전복수산’이 서서히 출발하자, 김 씨가 갑자기 스마트폰을 펼친다.</p>
<p>“15개월 된 늦둥이 아들입니다. 귀엽지요?”</p>
<p>그가 보여주는 스마트폰 속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애가 빙긋이 웃고 있다. 김 씨가 바다에 나와서도 싱글벙글 웃으면서 일을 할 수 있는 힘의 근거였다. 그는 “물일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늦둥이 녀석 얼굴이 떠올라 웃을 때가 있다”며 “바다에 나오면 늘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고 덧붙였다.</p>
<p>바다는 대를 이은 생업의 터전</p>
<p>김 씨가 고향 마량으로 돌아온 계기는 여느 귀어인들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더 이상 도시에서 사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는 일상에 지쳐갔고 무엇보다 도시의 생리가 그의 성정에 맞지 않았다. 서울에서 제과업계 일을 하다 95년에 귀어를 했으니 족히 20년이 넘었다(고향으로 귀어를 하기 전 전북 지역에서 잠시 물김 관련 일도 했다).</p>
<p>“어렸을 때부터 워낙 바다를 좋아했습니다. 젊은 시절 객지 생활도 해봤지만 내 고향 바다만 한 곳은 없었지요. 다시 마량항으로 돌아와 뱃일을 시작하게 된 건 아버지가 일구었던 바다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에서였어요.”</p>
<p>김 씨에게선 오랫동안 뱃일을 해온 사람 특유의 느낌이 묻어났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까무잡잡한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만만치 않는 양식장 작업과 사시사철 불어오는 바닷바람, 따가운 햇살이 그를 건강한 뱃사람으로 만들었을 터였다.</p>
<p>마량에서 멀지 않은 신마(新馬) 마을이 고향인 그에게 마량항은 어린 시절 추억이 녹아 있는 놀이터이자 삶의 공간이었다. 김 씨의 부친은 90년대 중반 이곳에서 김 양식과 멸치잡이를 했었다. 성호 씨에게 마량항이 아버지의 바다이자 대를 이은 생업의 터전인 것은 그 같은 연유다.</p>
<p>부친은 그가 양식장을 한다고 했을 때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먼 바다에 나가 원양어업을 하는 것은 한사코 반대했다. 위험한 일인 데다 수개월 씩 아들 얼굴을 보지 못할 게 뻔했던 것이다.</p>
<p>“서울에서 제과 관련 일을 하면서는 스트레스가 심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 한켠에는 늘 아름다운 마량향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었죠. 타향살이가 힘들 때 고향을 떠올리는 건 인지상정이겠지만, 저 같은 경우엔 당시 아버지가 어장을 하고 있던 터라 더더욱 그 생각이 간절했습니다.”</p>
<p>고향으로 귀어를 결심했을 때 부친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주위 지인들로부터도 양식에 관해 귀동냥을 했다. 초기 자금이 한 2억 정도 들어갔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경험이 중요한 법이었다. 초창기에 물김 관련 일을 했다가 적잖은 낭패를 봤다. 양식에 관한 노하우도 없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기도 당했다.</p>
<p>그러나 주저앉아 있을 수 없었다. 바다는 모든 것을 다 받아주는 넉넉한 어머니의 품이자, 평생 자식을 위해 피땀으로 일군 아버지의 ‘농토’였다. 처음의 실패는 그에게 약이 되었고, 바다일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현실 인식도 갖게 했다.</p>
<p>어느새 작업선이 전복 양식장에 도착한다. 다시마 양식장으로부터 배로 5분여의 거리 정도 될 것 같다. 눈앞의 전복 양식장은 반듯한 바둑판을 펼쳐놓은 듯하다. 일정한 규격과 모양에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한편으로 이만한 양식장을 마련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을 노고 또한 짐작이 된다.</p>
<p>전복 1칸은 정사각형 크기로, 가로와 세로 크기가 각각 2m20cm다. 그의 양식장에는 모두 620개의 칸이 있다. 그는 “1칸마다 350~400만원 정도 소득을 올린다” 면서도 “그러나 1칸을 제작하는 데 대략 100만 원의 비용이 소요된다”고 말했다. 모두 600여 칸 정도 되니까 어구 제작비용만 해도 만만치 않다.</p>
<p>그가 크레인을 작동해 다시마 덩어리를 전복 칸으로 내려놓는다. 전복의 먹이 갉아먹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온다. 환청인지 소리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하다. 다시마를 건져올릴 때와는 또다른 소리가 주위에 퍼진다. 자동화시스템이 돼 있다보니 작업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p>
<p>“보통 새벽 5시를 전후해 바다에 나옵니다. 그리고 오후 2시부터 해질 때까지 작업을 하구요. 바다라는 게 물때와 날씨 영향을 받기 때문에 작업 시간이 일정치는 않지요.”</p>
<p>그는 “예전에는 와이프와 함께 일을 했지만 지금은 늦둥이도 있고 집안일 때문에 어렵다”며 “대신에 매주 마량항 놀토 시장이 열리면 ‘전복수산’ 상호를 걸고 전복을 판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p>
<p>양식으로 연간 5억 정도의 생산고를 올린다. 여기에서 투자비용, 인건비, 유류세 등 각종 비용을 제외하면 생각만큼 많지 않다. 물론 도시 직장생활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또한 12t 작업선 외에도 작은 어선 2척(2t, 7.9t)을 보유하고 있으니 웬만한 어부들보다는 형편이 나은 편이다.</p>
<p>현재 김 씨는 바다일 외에 다이빙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30년 가까이 해온 다이빙은 현재 해경 다이빙 자격증 평가 위원과 인명 구조와 관련한 활동을 할 만큼 경지에 올라 있다.</p>
<p>“구조와 관련한 강의 요청이 오면 돈을 받지 않고 강의를 해요. 제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성의껏 하는 거지요. 그러나 다이빙은 과욋일이고 본업은 전복 양식이라, 어떻게 하면 싱싱한 수산물을 많이 생산할 것인지 그 생각을 하게 됩니다.”</p>
<p>김 씨는 “전복은 아직까지는 완도산이 많이 알려졌지만 점차 입소문을 타고 강진 전복도 소비자들에게 어필하고 있다”며 “청정해역이라 폐사가 없고 맛이 좋아 한 번 찾은 사람은 다시 찾고 있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특히 “탐진강 등 아홉 개의 물줄기가 하나로 합수되는 구강포가 있어 영양분이 풍부하고 뒷맛이 달짝지근하다”고 설명했다.</p>
<p>마량항에는 김 씨 외에도 25어가 가량이 전복 양식을 하는 중이다. 해수면적이 좁아 양식장 허가가 많이 나지 않지만 미역과 김 관련 일을 하는 어가도 있다. 아름다운 항구 마량항 이면에는 이렇듯 치열한 생업의 현장이 자리하고 있다.</p>
<p>“객지를 돌아봤지만 내 고향 마량항만큼 아름답고 인심 좋은 곳은 없었습니다. 어촌어항 복합공간이 조성되고 소득증대 사업이 전개되면서 예전 못지않게 활기도 돌구요. 여기에 사시사철 싱싱한 해산물이 나오는 마량항은 미항(美港)이면서 미항(味港)이지요.”</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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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진설명</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2525916_0.jpg" alt="img332.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김성호 씨가 자신이 직접 양식한 전복을 펼쳐 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다. 김 씨는 “다시 마량항으로 돌아와 뱃일을 시작하게 된 건 아버지가 일구었던 바다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고 말한다.</p>
<p>작업선을 운행하고 있는 김성호 씨 모습.</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2501850_0.jpg" alt="img324.jpg 이미지입니다." width="66%"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2515243_0.jpg" alt="img326.jpg 이미지입니다." width="34%" /></p>
<p>전복 먹이인 다시마를 기중기를 이용해 양식장에 투하하고 있는 모습(왼쪽), 다시마를 기중기로 들어 올리는 장면.</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2452811_0.jpg" alt="img322.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전복 먹이를 주기 위해 직접 손으로 다시마를 고르는 모습. 기계로 할 수 없는 작업은 손으로 해야 한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2520741_0.jpg" alt="img330.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작업을 마치고 포즈를 취한 김 씨. 그는 “젊은 시절 객지에 나가 다른 일도 했지만, 내 고향만큼 아름답고 인심 좋은 곳은 없다”며 웃는다.</p>
<p> </p>
<p> </p>2017-09-11T02:26:33.000Z2017-09-11T02:29:29.000Z관리*바다를 담은 시<p> </p>
<p>바다를 담은 시</p>
<p> </p>
<p>어민 후계자 함현수</p>
<p>함민복</p>
<p> </p>
<p>형님 내가 고기 잡는 것도 시로 한번 써 보시겨</p>
<p>콤바인 타고 안개 속 달려가 숭어 잡아 오는 얘기</p>
<p>재미있지 않으시껴 형님도 내가 태워 주지 않았으껴</p>
<p>그러나저러나 그물에 고기가 들지 않아 큰일 났시다</p>
<p>조금때 어부네 개새끼 살 빠지듯 해마다 잡히는</p>
<p>고기 수가 쭉쭉 빠지니 정말 큰일 났시다 복사꽃 필 때가</p>
<p>숭어는 제철인데 맛 좋고 가격 좋아 상품도 되고…</p>
<p>옛날에 아버지는 숭어가 많이 잡혀</p>
<p>일꾼 얻어 밤새 지게로 져 날랐다는데 아무 물때나</p>
<p>물이 빠져 그물만 나면 고기가 멍석처럼 많이 잡혀</p>
<p>질 수 있는 데까지 아주, 한 지게 잔뜩 짊어지고</p>
<p>나오다 보면 힘이 들어 쉬면서 비늘 벗겨진 놈</p>
<p>먼저 버리고 또 힘이 들면 물 한 모금 마시면서</p>
<p>참숭어만 냉겨 놓고 언지, 형님도 가숭어 알지 아느시껴</p>
<p>언지는 버리고 그래도 힘이 들면 중뻘에 지게 받쳐 놓고</p>
<p>죽을 것 같은 놈 골라 버리고 그렇게 푸덕푸덕 대는</p>
<p>숭어를 지고 뻘길 십 리 길 걸어나와</p>
<p>온몸이 땀범벅이 된 채 곶뿌리 끝에 서서</p>
<p>담배 한 대 물고 걸어 나온 길 쳐다보면서</p>
<p>더 지고 나오지 못한 걸 후회도 했다는데</p>
<p>뻘길 십 리 길 가물가물 멀기는 멀지 아느껴 힘들더라도</p>
<p>나도 그렇게 숭어 타작 좀 한번 해 보았으면 좋겠시다</p>
<p> </p>
<p>현수 씨 콤바인 타고 들어가 고기 싣고 나오는 얘기는</p>
<p>여차리 일부 뻘 얘기지만 뻘이 딱딱해진다는</p>
<p>너무 슬픈 얘기라 함부로 글을 쓸 수 없고</p>
<p>아버지 얘기는 그냥 시인데 뭘 제목만</p>
<p>‘인생’이라고 붙이면 되지 않겠어</p>
<p> </p>
<p>형님, 한잔 드시겨</p>
<p> </p>
<p><br /> 『말랑말랑한 힘』, 문학세계사, 2012</p>
<p> </p>
<p>-----</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1711964_0.jpg" alt="img308.jpg 이미지입니다." width="442" height="442" /></p>
<p>‘어민 후계자 함현수’의 입심이 어찌나 싱싱한지</p>
<p>숭어가 펄떡거리는 게 다 보이는 것 같습니다</p>
<p> </p>
<p>글 손택수(시인)</p>
<p> </p>
<p>숭어를 잡는 이야기입니다. 숭어는 그 이름이 백 가지도 넘는다고 합니다. 영산강변의 명산에서는 성장과정에 따라 ‘모쟁이→모치→무글모치→댕기리→목시락→숭어’라고 부른답니다. 지역마다 조금씩 뉘앙스의 차이가 있을 것을 생각하면 더 많은 이름들을 호명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바다는 이와 같이 사전에는 등재되지 않았으나 틀림없이 존재하는 모국어들의 든든한 후견인입니다. 바다야말로 살아있는 사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 속에는 특히 삶의 구체적 현장 속에서 생명력을 뿜어내는 방언들의 활달한 힘이 있습니다.</p>
<p>이 시에서도 방언을 읽는 맛이 어지간합니다. 시의 육성을 직접 듣고 있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은 방언 없이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써보시겨’, ‘않았으껴’ 하고 끝을 살짝 말아 올리는 이 감칠맛 나는 방언은 강화도의 특산품입니다. 그러고 보니 방언에 짭조름한 서해 갯내음이 묻어 있는 것도 같습니다.</p>
<p>‘어민 후계자 함현수’의 입심이 어찌나 싱싱한지 숭어가 펄떡거리는 게 다 보이는 것 같습니다. 숭어가 얼마나 많았으면 콩 타작을 하듯 지게로 숭어를 타작했을까요. 지게에 한가득 숭어를 짊어지고 뻘길을 걸어오는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서, 바다는 힘든 삶의 현장이기도 하면서 생명감에 넘치는 무대이기도 합니다.</p>
<p>시인은 그와 같은 뻘이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는 것을 근심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콤바인을 타고 고기를 싣고 올 수 있을 정도라면, 과연 뻘이 얼마만큼 굳어버렸다는 말일까요. 바다도 간경화 같은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랫동안 살았던 도시를 떠나 강화도에서 가난한 어부로 산 경험이 있는 시인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갯벌의 힘은 말랑말랑한 데 있지요. 문명화란 땅속의 시멘트를 꺼내서 수직을 만드는 딱딱한 쪽으로 편향돼 있습니다. 갯벌은 부드러운 수평을 유지합니다.”</p>
<p>시인의 말처럼 바다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를 가르쳐 줍니다. 바다에서 수평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끝없이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는 “바다, 거듭 태어나는 바다”라고 했습니다. 그 많던 숭어를 지게 가득 싣고 오던 바다가 그립습니다.</p>
<p> </p>
<p>-----</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1720097_0.jpg" alt="img312.jpg 이미지입니다." width="116" height="155" />손택수</p>
<p>전남 담양 출신으로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로 등단했다. 경남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실천문학사 대표를 역임했다. 신동엽창작상, 올해의 젊은예술가상, 이수문학상, 노작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나의 첫 소년』,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등의 작품집을 펴냈다.</p>
<p> </p>2017-09-11T02:17:58.000Z2017-09-11T02:18:33.000Z관리*강제윤의 섬과 삶 옛 영화 쓸쓸하지만 그 섬에 가야 할 이유, 충분하고도 남는다 덕적도<p>강제윤의 섬과 삶</p>
<p> </p>
<p>옛 영화 쓸쓸하지만</p>
<p>그 섬에 가야 할 이유,</p>
<p>충분하고도 남는다</p>
<p> </p>
<p><strong>덕적도</strong></p>
<p>글·사진 강제윤(시인, 섬연구소 소장)</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1305719_0.jpg" alt="img294.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택리지가 선경으로 손꼽은 섬</p>
<p> </p>
<p>통로인 동시에 단절이기도 한 바다. 먹이를 주는 자상한 어미 같던 바다가 어느 날은 또 성난 악귀처럼 돌변해 목숨을 위협하기도 한다. 변덕 심한 바다에 기대 살다보니 섬사람들은 누구보다 예민한 촉각을 지니도록 진화했다. 섬에서는 날씨가 생사를 가르는 판관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섬사람들이 저마다 자신만의 기상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섬사람들의 기상대는 자신의 감각 안에 있다.</p>
<p>스스로가 기상 대장인 섬사람들. 그들의 관측은 틀림이 없다. 봄에 서남풍이 불면 반드시 비가 왔다. 안개 낀 날 멀리서 기관 소리가 나는데 배가 보이지 않아도 비가 왔다. 먼 산이 가깝게 보이면 비가 왔다. 낙조 때 서쪽 바다가 붉게 물들면 비가 왔다. 능구렁이가 울면 비가 왔다. 쌍무지개가 떠도 비가 왔다. 머리가 가려워도 비가 왔다.</p>
<p>비가 오려는가. 오늘은 또 머리가 가렵다. 1시간의 항해 끝에 인천 연안부두를 출항한 여객선이 잠시 소야도에 기항했다가 덕적도 도우 선착장으로 입항한다. 덕적도는 면적 20.87㎢에 1500여 명이 사는 여의도의 4.5배쯤 되는 큰 섬이다. 한국전쟁 후 한때는 피난민까지 포함해 2만여 명이나 살았던 적도 있다. 덕적도는 과거 덕물도, 득물도, 인물도, 수심도 등 여러 이름으로도 불렸다. 서남해의 많은 섬들이 그렇듯이 덕적도에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의 영토였다가 신라와 고구려에게 번갈아 점령당했던 경계의 땅이었다. 하지만 고려 말부터 조선 중기까지는 섬을 비우는 공도(空島) 정책으로 인해 사람의 거주가 금지 됐고 그로 인해 오랜 세월 이어져온 섬의 역사가 단절되고 말았다. 섬에 다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부터다.</p>
<p>덕적도를 모섬으로 하는 덕적군도(群島)는 고대 황해 횡단 항로의 길목이기도 했다. 당나라의 백제 침략 때는 덕적군도가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서기 660년, 수륙 13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백제 침략에 나선 소정방은 덕적군도를 군대의 주둔지 겸 군수품 보급기지로 활용했다. 덕적도 바로 옆 소야도에는 당나라군의 진지로 추정되는 유적들이 남아 있다. 당나라 침략자들은 덕적도에 주둔 했다가 기벌포로 상륙해 신라와 협공으로 백제를 멸망시켰다.</p>
<p>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지리서인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당나라 군대 이야기가 나온다.</p>
<p> </p>
<p>“덕적도는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할 때 군사를 주둔시켰던 곳이다. 뒤에 있는 3개의 돌 봉우리는 하늘에 꽂힌 듯하다. 여러 산기슭이 빙 둘러 쌌고 안쪽은 두 갈래진 항구로 되어 있는데 물이 얕아도 배를 댈 만하다. 나는 듯한 샘물이 높은 데서 쏟아져 내리고 평평한 냇물이 둘렸으며 층 바위와 반석이 굽이굽이 맑고 기이하다. 매년 봄과 여름이면 진달래와 철쭉꽃이 산에 가득 피어 골과 구렁 사이가 붉은 비단 같다. 바닷가는 모두 흰 모래밭이고 가끔 해당화가 모래를 뚫고 올라와 빨갛게 핀다. 비록 바다 가운데 있는 섬이라도 참으로 선경이다. 주민들은 모두 고기를 잡고 해초를 뜯어 부유한 자가 많다.” - 이중환 ‘택리지’</p>
<p> </p>
<p><택리지>에 언급한 것처럼 덕적도는 아직도 선경처럼 아름답다. 그래서 덕적도는 한 시절 수도권 사람들의 피서지로 각광을 받은 적이 있다. 해수욕장과 송림이 아름다운 서포리 해변에는 대형 숙박업소로 쓰다가 지금은 폐가가 돼버린 건물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나이트클럽 간판 건물까지 있으니 한때 얼마나 융성했던지를 짐작할 수 있다. 덕적도에는 서포리, 밧지름, 자갈 마당 등 해수욕하기 좋은 해변이 여럿이지만 최고의 해수욕장은 서포리 해변이다. 길이 2㎞, 폭 500m의 서포리 해변은 경사가 거의 없어서 아이들에게도 안전한 해수욕장이었다. 그래서 1977년 국민관광지로까지 지정됐고 여름이면 수도권 인근 피서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피서철이 아니라도 관광객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하지만 덕적도 인근 섬들과 해역에서 모래 채취가 계속되면서 해변의 모래는 점점 줄어들고 송림의 소나무들도 뿌리가 보일정도로 망가져 갔다. 거기다 교통이 좋아지고 갈 곳이 많아지면서 덕적도는 자연스럽게 퇴락하고 잊혀진 섬이 돼버렸다.</p>
<p>걷기 열풍이 몰아친 후 요즈음은 다시 트레킹객들이나 등산객들이 덕적도를 많이 찾고 있지만 서포리 해변은 피서철을 제외하면 여전히 한적하다. 서해 섬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서포리 홍송 숲은 덕적도가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이 솔숲들을 거닐며 솔숲 아래 고운 백사장에서 늘어지게 쉬었다 가면 더없이 좋다. 덕적도의 소나무와 물과, 모래는 덕적도의 삼보로 꼽히는데 특히 진리 덕적초등학교 옆의 송림과 함께 서포리의 홍송 숲은 덕적도의 가장 큰 보물이다. 이 솔숲만으로도 덕적도에 가야할 이유는 충분하고 남는다.</p>
<p>서해의 어업 전진 기지였던 덕적도 바다는 한때 최고의 민어 어장으로 꼽혔다. 그래서 도우 선착장에는 민어 어부상이 서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해마다 6, 7월 민어철이면 덕적도 북리항에는 파시가 서고 수백 척의 어선들이 몰려들고 술을 파는 색시집만 수십 곳이 생길 정도로 융성했다. 예로부터 이름난 민어어장은 신안의 태이도(타리도)와 재원도, 인천의 덕적도, 평안도 신도 바다였다. 한국 바다에 사는 민어는 가을이면 제주도 근해로 이동하여 월동하고, 봄이면 북쪽으로 돌아와 생활했다. 여름철 덕적도 근해는 민어의 산란장이었다. <동국여지승람>에도 덕적도의 특산물로 거론될 정도로 민어는 덕적도 바다의 대표적 어종이었다.</p>
<p>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는 복달임에 민어탕은 일품, 도미찜은 이품, 보신탕은 하품으로 칠 정도로 민어가 귀한 대접을 받았다. 서울, 경기지방에서는 복날 민어탕으로 복달임을 했던 전통이 있었다. 민어 중에서도 산란기인 여름에 잡히는 것이 가장 기름지고 맛있다. 그 귀하고 맛있는 민어가 잡히는 어장이 덕적도였으니 어민들은 민어잡이로 큰 돈을 벌었고 자식 교육에 대한 열정도 높았다. 그래서 “덕적 가서 글 자랑 하지 마라”는 말까지 생겼다. 1930년대에는 덕적도 출신의 일본 유학생이 20여 명이나 됐다. 덕적도 선주가 돈을 가마니로 담아 보관했다거나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이야기들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어떤 민어잡이 배 선주는 큰돈을 벌어 인천 시내의 극장을 샀다가 노름으로 하룻밤 만에 극장을 잃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도 있다.</p>
<p>그 영화롭던 시절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능동 자갈마당 해수욕장 가는 길의 북리다. 덕적도에서는 쑥개라고 부르는 북리 마을. 이 마을에는 섬에서는 드물게 기와를 올린 2층 집들이 더러 남아 있는데 모두 과거 민어잡이 배 선주들이 살던 집이다. 지금은 이 집들도 대부분 폐가가 됐다. 당시 선주는 이층 누각에 앉아서 자신의 어선이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다가 만선기가 올라간 것을 보면 서둘러 잔치를 준비하도록 시켰다. 옛 선주집 2층 누각에 올라보니 만선기를 높이 달고 당당하게 귀항하던 민어잡이 배의 북소리가 아직도 쟁쟁하게 들리는 듯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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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
<p>사진설명</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1310639_0.jpg" alt="img298.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덕적도의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선경처럼 아득하고 아련하다.</p>
<p>한 시절 어업 전진 기지로, 국민 관광지로 흥청이던 덕적도가 이제는 한적하지만 휴식을 주는 섬이 되었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1317017_0.jpg" alt="img300.jpg 이미지입니다." width="45%"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1321579_0.jpg" alt="img302.jpg 이미지입니다." width="45%" /></p>
<p> </p>
<p>덕적도 선창가에 노점이 섰다. 섬 주민들은 산과 들에서 수확한 것들을 관광객들에게 판매한다.(왼쪽)</p>
<p>서포리 해변의 밤. 한 시절 인파로 북적이던 서포리 해변은 이제 더없이 한가롭고 평화롭다.</p>
<p> </p>
<p>-----</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1326321_0.jpg" alt="img304.jpg 이미지입니다." width="116" height="148" />강제윤</p>
<p>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을 걷다』 『당신에게 섬』 『섬 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등의 저서가 있다.</p>
<p>페이스북 <a href="https://www.facebook.com/jeyoon.kang.7">https://www.facebook.com/jeyoon.kang.7</a></p>
<p> </p>2017-09-11T02:15:14.000Z2017-09-11T02:16:52.000Z관리*세계의 섬 버려진 섬의 화려한 부활 예술 프로젝트로 아름다운 변신 일본 시코쿠 나오시마<p>세계의 섬</p>
<p>버려진 섬의 화려한 부활</p>
<p>예술 프로젝트로 아름다운 변신</p>
<p> </p>
<p><strong>일본 시코쿠 나오시마</strong></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0216926_0.jpg" alt="img264.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글·사진 노중훈(여행 칼럼니스트)</p>
<p> </p>
<p>시코쿠 가가와 현의 다카마쓰 항을 떠난 페리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슬렁슬렁 바람과 파도를 가르며 나아가기를 50여 분. 목적지 나오시마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세토내해에 떠 있는, 인구 4000명이 채 안 되는 작은 섬 나오시마. 하지만 몸집보다 훨씬 큰 예술적 함의를 품고 있으며, 안도 다다오의 건축 철학이 녹아 있는 그 섬이다.</p>
<p>섬에 원래부터 자리를 틀고 있었던 것은 예술이 아니라 구리 제련소였다. 용광로 속에서 구리가 녹은 물이 쉴 새 없이 부글부글 끓는 동안 섬은 공해로 점점 망가졌고, 주민들은 하나둘씩 섬을 떠나갔다. 거칠고 피폐해진 나오시마의 환골탈태는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일본의 출판 교육 그룹인 베네세가 섬의 절반가량을 사들이면서 비롯됐다. 섬의 미래에 대해 인식을 함께한 베네세의 소유주 후쿠다케 소이치 회장과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팔을 걷어붙였다. 결과부터 내밀자면 죽다가 살아난 나오시마는 이제 한 해 수십만 명의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시코쿠의 명소로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p>
<p> </p>
<p>섬 전체가 예술 공간으로</p>
<p>나오시마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일은 여러 갈래로 진행됐다. 구사마 야요이의 <펌프킨>을 비롯해 섬 여기저기에 현대미술 거장들의 작품이 하나둘씩 놓이기 시작했다. 버려진 건물을 미술 작품으로 바꾸는 이른바 ‘이에(家) 프로젝트’도 가동됐다. 1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세상의 적막을 경험하던 빈집과 사찰과 소금 창고 등이 현대미술에 힘입어 갱생의 길을 걷게 됐다. 신사의 내부는 제임스 터렐에 의해 빛과 어둠의 공간으로 거듭났고, 물이 채워진 여염집 마루는 몽환의 전시장으로 변모했으며, 폐가는 콜라주 작품으로 얼굴을 달리하기에 이르렀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를 맡았으며 12년의 시차를 두고 개관한 베네세 하우스와 지중미술관은 나오시마 부활 프로젝트의 화룡점정이었다. 더욱 하뭇한 것은 나오시마 프로젝트가 예술가들이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는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마을 주민들과의 협업에서 큰 동력을 얻고 있다는 사실이다.</p>
<p>나오시마 곳곳을 소요하며 안도 다다오에 한 발 더 다가섰다. 다소곳한 분위기의 해변에 자리한 베네세 하우스에는 미술관 같은 호텔과 호텔 같은 미술관이 어우러져 있었다. 미술관은 1960년대 후반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전위미술 운동인 아르테 포베라의 창시자인 야니스 쿠넬리스, 미국의 개념 미술가 브루스 나우먼, 1960년대 영국 팝아트의 기수 데이비드 호크니, 영국 전위미술의 대표 선수 리처드 롱, 미국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 등의 작품을 붙들고 있다. 대가들의 작품은 미술관 안팎을 자유자재로 드나든다. 프랑스의 페미니즘 미술가 니키 드 생팔의 조각품, 여러 장르를 오가는 팔방미인 댄 그레이엄의 미니멀한 설치 작품, 영국 더 타임스에 의해 가장 위대한 200명의 예술가에 선정된 스기모토 히로시의 사진 작품 등이 야외 공간에 산재한다. 나오시마에서는 미술관 바깥도 여전히 미술관이다.</p>
<p>지중(地中)은 땅을 뚫고 들어갔을 때의 그 속을 의미한다. 지중미술관은 ‘지중’이라는 단어의 뜻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미술관은 땅 위로 솟지 않고 땅 밑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니 밖에서는 미술관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없다. 자신을 낮추니 자연을 더욱 풍성하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일설에 따르면 안도 다다오는 인도의 아잔타 석굴, 중국 둔황의 막고굴, 터키 카파도키아의 동굴 주택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미술관은 관람객을 내려다보지 않고 낮은 자세로 맞아들였다. 타박타박 걸어서 내려간 지중미술관에는 안도 다다오의 건축 미학이 고스란했다. 그는 단순과 절제를 금과옥조로 여긴다. 그의 건축물들은 자꾸 무언가를 덧칠하는 덧셈이 아니라 거추장스러운 것을 최대한 배제하는 뺄셈의 결과물이다. 복잡한 장식은 그의 관심사가 아닌 것이다. 벽과 바닥과 천장에 외장재 없이 콘크리트 벽을 그대로 드러내는 노출 콘크리트 기법을 즐겨 사용하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그는 강철, 유리, 콘크리트와 같은 현대건축의 대표적인 재료들을 이용하되 자신의 철학과 방식대로 소화해낸다.</p>
<p>안도 다다오는 또 인공과 자연의 조화에 천착한다. 건물 안에 햇살과 물과 바람을 끌어들이거나 건물을 바깥의 자연을 향해 열어젖히는 방식으로 자신의 고집을 실천한다. 특히 건축물에 천연의 빛이 배어드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빛을 무턱대고 채집하는 것은 아니고 여기에도 차단과 절제의 기제를 작동시킨다. 어쨌든 자연광이 스며든 공간은 전과 다른 활기와 풍부한 질감을 얻는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빛의 교회>가 적절한 예다. 안도 다다오는 폭 6m, 길이 18m의 거대하면서도 단순한 콘크리트 상자의 한쪽 벽에 십자가 모양의 틈새를 만들어놓았다. 이 틈을 통해 빛의 알갱이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건축물이 지닌 텍스트는 훨씬 풍요로워졌다. 그 자신도 “이 안에 유럽 로마네스크 수도원의 작은 예배당이 지닌 아름다움이 들어 있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p>
<p>백 년을 들여 가꾼 정원</p>
<p>나오시마, 그리고 안도 다다오와 작별하고 시코쿠의 또 다른 예술을 찾아 나섰다. 히가시야마 가이이 세토우치 미술관은 우리에게는 아직 서먹하지만 일본에서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히가시야마 가이이 화백의 작품을 기증받아 운영하는 곳이다. 그는 풍경화만을 오로지하는 사람이다. 한지와 비슷한 일본 종이 화지에 다채로운 색상의 돌을 가루로 만들어 채색하는 전통 화법을 구사한다. 미술관에서 대면한 그의 산수화는 조용하고 부드러웠으며, 세상일에 달관한 사람의 평온함마저 느껴졌다. 푸른 계통의 그림들이 유독 많았는데, 히가시야마의 푸른빛에서는 따뜻한 물 냄새가 났다. 통유리를 통해 세토대교를 바라보며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카페는 미술관에 낭만적인 분위기를 드리운다.</p>
<p>이른 아침 다카마쓰 시내의 리쓰린 공원을 찾았다. 정원 내 찻집에 들러 연못의 정취를 감상하며 일본식 죽으로 아침 식사를 대신했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영주들이 증축을 거듭했다는 리쓰린은 일본의 국보급 정원이라는 세간의 평을 입증했다. 300살이 넘은 1400여 그루의 노송과 6개의 연못, 그리고 13개의 작은 인공 산이 ‘자줏빛 구름’이라는 뜻을 지닌 시운산과 더불어 절정의 풍경을 과시했다. 오래된 나무의 가지들은 기묘한 형상으로 휘어지고 구부러져 마치 추상화를 연상케 했다. 전체를 돌아보려면 2시간이 걸리는 공원의 규모도 대단했다. 리쓰린은 정원의 예술, 예술의 정원을 실감나게 해주는 좋은 본보기였다.</p>
<p>도쿠시마 현에 있는 오쓰카 국제 미술관은 합법적인 복제 미술의 총본산이다. 고대 벽화에서 현대 회화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지의 미술관에 소장된 1000여 점의 작품을 도기(세라믹) 타일 위에 실물 크기로 모사해놓았다. 색깔과 모양은 당연하고 흠집과 낙서까지 본디의 것과 똑같이 만들었다. 400억 엔에 이르는 건축비 가운데 3분의 2가 작품 저작권료에 쓰였다고 한다. 일본은 모방에 있어서도 장인정신을 발휘했다. 에히메 현의 타월 미술관은 이색적이다. 크고 작은 타월에 새겨진 그림들과 솜으로 만들어진 모형들이 눈길을 끈다. 작품들은 생각보다 훨씬 정교했고, 짐작보다 훨씬 다채로웠다. 예술의 붙임성이 도드라져 보였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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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Travel Information</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0245519_0.jpg" alt="img280.jpg 이미지입니다." width="279" height="204"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0249826_0.jpg" alt="img282.jpg 이미지입니다." width="279" height="204" /> </p>
<p>볼거리</p>
<p>다카마쓰의 시코쿠무라는 시코쿠 각 지역에 남아 있는 에도~메이지 시대의 민가를 자연 속에 복원한 야외 박물관이다. 마쓰야마의 작은 섬에 있던 등대도 이곳으로 옮겼다. 에히메 현의 도고온천은 온천의 나라 일본에서도 가장 오래된 온천으로 무려 30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1894년에 지어진 목조로 된 대중목욕탕은 국가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일본의 국민 소설 <봇짱>의 주요 무대이기도 하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0253554_0.jpg" alt="img284.jpg 이미지입니다." width="279" height="204"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0257594_0.jpg" alt="img286.jpg 이미지입니다." width="279" height="204" /></p>
<p>음식</p>
<p>가가와 현은 오래 전부터 사누키 우동으로 유명하다. 사누키는 가가와 현의 옛 이름. 오직 사누키 우동의 차진 면발을 맛보기 위해 가가와 현을 찾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현의 대표 도시인 다카마쓰를 중심으로 900여 개의 우동집들이 몰려 있다. 다카마쓰는 생선 요리도 빼어나다. 세토내해의 빠른 물살 때문에 육질이 쫀쫀하다. 특히 도미회의 인기가 좋다. 손님 테이블에 오르기 바로 직전 칼질을 하기 때문에 회를 먹을 때 물고기가 비명을 지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신선하다. 조림과 구이를 주문해도 만족스럽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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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진설명</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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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한때 외면 받던 섬에서 예술의 섬으로 거듭난 나오시마.</p>
<p>©Benesse Art Site Naoshima</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0222537_0.jpg" alt="img266.jpg 이미지입니다." width="461" height="508" /></p>
<p>나오시마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쿠사마 야오이의 <펌프킨>.</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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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0226925_0.jpg" alt="img270.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0231107_0.jpg" alt="img272.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입구를 통해 땅 밑으로 내려가게 되는 지중미술관.(위) 안도 다다오 특유의 공간 활용을 잘 보여주는 베네세 하우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0236796_0.jpg" alt="img274.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고기잡이 배들이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는 미야노무라 포구.</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0307376_0.jpg" alt="img290.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국보급 정원’을 보유한 리쓰린 공원.</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0241104_0.jpg" alt="img278.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베네세 하우스 라운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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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10303144_0.jpg" alt="img288.jpg 이미지입니다." width="116" height="155" />노중훈</p>
<p>한국외국어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졸업. 여행신문 취재부 기자를 거쳐 2001년부터 프리랜서 여행작가로 활동. 지금까지 63개국 500여 도시 여행. 다양한 잡지, 사보 등에 여행 과 사 진 기고. mbc 라디오 ‘여행의 맛’과 ‘꿈꾸는 라디오’ 출연.</p>2017-09-11T02:02:15.000Z2017-09-11T02:07:15.000Z관리*특별한 바다 여행 바다로 가자 공룡 만나러<p>특별한 바다 여행</p>
<p><strong>바다로 가자</strong></p>
<p><strong>공룡 만나러</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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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신안 압해도, 보성 득량면 공룡알 발굴지</p>
<p>여수 사도 등 바닷가 공룡 발자국 유적 찾아</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4935689_0.jpg" alt="img254.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글 송기동</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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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아주 옛날에는 사람이 안 살았다는데/ 그럼 무엇이 살고 있었을까/ 땅속을 뒤져보면 화석이 많이 나오는데/ 아주 이상한 것만 있다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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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김창완·최성수·임지훈 등 8명으로 결성된 그룹 ‘꾸러기들’이 지난 1985년에 부른 ‘아주 옛날에는 사람이 안 살았다는데’는 공룡이 헤엄치고, 익룡이 날아다니는 아주 먼 옛날을 상상하게 하는 유쾌한 가요다.</p>
<p>공룡이 살던 ‘아주 먼 옛날’은 언제쯤일까? 지금으로부터 2억4500만 년 전~6500만 년 전 지질시대인 중생대이다. 지구 역사는 생물계의 변화를 기준으로 삼아 크게 지질학적으로 선캄브리아대-고생대-중생대-신생대로 구분된다. 대(era)는 다시 기(period)와 세(epoch)로 세분된다. 지금 우리는 신생대 4기 ‘충적세’(홀로세)에 살고 있다. 일부에서는 ‘충적세’대신 원자폭탄을 터뜨린 1945년 7월을 기점으로 ‘인류세’로 부르자는 주장을 펼쳐 눈길을 끌고 있다.</p>
<p>공룡은 중생대 쥐라기와 백악기 1억6000만 년 동안 지구를 지배했다. 백악기 말에 갑작스럽게 공룡이 멸종한 까닭은 소행성 충돌이나 화산 폭발과 같은 급격한 환경변화 때문으로 추정된다.</p>
<p>우리나라에서도 많은 공룡 뼈와 희귀한 알 화석, 발자국 화석(보행렬)이 발굴됐다. 공룡 전신 뼈가 발굴된 사례는 없고 갈비뼈와 어깨뼈, 턱뼈, 대퇴골 등 일부분만 발굴된 경우가 많다. 신안 압해도와 보성군 득량면 비봉리에서는 공룡알이 발굴돼 화제가 됐다.</p>
<p>특히 경남 고성과 해남 황산면 우항리, 여수시 화정면 낭도리(사도·추도·낭도) 등지에서 발굴된 많은 공룡 발자국 화석(보행렬)은 당시의 기후상과 공룡의 생활 습관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됐다. 공룡 뼈 화석이 죽은 공룡의 존재를 알린다면 공룡 발자국 화석은 살아있는 공룡의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굴되거나 자연적으로 노출된 공룡 발자국은 1만 개가 넘는다고 한다.</p>
<p>공룡 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곳은 주로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다. 이처럼 공룡 발자국화석 산출지가 대부분 바닷가에 자리한 까닭은 뭘까? 화석화 과정은 주로 강이나 호수 근처, 바닷가 등 퇴적 작용이 이뤄지는 장소에서만 이뤄지기 때문이다. 중생대 쥐라기와 백악기 때는 지금과 같은 황해와 동해가 없었다. 당시는 한반도와 중국, 일본이 뭍으로 이어져 있었다. 공룡 발자국이 발굴된 곳은 공룡 시대에 큼지막한 내륙호수가 있었음을 시사한다.</p>
<p>허민 전남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한국공룡연구센터 소장)는 지난해 10월 펴낸 ‘공룡의 나라 한반도’에서 당시 우리나라 남해안 지역을 “공룡들의 무도장”이라고 표현하며 이렇게 설명한다.</p>
<p>“… 어느정도 단단해진 갯벌에 남겨진 발자국도 바로 바닷물이 들어오면 금방 지워진다. 따라서 굳어진 갯벌위에 발자국이 만들어진 후 오랫동안 바닷물의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발자국 퇴적층 위를 모래나 성분이 다른 갯벌들이 채우고, 상부 압력으로 인해 아래 발자국 퇴적층이 머금고 있던 수분들이 빠지면 비로소 발자국을 함유한 퇴적층이 보존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룡 발자국 화석들이 수많은 지각변동에도 불구하고 무려 1억 년 이상 우리 땅에 보존되어 있다.”</p>
<p>여수 낭도리 추도에서 발견된 84m 길이의 보행렬은 물을 먹기 위해 호숫가를 어슬렁거린 조각류(두 다리로 걷는 초식공룡) 공룡의 흔적이다. 해남 우항리에서는 초대형 초식공룡 발자국 109개가 발굴됐다. 화순 공룡발자국 화석지에서는 1500여개 공룡 발자국 가운데 수각류(육식공룡) 발자국이 88%를 차지했다.</p>
<p>여름 휴가철을 맞아 경남 고성과 해남 우항리 바닷가를 거닐며 중생대 백악기 때 공룡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올 여름 여행은 즐거울 듯싶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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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진설명</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4947266_0.jpg" alt="img258.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공룡의 섬’으로 유명한 여수시 화정면 사도 해안가에 자리한 얼굴바위. 사도는 84m 길이 보행렬 등 7000만 년 전 살던 공룡의 다양한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사도 공룡발자국과 퇴적층은 지난 2003년 2월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p>
<p>©노중훈</p>
<p>? 건물벽을 박차고 나오는 공룡을 형상화한 해남 우항리 공룡박물관. ©박성배</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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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4942962_0.jpg" alt="img256.jpg 이미지입니다." width="48%" />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4951603_0.jpg" alt="img260.jpg 이미지입니다." width="48%" /></p>
<p>? 바위에 선명하게 찍힌 공룡 발자국.</p>
<p>? 여수시 화정면 사도 선착장에 세워진 실물크기의 티라노사우르스 모형.</p>2017-09-11T01:49:41.000Z2017-09-11T01:53:36.000Z관리*수백 년 해송, 탁 트인 바다 ‘청량 힐링’ 금오도 비렁길<p>걷고 싶은 바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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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수백 년 해송, 탁 트인 바다 ‘청량 힐링’</p>
<p>금오도 비렁길</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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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나라 나무 키우던 봉산의 역사,</p>
<p>5코스 제각각 특별한 매력</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4326528_0.jpg" alt="img250.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글 송기동 사진 최현배</p>
<p>여수시 돌산도 남쪽 바다에는 30여 개의 섬들이 모여 있다. 화태도, 월호도, 나발도, 대두라도, 소두라도, 대횡간도, 소횡간도, 금오도, 안도, 연도…. 이를 통칭해서 ‘금오열도’(金鰲列島)라고 부른다.</p>
<p>이 가운데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섬이 금오도로, 돌산에서 남쪽으로 5.6km 떨어져 있다. 섬 모양이 자라처럼 생겨 ‘자라 오’(鰲)자를 써서 금오도라 했다. 또한 워낙 숲이 우거진 까닭에 섬이 검게 보인다해서 ‘거무섬’, ‘거마도’라고도 불렀다. 1981년에 돌산도, 안도와 함께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p>
<p>요즘 금오도는 여행에 관심있는 이들이 꼭 가보고 싶어 하는 ‘핫한’섬이다. 섬내에 조성된 도보길인 ‘금오도 비렁길’에 대한 입소문이 나며 매년 40여만 명이 다녀갈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비렁’은 외래어가 아닌 순우리말이다. ‘벼랑(절벽)’을 뜻하는 여수 사투리이다. 오랜 세월 동안 주민들이 마을간 왕래를 하거나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고, 미역을 말리기 위해 벼랑가를 오가던 ‘삶의 길’이 지난 2010년부터 도시인들의 일상에 안식을 안겨주는 ‘힐링 길’로 탈바꿈됐다.</p>
<p>금오도를 가려면 돌산 신기항과 백야도 선착장, 여수 연안 여객터미널에서 배를 타야한다. 반드시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 학생증(중·고생), 주민등록 등·초본(초등·유아) 등 신분증과 증명서를 제시해야만 발권과 승선이 가능하다. 돌산 신기항에서 연안 여객선을 이용하면 금오도 여천항까지는 25분이 소요된다.</p>
<p>‘금오도 비렁길’은 모두 18.5km 길이. 섬 서쪽에서 남쪽 방향으로 벼랑길을 따라 바닷가에 자리한 마을과 마을을 혈관처럼 연결하고 있다. 비렁길의 매력은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깎아지른 해안 벼랑길을 끼고 걷는 데 있다. 길은 절벽과 가깝게 위태롭게 돌아가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탁트인 바다는 걷는 이에게 청량감을 안겨준다. 또한 울창한 동백숲과 소나무숲을 비롯해 훼손되지 않은 자연을 온몸으로 만끽할 수 있는 ‘힐링’오솔길도 이곳의 자랑이다.</p>
<p>‘금오도 비렁길’은 크게 5개 코스로 나뉜다. 1코스는 함구미 선착장에서 출발한다. 비렁길 입구에 이르면 밭에 심어져 있는 금오도 특산물인 방풍나물이 눈길을 잡아끈다. 이곳에서는 1980년대부터 재배해 왔는데 걷기 열풍과 함께 다시 유명세를 탔다. 전국에서 생산되는 방풍의 95%가 금오도 산이라고 한다. ‘미역널방’은 과거 주민들이 지게에 생미역을 지고 올라와 말렸다는 장소다. 밑을 내려다보면 아찔할 정도로 가파른 벼랑이다.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이 세웠다는 송광사 절터를 지나면 신선이 놀다갔다는 신선대에 다다른다.</p>
<p>2코스 시작점인 두포(초포)는 금오도에 처음으로 사람이 들어와 살았다는 마을이다. 첫개 또는 초포라 불렸다. 본래 조선시대에 금오도는 군선을 만들고 궁궐을 짓기 위해 사람 출입을 금지시키고 소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했던 섬이었다. 1885년(고종22년)에 봉산(封山=나라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하던 산) 조치가 해제되자 당시 관 포수였던 박씨가 아들 삼형제를 데리고 섬에 들어와 두포에 정착했다고 한다. 바다전망이 일품인 굴등전망대와 주민들이 마을의 안녕을 빌었던 촛대바위를 지나면 300여 년생 해송들이 인상적인 직포에 도착한다. 직포에서 학동까지 이어지는 3코스는 비렁길 전체 코스를 걷기 어려운 탐방객들이 즐겨 찾는 구간이다. 울창한 동백나무 숲을 빠져나오면 갈바람통 전망대에 닿는다. 칼로 내려친 듯 갈라진 ‘갈바람통’과 절묘하게 바위 사이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가 무척 인상적이다. 특히 학동마을 1km 전에 만나는 ‘비렁다리’는 중간에 투명한 강화유리가 설치돼 있다. 밑을 바라보면 탐방객들의 오금을 얼어붙게 만든다.</p>
<p>4코스 시작점인 학동은 산 모양새가 학을 닮았다 해서, 끝점인 심포는 포구가 깊다 해서 그리 부르게 됐다고 한다. 5코스 망산 봉수대를 지나 종착지인 정지에 다다르기 전 안도가 한 눈에 들어온다. 기러기 형상을 했다는 안도는 2010년에 금오도와 연결하는 안도대교가 놓여 통행이 편리해졌다. 이야포 몽돌 해수욕장과 안도 해수욕장, 동고지 명품마을 등 나름의 매력을 뽐내는 섬이다.</p>
<p>금오도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벼랑을 끼고 섬을 반 바퀴 도는 ‘비렁길’트레킹 외에도 함구미에서 우학리 검바위까지 잇는 등산(11.9km·4시간 30분 소요) 구간과 함구미에서 안도까지 25.7km(3시간 소요) 길이의 자전거 하이킹 코스도 탐방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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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비렁길 코스 안내</p>
<p>1코스: 함구비 → 미역널방 → 송광사 → 절터 → 신선대 → 두포(초포)(거리 5.0km·2시간 소요)</p>
<p>2코스: 두포 → 굴등전망대 → 촛대바위 → 직포(거리 3.5km·1시간30분 소요)</p>
<p>3코스: 직포 → 갈바람통전망대 → 매봉전망대 → 비렁다리 → 학동(거리 3.5km·2시간 소요)</p>
<p>4코스: 학동 → 사다리등전망대 → 온금동 → 심포(거리 3.2km·1시간30분 소요)</p>
<p>5코스: 심포 → 막개전망대 → 장지(거리 3.3.km·1시간30분 소요)</p>
<p>▲여객선 운항시간과 요금 등 자세한 사항은 한국해운조합에서 운영하는 ‘가보고 싶은 섬’홈페이지(island.haewoon.c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계(4월 15일~9월 14일)의 경우 돌산 신기항→금오 여천항은 07:45 09:10 10:30 12:00 14:30 16:00 18:00, 금오 여천항→돌산 신기항은 08:20 09:40 11:00 13:00 15:00 16:30 18:30에 운행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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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진설명</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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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4339012_0.jpg" alt="img248.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4345316_0.jpg" alt="img246.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4359317_0.jpg" alt="img244.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4447539_0.jpg" alt="img242.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여수 ‘금오도 비렁길’은 해안절벽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매력적인 트레킹 코스다. 여수에서는 벼랑을 ‘비렁’이라고 부른다.</p>
<p>1구간에서 만나는 ‘미역널방’. 오래전 주민들이 지게에 생미역을 지고 올라가 건조시켰던 장소이다.</p>
<p>‘금오도 비렁길’을 걸으며 만나는 다양한 풍경.</p>
<p>바위와 어우러진 푸른 바다는 탐방객에게</p>
<p>청량감을 안겨준다.</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4506739_0.jpg" alt="img240.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2017-09-11T01:49:21.000Z2017-09-11T01:49:21.000Z관리*뛰어난 어업기술과 독특한 공동체 문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제주 해녀’<p> </p>
<p>국가중요어업유산</p>
<p> </p>
<p>濟州海女</p>
<p> </p>
<p><strong>뛰어난 어업기술과 독특한 공동체 문화</strong></p>
<p><strong>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strong></p>
<p><strong>‘</strong><strong>제주 해녀</strong><strong>’</strong></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3641831_0.jpg" alt="img222.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국가중요어업유산 제1호 자부심으로</p>
<p>세계중요농어업유산 등재 노력</p>
<p> </p>
<p>글 이보람 사진 제주특별자치도 해녀박물관 제공</p>
<p> </p>
<p>나는 해녀, 바다의 딸</p>
<p>만경창파 이 한 몸</p>
<p>바다에 내던져</p>
<p>바다밭에 농사지으려</p>
<p>열길 물속을 드나든다네</p>
<p><현기영 작사 ‘해녀노래’ 중 일부></p>
<p> </p>
<p> </p>
<p>흔히들 깊은 바닷속에 들어가 물질을 하는 해녀를 두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하곤 한다. 별도의 산소공급 장치 하나 없이 10m 깊이의 바다 속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1~2초만에라도 사고가 발생할 수 있음을 간과할 수 없는 직업이라는 의미다.</p>
<p>과거 한 TV 프로그램에 제주 해녀와 수중발레 선수, 그리고 수영 선수인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故 조오련 선수가 출연해 물속에서 숨을 쉬지 않고 누가 더 오래 버틸 수 있는지 시합을 했던 적이 있다. 당시 시청자는 물론 지켜보는 제주 해녀들까지도 해녀의 승리를 당연하게 예측하고 있었지만 결과는 예상밖이었다. 제주 해녀는 1분여 만에 세 명 중 가장 먼저 물속에서 나왔다.</p>
<p>해녀가 하는 일은 단순한 잠수가 아니다. 해녀들이 해산물을 채취하기 위해 바다 속에서 하는 작업을 ‘물질’이라고 하는데 한 번에 오랜 시간 물질을 하지는 않는다. 1분 내에 10m 깊이까지 내려갔다 올라오는 물질을 수차례 반복하면서 작업한다. 사실 숨을 참고 10m 깊이의 물속까지 내려가 작업할 수 있는 기술은 ‘초인적’인 일이다. 언제 물위로 떠올라야 살 수 있는지 몸이 알고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일을 한다는 말이 결코 과한 표현이 아니라는 얘기다. 오죽하면 해녀 속담 중에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는 말까지 나왔을까.</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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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물질 몸에 익히며 전문 해녀의 길로</p>
<p>해녀라고 해서 처음부터 특이한 체질을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는다.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물질을 하면서 몸에 익히며 전문적인 해녀가 되는 것이다. 제주도에 해녀가 가장 많았던 1960년대, 해안마을의 소녀들이 물질을 배우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한다. 보통 8살부터 수심이 낮은 ‘애기바당’(아기 바다)에서 헤엄과 잠수를 익혀 물질을 배우고 열다섯에서 열일곱 살이면 전문 해녀가 되었다.</p>
<p>해녀들은 보통 6~10명씩 조를 이뤄 물질을 나간다. 여름철에는 하루에 6~7시간, 겨울철에는 4~5시간씩 작업을 한다. 제주 해녀들이 주로 채취하는 해산물은 오분자기와 패류, 해삼, 멍게, 성게, 미역, 톳, 천초, 감태, 갈래곰보, 기타 해조류 등이다. 간혹 문어를 잡거나 작살을 이용해 도미 등을 잡기도 한다.</p>
<p>해녀들이 바다 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해산물을 채취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바다 속의 암초와 해산물의 서식처를 확인하기 위해 하는 물질을 ‘헛물’또는 ‘헛물질’이라고 하는데 ‘헛될 수 있는 물질’이라는 뜻이다. 이같은 헛물과 다른 해녀들로부터 얻어들은 이야기, 직접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해녀들은 물질 기술을 익히고 바다 속 환경에 적응해 나간다.</p>
<p>해녀들은 잠수복을 입고 작업을 한다. 지금의 해녀들이 입고 있는 잠수복인 고무옷은 1970년대 중반부터 도입됐다. 고무옷이 들어오기 이전에는 무명이나 광목으로 만든 재래 해녀복인 ‘물옷’을 입었다. 물옷은 하의에 해당하는 ‘물소중이’와 상의에 해당하는 ‘물적삼’, 머리카락을 정돈하는 ‘물수건’을 일컫는다. 이후 고무옷을 입으면서부터는 추위에 떨지 않게 되면서 작업 시간이 크게 늘었다.</p>
<p>고무옷 외에 해녀에게 가장 필요한 도구는 ‘테왁’이다. 바다 위에 둥둥 떠있는 테왁은 해녀가 그곳에서 작업 중임을 말해주는 부표이기도 하다. ‘두렁박’이라고도 부르는 테왁은 부력을 이용해 해녀들이 가슴을 얹고 헤엄칠 때 사용한다. 이 테왁 밑에는 어획물을 넣어두는 ‘망시리’(혹은 ‘망사리’)가 매달린다. 잠수했던 해녀가 바다 위로 올라와 가쁜 숨을 내쉴 때 바다 위에 띄워 둔 이 테왁을 붙잡는다. 이때 ‘호오이, 호오이’소리를 내며 휘파람을 부는 것처럼 숨을 내쉬는데 이를 ‘숨비소리’라고 한다. 1분 정도 잠수하며 생긴 몸속의 이산화탄소를 한꺼번에 내뿜고 빠른 시간 내 다시 신선한 공기를 몸 안으로 받아들여 짧은 휴식으로도 물질을 지속할 수 있게 해준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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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경제 공동체이자 사회 공동체</p>
<p>해녀어업의 특징 중의 하나가 ‘공동체 문화’다. 경제 공동체이면서 사회 공동체이기도 했다. 제주 해녀들은 제주 섬의 척박한 화산토양을 일궈가며 가정경제를 책임졌으며 동시에 일정 구역의 바다에서 공동 물질을 하여 그 수입을 마을에 기증하기도 했다. ‘함께’해야 하는 물질 작업의 특성상 동료 해녀들과도 협동을 통해 물속에서 닥칠 위험을 서로 예방한다. 때문에 제주 해녀들은 동료 해녀에 대한 배려가 깊다. 동시에 나름대로의 질서와 규약을 지켜나가며 공동체를 형성한다.</p>
<p>‘불턱’은 공동체 문화를 상징하는 제주 해녀들만의 공간이다.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고 바다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곳이며 작업 중 휴식을 취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둥글게 돌담을 에워싼 형태로 가운데 불을 피워 몸을 덥혔으며 이곳에서 선배 해녀들에게 물질에 대한 지식, 물질 요령, 바다밭의 위치 파악 등 물질 작업에 필요한 정보와 기술을 전수받고 습득한다.</p>
<p>해녀사회에서도 계급 체계가 엄격했다. 잠수 기술에 따라 상군 해녀, 중군 해녀, 하군 해녀로 나뉘는데 상군 해녀는 오랜 기간 물질을 하여 물질 기량이 뛰어나며, 암초와 해산물에 대해서도 가장 잘 알고 있다. 날씨에 따라 물질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도 일기예보보다는 물질 경력이 오래된 상군 해녀의 말을 듣는다. ‘불턱’도 해녀의 지위에 따라 자리가 정해진다.</p>
<p>위험한 물질을 하는 해녀들에게는 무사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무속의례가 전해온다. 매해 봄이 되면 바닷가에 위치한 해신당에서 바다의 여신인 ‘요왕할머니’(용왕할머니)에게 바다에서의 안전을 기원하는 ‘잠수굿’을 지낸다. 잠수굿에서 해녀들은 요왕할머니의 자손이 되며, 한 조상의 자손으로서 공동체적 입체감을 형성한다. 잠수굿에서는 상징적으로 해안가에 씨를 뿌리며 해산물을 많이 채취하게 해 달라고 기원한다. 잠수굿은 해녀들의 해상 무사고와 해산물의 풍요를 기원하는 기능 외에도 잠수 공동체의 유대를 강화하고 마을의 단합을 도모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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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해녀 수 감소, 지속적 보전관리 필요</p>
<p>‘제주 해녀문화’는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지난 2016년 11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보다 앞선 2015년 12월에는 ‘제주 해녀어업’이 국가중요어업유산 제1호로 지정됐다. 이처럼 제주 해녀는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희소가치가 있는 어업자원이다. 전통기술과 지식체계를 지니고 있어 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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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녀수의 감소는 해녀문화 보존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1960년대 중반 2만3000여 명이던 제주 해녀 수는 이후 감귤 도입과 관광산업의 태동, ‘바다밭’ 축소 등으로 인해 점차 줄기 시작했다. 80년대 7800여 명으로 3분의 1로 감소하던 것이 2016년 12월 기준, 4005명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특히 60대 이상 해녀가 88%에 달하는 데다 40대 이하 해녀는 감소하고 신규 해녀 입회도 미미한 실정이다.</p>
<p>해녀의 감소는 어업자원과 관련 문화의 실종과 연계되는 만큼 해녀 수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시책이 요구된다. 고령 해녀들의 안전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동시에 젊은 해녀들의 유입을 위한 체계적인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 감소하고 있는 마을어장의 자원을 회복시키고 해녀들의 생계안정을 위해 물질 이외의 소득사업 발굴도 이뤄져야 할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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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진설명</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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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3658476_0.jpg" alt="img226.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3712074_0.jpg" alt="img228.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테왁에 잠시 기대어 쉬던 해녀가 다시 깊은 바닷속으로 자맥질을 한다. ‘두렁박’이라고도 부르는 테왁은 해녀가 그곳에서 작업 중임을 알려주는 부표이기도 하다.(위)</p>
<p>해산물 채취에 성공한 해녀의 얼굴에 웃음이 엿보인다. 해녀는 별도의 산소공급 장치 없이 1분 내에 10m 깊이까지 내려갔다 올라와야 하기 때문에 물질을 할 때마다 해산물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3726015_0.jpg" alt="img234.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등에 지기가 버거울 정도로 많은 해산물을 채취한 해녀가 작업을 마치고 뭍으로 나오고 있다.</p>
<p>맨몸과 맨 숨으로 바다에 뛰어들어 ‘바다밭’을 일궈낸 제주 해녀는 제주의 강인한 여성성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3721021_0.jpg" alt="img232.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3743915_0.jpg" alt="img236.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불턱에 모여 옷을 갈아입은 해녀들이 테왁과 망시리를 짊어지고 어장으로 향한다. 동료 해녀에 대한 배려가 깊은 제주 해녀들은 나름대로의 질서와 규약을 지켜나가며 공동체를 형성한다.(위)</p>
<p>잠시 휴식을 취하는 해녀들. </p>2017-09-11T01:41:33.000Z2017-09-11T01:41:33.000Z관리*‘율도국’ ‘인당수’ 신비한 이야기 출렁 달달한 바지락·실한 마늘 닮은 사람들 부안 위도 벌금마을<p> ‘율도국’ ‘인당수’ 신비한 이야기 출렁</p>
<p>달달한 바지락·실한 마늘 닮은 사람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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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부안 위도 벌금마을</strong></p>
<p>글 이보람 사진 김진수</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1822384_0.JPG" alt="P36-37 부안위도벌금마을 바지락캐기.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봄부터 가을까지</p>
<p>바지락 캐기</p>
<p>어민도 관광객도</p>
<p>사랑하는 갯벌</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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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해수욕·체험 인기, 위도 관광의 중심지</p>
<p>이른 아침부터 서둘러야 했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인 벌금마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배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첫배 시간이 아침 7시55분. 표를 끊고 차량 싣고 하려면 그보다 일찍 도착해야 하고 이왕이면 아침식사까지 할 요량이니 무조건 서둘러야 했다.</p>
<p>동트는 새벽 집을 나선다. 일찍 시작된 무더운 초여름이지만 새벽바람은 상쾌하다. 광주에서 출발해 휴게소에 잠깐 들르고 부안 격포항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1시간 30분. 7시 전에 도착했으니 순조로운 출발이다. 아쉽게도 격포항에는 아침식사를 할 만한 곳이 보이지 않는다. 5분 정도 나가면 식사를 할 수 있다지만 그 정도까지 배가 고프진 않다. 여객선 터미널 내 슈퍼에서 마실 물과 간단한 군것질거리, 혹시 만나게 될지 모르는 갈매기용 새우깡을 구입했다.</p>
<p>전날까지 내린 비 탓에 항구 주변 안개가 자욱하다. 바람은 잔잔했지만 가시거리가 짧아 배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배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하늘이 점점 바닷길을 내어준다. 순서대로 차를 싣고 2층 선실에 들어섰다. 이른 아침인 데도 섬으로 들어가는 승객들이 꽤 많다. 면민 잔치를 위해 위도면으로 들어가는 (재)문화재아웃리치연구소 소속 공연팀과 가까운 곳에 앉아 심심하지 않게 갈 수 있었다.</p>
<p>격포항을 출발한 지 50여 분 만에 위도항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려 첫 발을 내딛은 이곳은 전북 부안군 위도면이다. 여객선에는 위도항이라고 표시돼 있지만 주민들은 이곳을 파장금항이라 부른다. 파장금마을에 위치해서인 듯하다. 위도항에서 벌금마을까지는 넉넉잡아 10여 분. 벌금마을을 소개하기 전 위도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가는 게 순서일 듯 싶다.</p>
<p>위도는 섬의 생김새가 고슴도치와 닮았다고 해서 고슴도치 위(蝟)자를 붙여 위도(蝟島)가 됐다. 뭍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다 보니 고려시대부터 유배지로 이용됐다고 전해지며 허균의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이 꿈꾸던 ‘율도국’의 실제 모델이 된 섬이라기도 하고 ‘심청전’의 심청이가 빠졌다는 ‘인당수’가 위도의 부속 섬 ‘임수도’라는 설도 있다. 1993년 서해훼리호 침몰이라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지금은 여름철 해수욕과 봄부터 가을까지 바다낚시를 즐기러 오는 낚시꾼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있다.</p>
<p>“벌금마을이 위도관광의 중심이라고 보면 됩니다. 전반적으로 관광산업의 메카죠. 해수욕장을 뒤로 끼고 있어서 여행객들이 우리 동네에서부터 머물게 됐고 이곳에서 민박이라는 개념이 생겨났죠. 서해훼리호 사고가 나고 김영삼 정부 때 해안도로를 만들고 전기 시설 수도 시설이 갖춰지면서 우리 마을 외에도 해안도로를 따라 다른 마을에도 숙박 시설이 생겨났어요.”</p>
<p>곽태복(47) 어촌계장이 마을 입구에서부터 나와 반겨준다. 첫배로 나가 어촌계 업무를 볼 예정이었는데 잠시나마 마을을 소개해 주고 싶은 마음에 일정 조율을 해줬다. 다른 마을의 어촌계장에 비해 젊어보인다 싶었더니 역시나 벌금마을에서도 역대 최연소 어촌계장이란다. 어촌계장 옆에 조기현(63) 마을이장이 동행해 마을 안내에 도움을 줬다.</p>
<p>위도관광의 중심지라더니 취재진이 본 벌금마을의 첫 인상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이 흘렀다. 휴가철이 시작되기엔 아직 이른 데다 평일이다 보니 관광객이 찾지 않은 탓이다. 거기에 바닷물이 빠져나간 간조기라 마을 아낙네들이 모두 갯벌에 나갔으니 당연한 풍경이었다. 마을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탓에 간혹 휴식을 취하러 오는 이들도 있다고 귀띔해준다.</p>
<p>과거에 넓은 소금벌이 많아 ‘벌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재미있게도 위도에는 유독 마을 이름에 ‘금(金)’이 들어간 지명이 많다. 벌금을 비롯해 파장금, 살막금, 도장금, 논금, 정금 등이 그렇다.</p>
<p>바지락·놀래미·우럭 맛 최상</p>
<p>벌금마을에서는 봄부터 가을까지 마을 주민들이 갯벌에 나가 바지락을 캔다. 보통 3~4월부터 바지락 수확이 시작되는데 물때에 맞춰 새벽에도 나가고 저녁에도 나간다. 마을의 주 수입원 중 하나다. 이날 마을 주민들이 이른 아침부터 나가 바지락을 캔 곳은 마을 앞에 조성된 공유수면이다. 바로 앞에 어촌계 양식장이 있지만 이곳의 바지락은 아직 덜 여문 상태라 조금 더 떨어진 공유수면까지 나가 매일 바지락을 캔다. 인근 마을에서 오기도 하고 관광객들이 바지락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p>
<p>오전 10시 무렵이 되자 하나 둘 수확한 바지락을 들고 갯벌 밖으로 나온다. 하나라도 더 건질까 바닷물이 들어오는 와중에도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주민들이 보인다. 이웃마을에서 온 이들인지 트럭 짐칸에 서너 명이 바지락과 함께 올라타 있다. 한 아주머니의 자전거 뒷자리에 실린 초록색 바지락 망에는 ‘송금례’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다. 소형 리어카에 바지락을 싣고 그 옆에 대여섯 살 되어보이는 남자아이가 쫄랑쫄랑 따라가는 걸 보니 이분은 벌금마을 주민인 듯 하다.</p>
<p>“많이 잡으셨어요? 이건 무슨 바지락이에요?”</p>
<p>“바지락이 그냥 바지락이제. 무슨 바지락이여?”</p>
<p>최대한 미소를 머금고 친절하게 여쭤봤는데, 뭍에서 온 듯한 낯선 이가 엉뚱한 질문을 하자 날아온 대답이다. 바지락 종류가 궁금했던 건데, 무색해 하던 찰나 “자연산 바지락이여.” 대답이 돌아온다. 함께 있던 동네 아주머니들이 환하게 웃어준다.</p>
<p>이들은 아침 7시부터 10시까지 세 시간 동안 캐 온 바지락을 각자 집으로 가지고 돌아가 일일이 까는 작업을 한다. 다 까면 단골들에게 팔려 나간단다. “1㎏에 1만8000원도 받고 2만원도 받고 그래요. 하루에 두 번 물이 빠지는데 오늘 저녁에는 너무 캄캄해서 못나가겄네요” 한다.</p>
<p>마을이장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자면, “내 바지락이 맛있네, 니 바지락이 맛있네 해도, 천만에! 우리 벌금 바지락이 최(고) 맛있어”다.</p>
<p>위도는 바지락뿐만 아니라 놀래미나 우럭, 꽃게가 많이 잡히는데 뻘을 먹고 크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맛이 좋다. 특히나 벌금마을은 자잘한 자갈이 많이 있어서 뻘만 있는 곳에서 자라는 바지락에 비해 달달한 맛이 더하다고 일러준다.</p>
<p>꽃게 금어기가 끝나는 8월 21일부터는 벌금마을도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가을 꽃게가 형성되는 시기다. 벌금마을 10여 척의 꽃게잡이 배를 비롯해 위도에서만 30여 척 이상이 꽃게잡이를 시작하고 격포항에서도 이 시기에는 위도 인근으로 몰려온다.</p>
<p>섬마을답게 바지락과 꽃게는 물론 봄부터 가을까지 놀래미와 광어, 우럭도 많이 잡힌다. 칠산어장의 중심지답게 위도 근해는 오염없는 청정바다로 불린다. 때문에 4월 말부터 10월 말까지는 위도로 바다낚시를 오는 낚시객들이 넘쳐난다. 낚시꾼들을 위한 낚시 포인트가 있는데 위도 본섬의 경우 벌금 용멀 부근, 벌금 딴달래섬, 파장금 등대부근, 정금 철탑부근, 모여도, 내조도, 살막금이다. 봄부터 6월 말까지 우럭과 놀래미, 4~6월 감성돔, 7월 중순부터 가을까지 농어가 잘 잡힌다. 꽃게철이 아닌 비수기에는 어선세력들이 대부분 낚시체험과 그물체험에 투입되기도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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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위도해수욕장, 여름철 관광객 북적</p>
<p>여름철이면 벌금마을은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위도에는 섬의 서쪽으로 위도 해수욕장, 깊은금 해수욕장, 미영금 해수욕장, 논금 해수욕장까지 4개의 해수욕장이 있는데 이 중 대표적인 위도 해수욕장이 벌금마을 뒤편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p>
<p>위도해수욕장은 여름철 해수욕을 즐기기에 ‘기가 막힌’ 곳이다. 축구장만큼 넓은 해변이 완만해 아직까지 해상사고 한 번 없었다고 전해진다. 해수욕장에서 바라보는 왕등도 일몰은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샤워시설도 섬마을 치고 그 규모가 상당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무엇보다 물이 풍족하기 때문에 가능할 거라 짐작된다.</p>
<p>“가뭄이 들어도 3년 동안은 위도 주민들이 빨래하고 먹을 수 있을 만큼 물이 풍족한 섬입니다. 산에서 물이 계속 흐르고 있기 때문이에요. 도시 분들이 와서도 물이 아주 좋다고 이야기를 해줍니다.”</p>
<p>한가로운 마을 앞 도로에 마늘이 널려 있다. 마늘 역시 벌금마을의 특산물이다. 위도 마늘은 재래종인 6쪽 마늘로 해풍을 맞고 자라기 때문에 맛과 영양이 뛰어나다. 마늘 외에 깨, 고추 농사도 짓기 때문에 1년 365일 쉬는 날 없이 바쁘게 돌아간다. “내가 조금만 고생하면 먹을 걸 다 공수할 수 있는 곳이 어촌”이라는 어촌계장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1년 내내 일이 이어진다고 하지만 동절기는 마을에 적막감이 감돈다.</p>
<p>“12월 김장이 끝나면 집의 반절은 비어요. 도시로 나가 자식들 집에서 2~3주 거주하고 돌아오죠. 쉬면서 병원도 좀 다니고 하는 거에요. 그러다가 구정 설에 맞춰서 다시 마을로 들어와 일년 농사가 시작됩니다. 큰 소득은 없어도 빚에 허덕이는 사람도 없는 ‘먹고 살 만한’ 마을이 벌금마을 이에요.”</p>
<p>여유롭게 걸으며 마을을 둘러보다 반가운 장소를 찾았다. 마을내 유일한 가게다. 건물 외벽에 ‘삼복슈퍼’라고 크게 쓰여 있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눈에 띌 만큼 글씨가 커서 계속 신경이 쓰였던 곳이다. 가게 주인 김정술(84) 할아버지가 한손에는 파리채를 든 채 가게 입구 의자에 앉아 있다. 가게 앞에 널어놓은 생선들에 내려앉는 파리들을 쫓느라 심심할 틈이 없다. ‘삼복슈퍼’는 조기현 이장이 어릴 적부터 숱하게 드나들던 ‘점빵(점방)’이다. 김씨 할아버지가 가게 문을 연 지도 벌써 60년이 지났다. 조깃배들이 마을에 드나들적 어부들에게 술도 팔고 조기도 발라주면서 돈을 벌어왔다. 낚시용품부터 관광객들을 위한 폭죽놀이, 대롱대롱 매달아놓은 계란까지 마을사람들에게는 ‘없는 게 없는’ 슈퍼라지만 지금은 찾는 사람들이 거의 없고 외지인들의 눈에도 부족함이 많아 보인다. 그래도 마을내 유일한 가게이니 없어져서는 안될 곳이기도 하다.</p>
<p>집들이 옹기옹기 모여있는 마을 중심지를 지나 한참을 걸어가다 보면 ‘용머리’ 해안 가는 길이 나온다. 얇은 돌판이 겹겹이 쌓인 검은해안 절벽으로 ‘위도의 채석강’이라 불리며 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용멀(용머리)’이라 부른다. 옛 벌금항 여객터미널(서해훼리호 시절에는 배가 이곳 여객터미널까지 닿았다고 알려준다) 건물 뒤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가면 용머리에 다다른다. 이곳 용머리는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벌금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은 잊지 않고 들르는 곳이다. 산길을 지나 바다쪽으로 내려서면 층층이 쌓아올린 절벽이 좌우로 펼쳐져 있다. 바닷물이 닿아 철썩거리는 소리에 움츠려들기도 하지만 자연의 경이로움에 그깟 두려움은 금세 사라지고 만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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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상사화 보며 달빛 아래 밤새 걷기</p>
<p>위도에서는 매년 8월말이나 9월초 ‘고슴도치섬 달빛아래 밤새걷기’ 축제를 개최한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위도에서만 볼 수 있다는 흰색 상사화와 달빛을 보며 소중한 사람과의 추억을 쌓기 위한 위도면 행사다. 흰색 상사화가 만개하면 흰 눈이 내린 듯 하얀 세상을 만나볼 수 있는데, 꽃이 피는 기간이 5일에서 일주일밖에 되지 않아 최종 축제 시기는 개화시기에 맞춰 주말로 결정이 된다.</p>
<p>해가 지기 전인 5시 무렵 관광객이 위도에 첫발을 내딛는 파장금항에서부터 시작되며 코스별로 나뉘어 걷기가 시작된다. 달빛힐링코스(8.7㎞ 150분 소요), 달빛만복코스(8.5㎞ 150분 소요), 달빛축복코스(10.8㎞ 180분 소요), 위도달빛코스(9.2㎞ 160분 소요) 등 4개 코스다. 각 마을을 지나 흰색 상사화 군락지 인근 위도해수욕장에 집결하며 달빛이 비치는 바다를 감상하며 다양한 어울림 행사가 펼쳐진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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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벌금마을 여행 Tip</p>
<p>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마을의 특성 상 먹을거리와 생필품은 준비하고 가는 게 좋다. 마을 내 오래된 슈퍼마켓이 있긴 하지만 필요한 물건을 양껏 구입할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아이들이 먹을 만한 과자나 바닷가에서 즐길 폭죽놀이 등은 이곳에서 살 수 있다. 첫 배를 타고 들어갈 경우 미리 아침식사를 하고 가거나 요깃거리를 사가야 한다. 바지락 체험은 펜션이나 민박에서 도구가 준비돼 있으니 챙겨가지 않아도 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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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진설명</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1849103_0.JPG" alt="P38 부안위도벌금마을 공유수면.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 </p>
<p>부안 위도 벌금마을은 바지락과 마늘로 유명하다. 바지락 캐기 작업에 한창인 어민들.</p>
<p>마을 앞 공유수면에서 바지락을 캐던 주민들이 작업을 마무리하고 돌아오고 있다. 마을의 주 수입원 중 하나인 바지락은 봄부터 가을까지 수확이 가능하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2036771_0.JPG" alt="P40 부안위도벌금마을 곽태복어촌계장.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벌금마을을 소개해주고 있는 곽태복 어촌계장(41). 역대 최연소 어촌계장이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2116963_0.JPG" alt="P40 부안위도벌금마을 바지락망.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어민들은 달달한 벌금 바지락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수십 년 간 바지락을 캐온 송금례 씨의 바지락 망.(위)</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2152217_0.JPG" alt="P40 부안위도벌금마을 어선물꾸러미.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낚시로 잡아 잘 말린 놀래미, 우럭 등은 도시에 있는 자식들에게 보내는 어산물 꾸러미에 담기곤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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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2212534_0.JPG" alt="P41 부안위도벌금마을 어선들.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벌금항에 정박해 있는 어선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2309296_0.JPG" alt="P42 부안위도벌금마을 삼복슈퍼.JPG 이미지입니다." width="50%"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5704136_0.JPG" alt="asP42 부안위도벌금마을 마늘.JPG 이미지입니다." width="50%" /></p>
<p>벌금마을의 유일한 가게인 ‘삼복슈퍼’. 규모는 작지만 어촌마을의 추억을 쌓으며 60년 된 가게다(왼쪽). 맛과 영양이 뛰어나기로 소문난 벌금마을의 마늘.</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2322332_0.JPG" alt="P43 부안위도벌금마을 용머리해안.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위도의 채석강’이라 불리는 벌금마을 ‘용머리’ 해안. 수만 권의 책을 쌓아 올린 듯 겹겹이 쌓인 검은 해안 절벽이 장관이다. 마을 주민 한용철씨가 촬영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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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부안 위도 벌금마을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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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잠시 중단됐던</p>
<p>당집 제사, 굿패 기원</p>
<p>내년 부활 준비</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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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벌금마을이 속해 있는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은 한때 전라남도 영광군 소속이었다. 역사적 고찰 문헌을 통해 고증해 보면 고려조 이래 조선 중종 때 ‘동국여지승람’ 편찬 당시 위도면은 부안군에 속해 있었음이 밝혀졌다. 고종 3년인 1866년 신찬된 ‘부안여지승람’에 의하면 조선 말엽 1896년(고종 33년) 전라 좌우도를 전라남북도로 개편할 당시 고군산도와 더불어 위도가 부안군의 영지를 이탈해 전남 지도군으로 편입됐다. 이후 1914년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지도군이 소멸되고 고군산도는 옥구군으로, 위도는 전남 영광군으로 편입됐다. 그러던 것이 다시 1963년 1월 1일자 당시의 혁명정부에 의해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위도는 부안군의 영지를 떠난 지 69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p>
<p>위도면의 8개 법정리(里) 중 하나인 벌금마을은 조선조 말엽 창녕 조(曺)씨와 평산 신(申)씨가 정착해 마을을 이뤘다고 전해진다. 창녕 조씨의 경우 한때 12세대까지 모여 집성촌을 이뤘으나 수도권으로 전입한 가구가 늘면서 현재 7세대가 살고 있으며 평산 신씨는 이보다 적은 소수만이 남아있을 뿐이다.</p>
<p>1980년대까지만 해도 벌금마을에는 84가구에 400명이 넘는 주민이 살았지만 현재 67가구에 120~130명 만이 남아있다. 그마저도 60대가 넘는 고령자가 대부분이다. 벌금마을 어촌계에 등록된 계원은 60명으로 가구당 1명꼴로 어촌계에 소속돼 있다. 보통 어촌계원 40여 명이 봄부터 가을까지 바지락 작업을 하는데 개인별 연간 300만~400만 원의 수입을 올린다. 수확이 좋은 가구는 500만~600만 원까지도 가능하다. 8~10월에는 가을 꽃게잡이가 시작된다. 어촌계 소속 12척의 배가 꽃게작업을 나가는데 호당 수입은 5천만원 이상으로, 벌금마을 어촌계가 이 기간 꽃게잡이로 6억원 이상의 수익을 올리는 셈이다.</p>
<p>벌금마을에 전해오는 토속신앙은 어촌만의 독특한 성격을 갖고 있다. 음력 정월 초하루에서 초사흘까지 산제 당제 도제가 진행되는데 산제와 도제는 깊은 밤 자정에, 당제는 오전 시간대 당집에서 지내게 된다. 벌금마을과 진리마을 중간 정도의 산 정상에 수백 년 된 후박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중앙에 당집이 있다. 당집에는 용왕신이 모셔져 있다고 해서 당 숲을 함부로 드나들거나 나무를 꺾는 것조차 금기시했다. 이를 어기면 개인은 물론 마을 전체에 해가 된다고 해서 훼손하지 않고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p>
<p>진리마을은 음력 정월 초이틀, 벌금마을은 정월 초사흘에 이 당집에서 제를 지내왔다. 마을에서 시작한 굿패가 온 마을의 안녕과 발전을 빌며 마을회관에서 시작해 당집에 올라 기원제를 지내고 다시 마을로 내려와 각 가정을 돌며 평안과 행복을 빌어주는 굿을 한다. 집집마다 음식을 내어와 굿패들을 대접하고 쌀이나 돈을 내기도 했다. 조기현 벌금마을 이장은 “오랫동안 지속돼 왔던 이 민간신앙이 몇 년 동안 사라져 왔다”며 “내년쯤 다시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준비 중이다”고 말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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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벌금마을 당집(왼쪽)과 위도 띠뱃놀이 모습. ⓒ부안군</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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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한국인의 밥상’이 감탄한 푸짐한 인심</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2348963_0.JPG" alt="P45 부안위도벌금마을 붕장어주물럭.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어부의 밥상 <붕장어 주물럭></p>
<p>벌금마을은 아쉽게도 식당이 없다. 민박을 이용할 경우 아침 식사 정도는 요청할 수 있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집집마다 바지락 캐러 나가고 없으니 인근 마을 식당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섬 관광 삼아 해안도로를 따라 이웃 깊은금 마을로 가기로 결정했다. 벌금마을에서 차로 5~10분 거리. 바다를 벗삼아 차분히 이동하면 10여 분, ‘얄짤없이’ 앞만 보고 달리면 5분이면 닿을 거리다.</p>
<p>자연산 아나고탕 전문점이라고 쓰여진 ‘그래 그 집’은 TV 프로그램 ‘한국인의 밥상’ 최불암 선생님도 찾았던 곳이다. 맛있는 음식을 추천해 달라니 ‘붕장어 주물럭’을 권한다. 주문과 함께 두 분의 아주머니가 동시에 움직인다. 한 분은 커다란 스테인리스 용기에 채소와 함께 양념장을 준비하고 다른 한 분은 붕장어를 잡으러 간다. 붕장어 주물럭은 1㎏에 5만원. 3~4명이 먹을 수 있는 양이란다. 팔딱팔딱 몸부림치는 세 마리의 붕장어가 아주머니의 손에 붙잡혀 나온다. 어찌나 사납게 몸부림치는지 손질이 될까 싶은데 역시 전문가는 전문가다. 차마 글로 설명할 수 없는 숙달된(?) 손놀림으로 단박에 3마리의 힘 좋은 녀석들이 음식거리가 되고 만다. 손질이 끝난 약간의 핏기가 묻은 장어를 씻어주려나 싶었더니 마른수건을 가져다가 부드럽게 닦아준다. 붕장어는 물로 씻으면 비린내가 더 날 수 있기 때문이다.</p>
<p>손질을 마친 붕장어가 준비된 양념장 용기에 넣어진다. 고추장, 된장, 고춧가루를 적당하게 넣은 양념장에 당근, 버섯, 대파, 양파까지 몽땅 들어갔다. 사진을 찍는다고 하니 동그란 불판에 예쁘장하게 꾸며 올려준다. “원래 이렇게 가지런히 내오느냐?” 물었더니 그렇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앞으로는 다른 손님에게도 이렇게 보기좋게 올려주기로 약속을 하신다.</p>
<p>장어가 익기를 기다리는 시간조차 야속하다. 아침을 못먹은 탓에 뱃속이 요동을 친다. 혹여나 장어가 바닥에 누를까 싶어 간간이 뒤섞어주었더니 어느새 국물이 자박자박 생겨난다. 오동통 살이 올라오는 게 다 익었다는 신호다. 주인장이 직접 길렀다는 상추에 장어를 올리고 야채를 올리고 쌈장과 고추, 마늘까지 올려 한입 싸먹으니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여 피곤했던 몸이 풀리는 듯 하다. 술 안주로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다음 일정이 있어 자제해 보기로 한다. 밥보다는 장어에 집중했더니 세 명이 먹기에 딱 좋은 양이다.</p>
<p>문의 010-4903-874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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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찾아가는 길</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2359540_0.jpg" alt="P45 부안위도벌금마을 지도.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주소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벌금안길 16</p>
<p>전화번호 010-6600-4049</p>
<p>교통편</p>
<ul>
<li>승용차: 서해안고속도로 → 부안IC → 격포항 → 위도행 카페리호 → 위도</li>
<li>여객선</li>
</ul>
<p>(평일) 격포항→위도(오전 7:55 9:55 11:55 오후 1:55(화 결항) 3:35(목 결항) 5:15)</p>
<p>위도→격포항(오전 7:55 9:55 11:55(화 결항) 오후 1:55(목 결항) 3:35 5:05)</p>
<p>(주말) 격포항→위도(오전 7:55 9:15 10:35 11:55 오후 1:15 2:35 3:55 5:15)</p>
<p>위도→격포항(오전 7:55 9:15 10:35 11:55 오후 1:15 2:35 3:55 5:15)</p>
<p> </p>2017-09-11T01:34:39.000Z2017-09-11T01:57:46.000Z관리*깊은 골짜기 건너면 환하게 펼쳐지는 바다 천혜의 풍경 만끽하는 바다부채길 강릉 심곡마을<p>깊은 골짜기 건너면 환하게 펼쳐지는 바다</p>
<p>천혜의 풍경 만끽하는 바다부채길</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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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강릉 심곡마을</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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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글 김용태 사진 박성배</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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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0008693_0.JPG" alt="P26-27 강릉심곡마을 부채바위전망대.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2300만 년 전 지각변동으로 형성된 해안 절경에</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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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눈과 마음 절로 빼앗겨</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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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종이 펼친 모양새에서 유래한 지필마을</p>
<p>심곡마을에 가기 위해서는 강릉에서 7번 국도를 타고 보다 동쪽으로 이동해야 한다. 약 18km. 심곡을 2km 앞두고 정동진을 경유한다. 정동진에서 심곡으로 이동하는 길은 가파르고 구불구불하다. 재를 넘는 탓이다. 오르막길이 내리막으로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가가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마을이 시작된다 싶으면 곧 항이 나온다. 심곡항이다. 산골 마을이 순식간에 어촌으로 바뀐다. 재를 넘는 동안 줄곧 시야를 가리던 산이 걷히면서 동해가 펼쳐진다. 한 눈에 다 담을 수 없는 파노라마다.</p>
<p>심곡을 와보면 마을 이름이 쉽게 이해된다. 심곡(深谷)은 깊은 골짜기 안이란 뜻이다. 지형을 충실히 반영한 이름이다. 심곡이란 이름이 붙기 이전에는 ‘짚일’이라 불렸다. 이는 깊은 골짜기란 뜻의 ‘깊일’이 변한 이름이다. 다른 설도 있다. ‘짚일’이 지필(紙筆)이란 한자어에서 유래했다는 설로 마을의 형상이 종이를 땅바닥에 깔아 놓은 듯 평평하고 그 옆에 붓이 있는 모습이라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p>
<p>필자가 심곡을 찾은 날은 평일이었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마을이어서 그러려니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심곡리 어촌계장인 원두식 씨(52)를 만나 상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p>
<p>원두식씨는 심곡의 유일한 횟집인 헌화로 회도매센타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손님이 없는 탓에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와 수평선이 내다보이는 야외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활달한 편인 원두식씨는 작년 10월에 ‘정동바다부채길’이 열리면서 관광객의 방문이 많아진 상황을 반겼다.</p>
<p>“평일에는 보통 삼사천 명이 들러요. 주말에는 만 명이 넘고요. 제가 작년까지만 해도 휴가를 서울로 갔어요. 사람 구경하러요. 그런데 올해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어요.” 그러나 그의 말과 달리 마을에 인적이라고는 찾기 어려웠다. “오늘은 풍랑주의보 때문에 바다부채길이 통제돼서 그래요. 오후 7시쯤이면 해제될 테니 내일은 갈 수 있습니다.”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은 국내 유일의 해안단구 지역으로 심곡항에서 정동진의 썬크루즈 리조트까지 총 2.86km 구간의 탐방로이다. 해안선을 따라 교량형태로 이어져 있는 탐방로인 터라 파도가 높은 날은 탐방이 제한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필자가 심곡을 들른 날이 풍랑주의보가 발령된 날이었다.</p>
<p>원두식씨는 본인을 꼬맹이라고 표현했다. 52세의 그가 마을에서 가장 어리단다. 그는 능숙한 이야기꾼이었다. 질문한 내용을 웃도는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심곡항은 작은 어항이다. 정박한 배들이 십여 척 언저리다. 그마저도 두어 척을 제외하고는 0.3톤 급의 작은 어선들이었다. 그러나 아담한 항구임에도 어자원은 넘쳐날 정도로 풍부하다.</p>
<p>자연산 미역, 고리매 명산지</p>
<p>겨울철에는 해조류를 채취한다. 심곡의 해조류는 전부 자연산이다. 영양으로나 맛으로나 양식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해조류는 수온이 올라가면 녹아버리기 때문에 날이 찬 12월부터 5월까지만 채취가 이뤄진다. 가장 빠른 건 돌김이다. 돌김 작업은 12월부터 1월까지 이뤄진다. 심곡의 돌김은 맛과 향이 뛰어나 조선시대 임금님 진상품이었다고 한다. 2월부터 3월까지는 고리매 작업을 한다. 고리매라니, 생소한 이름이다. 고리매는 누덕나물이라고도 부르는데 무쳐먹기도 하고 튀겨 먹기도 한다. 김처럼 말려두었다가 먹을 수 있어 저장성도 뛰어나다. 하지만 제철을 놓치면 심곡의 고리매는 맛보기 어렵다. 채취하자마자 전국으로 팔려나가는 탓이다. 고리매철이 지나면 쉴 틈도 없이 미역작업이 기다린다. 4월부터 5월까지 이뤄지는 미역작업은 심곡마을 주민들의 일 년 농사다. 미역철이 되면 마을의 선박들은 어촌계장의 지휘 하에 일제히 출항한다. 심곡 앞바다는 어족자원이 넘쳐나기에 비교적 저가인 톳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미역철 심곡은 주차장이건 부두 건 할 것 없이 온통 건조 중인 미역으로 뒤덮인다. 각자 채취한 미역은 각자 몫이다. 때문에 심곡에서는 건어물가게 뿐만 아니라 모든 가정집에서 미역을 판매한다.</p>
<p>미역철이 끝나면 곧바로 성게철이 이어진다. 6월부터 9월말까지인데 연간 생산량이 무려 만 오천 톤이다. 사십 가구가 조금 넘는 마을에서 입이 떡 벌어지는 생산량이다. 때문에 작년에는 판매촉진 차원에서 1회 성게축제를 열기도 했었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아쉽게도 성게축제를 볼 수 없다. 잠정적인 중단상태인데 일단은 재개할 계획이 없다. 작년 10월 17일 준공된 바다부채길로 인해 몰려든 관광객들이 많아 감당할 여력이 없는 탓이다.</p>
<p>그래도 어촌체험프로그램은 지속된다. 6월부터 10월까지 심곡항 방파제 안쪽에서 투명카누를 탈 수 있다. 말 그대로 카누 자체가 투명하기에 배 위에서 물속을 훤히 볼 수 있다. 참가비용은 1인당 만원이며 2인용과 4인용이 구비되어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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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헌화가의 풍경 닮은 헌화로</p>
<p>심곡에는 바다부채길 말고도 전국적으로 유명한 길이 더 있다. 헌화로다. 이름이 귀에 익다고 느낀다면 헌화가를 아는 이유일 것이다. 심곡항에서 금진에 이르는 해안도로의 풍광이 헌화가의 설화 속 배경과 흡사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p>
<p>심곡항에서 금진 구간의 헌화로가 생긴 건 19년 전이다. 그 전에는 길 대신 해안을 따라 철책이 있었다. 철책은 헌화로가 뚫리면서 단계적으로 철거되고 있다. 바다부채길이 도보 탐방로라면 헌화로는 드라이브 코스로 명성이 자자하다. 심곡항에서 금진항에 이르는 코스는 굽이를 돌 때마다 천혜의 자연경관을 선사한다. 닮은 듯 다른 매 굽이마다의 풍경은 찬찬히 볼수록 경이롭다. 헌화로 좌측으로는 동해의 수평선과 운치 있는 갯바위들이 모습을 바꾸며 나타나고 우측으로는 정적인 절벽이 우직한 자태로 동해를 내려다보고 있다. 절묘한 곡선이 이어지는 헌화로는 음악에 빗대자면 현악기로 연주하는 변주곡 같다.</p>
<p>헌화로를 배경으로 한 TV광고와 드라마 촬영들이 적지 않다. 특히 드라이브 코스의 명소답게 자동차 광고가 많다. CF를 따라 하겠다고 월파(越波)가 있을 때에 헌화로를 가는 건 위험천만하다. 도로를 덮치는 파도 속에 주먹 만 한 돌들이 섞여 있을 수 있는 탓이다.</p>
<p>헌화로의 묘미를 보다 디테일하게 음미하기 위해서는 절벽에 자란 향나무와 소나무를 놓쳐서는 안 된다. 척박한 돌산에 뿌리내린 향나무는 해풍을 맞으며 보다 향내가 짙어졌다. 소나무는 그 자태가 여느 곳의 소나무들과는 차이가 있다. 절벽에서 자라는 소나무들은 살기 위해 몸을 뒤튼다. 그래서일까. 이곳의 소나무들은 자신들이 내려다보는 해안도로와 닮았다. 구불구불 몸을 틀어 최대한 자라지 않는다. 대신 아래로, 보다 깊이 뿌리를 내린다. 이런 나무들의 노력 때문일까. 아찔한 기암괴석이 많음에도 낙석이 없다고 한다.</p>
<p>어촌계장님이 운영하는 횟집에서 모듬회와 매운탕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숙소를 찾았다. 심곡의 모든 숙소는 민박이다. 숙박을 생각한다면 현금을 준비해서 가는 편이 좋다. 필자는 심곡항과 붙어 있는 나폴리에서 민박을 하기로 했다. 어촌계장님의 횟집 2층도 민박을 하지만 지금은 미역이 보관되어 있어 곤란하단다. 심곡에서는 미역이 왕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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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아름다운 풍경과 휴식의 섬</p>
<p>숙소가 있는 3층으로 이동하던 중 계단 벽을 따라 붙여진 글귀들에 눈이 간다. 손님들이 남긴 것들이다. 그중 인상적인 글귀를 옮겨본다. “아름다운 카페 나폴리에서 마음의 편안함을 얻고 갑니다. 여기 와서 그림을 배우고 싶어졌습니다.” 순간 취재로 인해 조급했던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나는 심곡의 겉만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이 메모를 남긴 이는 이곳, 심곡에서 또 다른 자신과 만난 것이리라. 솔직해서, 좋은 시만큼이나 감동적인 글귀가 하루의 갈무리를 돕는다.</p>
<p>다음 날 새벽, 본격적인 일정을 소화하기 전에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어지간한 곳에는 다 있는 교회가 없다. 대신 서낭당(성황당)이 있다. 심곡주민들은 일 년에 두 번 서낭당에서 고사를 지낸다. 단오에는 풍어제를 올리고 정월대보름에는 안전무사를 기원하는 고사를 지낸다.</p>
<p>아침 식사는 “삼식이 형님 망치”라는 유머러스한 내용의 현수막을 내걸고 있는 시골식당에서 하기로 했다. 사람 좋게 생긴 식당 주인 이돈진(71)씨에게 현수막의 내용에 대해 물었다. “한 7, 8년 전에 조선소 근로자들이 와서 망치매운탕을 먹더니 너무 맛있대. 삼식이라고 망치랑 닮은 고기가 있는데 망치매운탕을 먹어보니 이게 더 맛있다 이거야. 그래서 망치가 삼식이 형이라고 해서 붙인 거지.” 망치매운탕은 매운탕에 기대하는 맛을 잘 담고 있다. 생선살은 아귀와 비슷한 식감에 고소한 맛이 난다. 국물은 칼칼하면서도 담백하다. 또한 비린내가 없어 냄새 때문에 생선탕을 못 먹는 사람도 거부감 없이 먹을 만하다.</p>
<p>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은 국내유일의 해안단구로 천연기념물 437호로 지정되어 있다. 바다부채길이란 이름은 정동진의 “부채끝”이란 지명과, 탐방로가 위치한 지형을 위에서 내려 보면 부채를 펼쳐 놓은 모양과 비슷하다 해서 붙여졌다. 총 길이 2.86km로 보통 걸음으로 걷는다면 편도 70분 가량이 소요된다. 탐방로의 진입 구간은 심곡매표소와 정동매표소 두 곳이 있다.</p>
<p>필자는 심곡매표소에서 출발했다. 출발지는 계단길이다. 계단이 끝나자 귀가 시원해진다. 갯바위에 부딪히는 파도가 웅장하다. 눈은 멀리 탁 트인 전망에 끌린다. 파란 하늘과 쪽빛 바다, 해안단구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탐방객들은 그중 자연이 허락한 길만을 따라 걷는다. 탐방로는 전 구간이 교량형태로 철제와 목재가 구간별로 번갈아 있다.</p>
<p>보다 쾌적한 탐방을 위해 몇 가지 당부를 하고 싶다. 일단 중간에 화장실이 없으므로 매표소 근처의 화장실을 이용하고 출발하는 편이 좋다. 그리고 뾰족한 힐이 있는 구두를 신었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 철제교량의 틈 사이에 힐이 끼일 수 있는 탓이다. 마지막으로 해가 머리 위를 넘어가기 전에는 모자가 필수다. 오전 동안에는 그늘이 없다.</p>
<p>해안가를 따라 이어진 건 탐방로만이 아니다. 아직 제거되지 않은 철책이 탐방로와 나란하다. 오로지 강원도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중간 중간에는 비어있는 해안경계초소들이 있다. 망망대해를 보며 경계근무를 섰을 군인들의 심경을 떠올려본다. 이토록 아름다운 해변에 철책이라니. 녹슨 철책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아프다.</p>
<p>사실상 장엄하고 아름답지 않은 동해바다는 없다. 다른 동해안과 바다부채길의 차이는 당연 해안단구다. 2300만 년 전의 지각변동으로 형성된 해안단구는 지층이 선명하다. 층별로 다른 지질을 보다 보면 아득한 긴 세월 앞에 숙연한 마음마저 든다. 단구는 동해를 향해 솟구치는 형상을 하고 있다. 45도 가량의 각도로 솟아오른 단구는 무생물임에도 불구하고 역동성과 생명력이 느껴진다.</p>
<p>심곡매표소에서 출발해 약 1km를 걸으면 심곡마을 서낭당의 전설이 깃든 부채바위가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부채바위를 반쯤 돌면 전망대가 나오는데 해안가에서 얼마간 바다 쪽으로 들어가 있어 사방이 바다다. 멀리 걸어온 길과 가야할 길이 보인다.</p>
<p>부채바위에서 860m를 더 걸으면 뭔가 닮은꼴을 떠올리게 하는 바위와 마주하게 된다. 투구바위다. 그 모습이 투구를 쓴 장군의 옆모습과 닮았다. 투구바위를 지나 약 1km를 더 걸으면 편도 탐방의 끝을 알리는 썬크루즈 리조트가 보인다. 편도로 탐방을 할 경우 가장 궁금한 건 돌아갈 교통편일 것이다. 우선 주말과 공휴일 중 바다부채길이 개방된 날일 경우에 한해서는 정동진과 심곡을 오가는 순환버스가 3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 평일에는 심곡항에서 출발하여 정동매표소로 나온 뒤 택시 이용을 권한다.</p>
<p>심곡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건물이 여러 채 올라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귀어한 원주민들이 짓고 있는 건물들이다. 변화하는 심곡의 단면이다. 어업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심곡은 이제 관광업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마을 주민들 간의 소소한 갈등이 없잖아 있다. 몰려든 관광객들은 장사를 하는 이들에게는 호황이지만 그렇지 않은 주민들에게는 소음이다. 마을의 공터가 좁기 때문에 주민의 집 마당에 무단주차를 하는 관광객들도 있다고 한다. 관광객들에게는 하루 이틀의 시간이지만 원주민들에게는 삶의 터전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공간을 내어주었듯 방문객들도 그러하길 기대해본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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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강릉 심곡마을 여행 Tip</p>
<p>드라이브 명소인 헌화로는 월파가 있을 경우에는 자제해야 한다. 월파 속에 주먹만 한 돌들이 섞여 있어 차량파손과 인명피해의 우려가 있다. 이 사실을 모르고 호기를 부리다 낭패를 본 외지인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바다부채길의 경우도 풍랑주의보가 발령되거나 너울성 파도가 치는 날에는 입장이 곤란하다. 사전에 강릉 관광개발공사 ‘정동 심곡 바다부채길’ 홈페이지(searoad.gtdc.or.kr)에 들러 개방 여부를 확인하고 가는 편이 확실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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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토박이 박영규씨가 들려주는 격세지감</p>
<p>6.25 전쟁 일어난지도 몰랐던 오지, 지금은 사람 북적</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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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마을 내 텃밭에서 만난 박영규(85)씨에게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 마을은 전쟁이 난지도 몰랐어. 인민군이 나타났을 때도 무슨 일인지 몰랐어.” 과거 7번 국도가 뚫리기 전 심곡은 재를 넘는 산길만이 외부와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였다고 한다. 그로 인해 한국전쟁 당시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었다. 당시 열여덟 살의 박영규씨는 평소처럼 소에게 풀을 먹이고자 산으로 끌고 갔다가 총을 든 사람들을 만났다. 당시 박영규씨는 총을 든 소년들이 인민군인지 몰랐다고 한다. 인민군은 재차 손을 들라고 하더니 소를 매어두고 따라오도록 했다. 심곡과 금진 사이의 금진재를 넘어 도착한 곳은 공동묘지였다. 그곳에는 박영규씨와 같은 청년들이 대여섯 명 더 있었다. 인민군은 모인 청년들에게 건빵을 주더니 탄박스를 나르게 했다. 박영규씨와 청년들은 시키는 대로 하다 기회를 봐 달아났다고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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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일 년에 두 번 고사 지내는 서낭당</p>
<p>꿈 속 여인의 화상, 바다에서 건져 모셔</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0520143_0.JPG" alt="P33 강릉심곡마을 서낭당.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정갈하게 관리가 잘 된 서낭당 안에는 여서낭 세 분이 모셔져 있다. 여서낭과 관련한 전설은 2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씨 노인의 꿈에 어여쁜 여인이 나타났다. 여인은 자신이 심곡과 정동진 사이에 있는 부채바위 근방에 떠내려가고 있으니 구해 달라고 했다. 이씨 노인이 이튿날 새벽 일찍 배를 타고 가보니 부채바위 끝에 나무궤짝이 걸려 있다. 그 궤짝 안에 있던 건 여자의 화상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그 그림을 서낭당에 모시게 된 거다. 당시 떠내려 온 그림은 아직까지도 색깔이 변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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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진설명</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0037311_0.JPG" alt="P28 강릉심곡마을 해안단구.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 </p>
<p>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은 2300만 년 전 지각변동을 관찰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해안단구 지역이다. 부채바위 전망대.</p>
<p>심곡매표소에서 1.8Km거리에 있는 투구바위 부근 해안단구.</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0057222_0.JPG" alt="P29 강릉심곡마을 부채바위길 탐방로.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억겁의 시간이 만든 해안단구를 따라 바다부채길 탐방로가 이어져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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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0227923_0.JPG" alt="P30 강릉심곡마을 집필건어물가게.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0136774_0.JPG" alt="P30 강릉심곡마을 돌미역건조.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인물이 훤하고 글씨를 잘 쓴다는 남편 따라 주문진에서 심곡으로 시집 온 지 51년 됐다는 박영성(71) 할머니. 옛 지명을 딴 자신의 건어물 가게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왼쪽)</p>
<p>채취 시기가 지났지만 뒤늦게 소량 채취해 마을 평상에서 건조 중인 돌미역.</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0328046_0.JPG" alt="P31 강릉심곡마을 헌화로.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바다와 도로가 굽이치며 심곡항과 금진항을 잇는 2Km 남짓 되는 헌화로는 많은 드라마와 광고 촬영지로 유명하다. 드라이브, 라이딩, 걷기 모두 좋은 길이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0505479_0.JPG" alt="P32 강릉심곡마을 원도식어촌계장.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원두식 심곡어촌계장.</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1055023_0.JPG" alt="P32 강릉심곡마을 심곡항.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동트는 심곡항 앞바다는 바라보는 이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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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강릉 심곡마을엔</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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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강감찬 장군</p>
<p>설화 전해오는</p>
<p>장엄한 투구바위</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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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심곡매표소에서 출발해 바다부채길 1.86km 지점에 이르면 투구바위를 만날 수 있다. 투구바위를 보면 그 이름이 쉽게 이해된다. 철로 된 투구를 눈썹까지 눌러쓴 장수의 옆모습이다. 바라보는 방향이 파도가 몰려오는 바다 쪽이기에 사뭇 비장한 느낌마저 든다. 투구바위는 육발 호랑이라는 전설과 맞물려 강감찬 장군의 형상으로 비춰지기도 한다.</p>
<p>이 지역에는 고려시대 명장인 강감찬 장군과 관련된 설화가 있다. ‘육발 호랑이의 내기 두기’라는 설화로 강감찬 장군이 등장한다. 아주 옛날 발가락이 여섯 개인 무서운 호랑이가 이 지역에 살았다고 한다. 육발 호랑이는 밤재를 내려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다가 스님으로 변해 접근했다. 스님으로 변한 호랑이는 열십자의 바둑판을 그려 행인에게 내기 바둑을 두자고 했고 그때마다 이겨 사람들을 잡아먹었다. 그렇게 희생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당시에는 강릉으로 넘어가는 길이 밤재를 넘는 길 하나여서 많은 사람들이 육발 호랑이를 두려워하면서도 재를 넘어야 했다.</p>
<p>그러던 중 마침 명장인 강감찬 장군이 강릉에 부임해 왔다. 마을 주민들은 장군에게 육발 호랑이를 없애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장군이 관리를 불러 ‘밤재에 가면 스님이 있을 터니 그 스님에게 이걸 갖다 주거라’하고 편지를 써주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이랬다. ‘이 편지를 받은 즉시 그곳을 떠나거라. 만약 떠나지 않으면 일족을 멸할 것이다.’ 육발 호랑이는 그 편지를 쓴 이가 강감찬 장군임을 알고 백두산으로 도망을 갔고 이후 육발 호랑이로 인해 죽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p>
<p>심곡에는 현재 43가구 9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그중 61세 이상이 52명으로 고령층이 반이 넘는다. 심곡의 모든 주민은 기본적으로 어업에 종사한다. 물론 최근 개방된 바다부채길로 인해 빠르게 관광업으로 변모하는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p>
<p>그러나 심곡은 어업만으로도 풍족한 곳이다. 해양수산연구소에서 주기적으로 어자원의 종자를 뿌려두는데 어촌계에서 관리를 잘해 어족이 넘쳐난다. 필자는 바다부채길을 걷다 해변에 밀려온 한 포대 분량의 미역을 보기도 했다.</p>
<p>심곡의 주민들 중에는 심곡 토박이 남편과 타지역에서 온 아내가 부부인 경우가 종종 있다. 해녀로 일하러 심곡에 왔다가 심곡의 사내와 반려자가 된 경우다. 제주 해녀였는데 심곡 해녀가 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심곡에는 해녀와 해남이 없다. 때문에 해녀가 필요한 성게 작업을 할 때는 주문진, 구룡포 등지에서 해녀를 불러온다고 한다.</p>
<p>마을 내 10여 곳 남짓한 식당에서 파는 먹거리로는 자연산 회, 망치매운탕, 감자옹심이, 감자전, 수수전병 등이 있다. 마을 특산품은 미역, 고리매, 홍합(섭), 성게, 전복 등이 있으며 마을 곳곳에서 건어물 가게를 볼 수 있다.</p>
<p> </p>
<p>투구바위.</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0642305_0.JPG" alt="P35 강릉심곡마을 특산품돌미역.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심곡 특산품 돌미역.(위)</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0711896_0.JPG" alt="P35 건어물가게.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마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건어물 가게.</p>
<p> </p>
<p>-----</p>
<p>담백하고 칼칼한 동해의 맛</p>
<p> </p>
<p>어부의 밥상 <망치매운탕></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0550886_0.JPG" alt="P35 강릉심곡마을 망치매운탕.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동해의 차고 깊은 바다에 사는 물망치(고무꺽정이)는 냉수성 어종으로 최대 몸길이 46센티까지 성장하며 형태는 아귀와 비슷하지만 생태 자체가 확연히 다르다. 칼로리가 낮고 칼륨, 인 등을 함유하고 있어 혈압을 낮추는 데 효과적이며 골다공증 예방과 다이어트에도 좋다. 15년 전에 귀어한 이돈진씨는 심곡의 특산물로 음식을 개발하고 싶었고 그리하여 당시에는 대접받지 못하던 물망치를 연구했다고 한다. 외면 받던 어족자원에 대한 관심이 강릉지역 향토음식 중 대표 매운탕인 망치매운탕을 탄생시켰다. 망치매운탕은 일반적인 매운탕과는 다른 맛을 준다. 매운탕이 지닌 일반적인 맛도 있지만 망치 고유의 맛이 첨가돼 새로운 식감을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생선 특유의 비린내가 없어 국물 맛이 시원하고 담백하다. 흔히 못생긴 생선으로 아귀와 망치를 꼽는데, 망치매운탕을 맛본 이들은 한결같이 맛은 생긴 것과는 별로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전날 술을 마셨거나, 뭔가 칼칼한 음식이 먹고 싶을 때, 망치매운탕을 먹으면 더부룩한 속이 진정되고 입맛까지 살아난다고 한다.</p>
<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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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찾아가는 길</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11/20170911100630725_0.jpg" alt="P35 강릉심곡마을 지도.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주소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헌화로 658</p>
<p>전화번호 010-6373-5231</p>
<p>홈페이지 simgok.seantour.com</p>
<p>교통편</p>
<ul>
<li>승용차: 강릉IC-7번국도(구,동해도로), 정동진방향-정동무료주차장 -심곡무료주차장</li>
<li>시내버스: 109번(1일 9회 60분 간격 운행), 109-1번(1일 2회 운행)</li>
</ul>
<p>강릉시외버스터미널-정동진-썬크루즈</p>
<ul>
<li>순환버스: 정동진-썬크루즈-심곡(30분 간격 운행)</li>
</ul>
<p> </p>
<p> </p>2017-09-11T00:55:31.000Z2017-09-11T01:18:13.000Z관리*도시 인근 전통이 숨쉬는 바다 오래된 제당들과 물질하는 해녀 이야기 울산 주저마을<p> 도시 인근 전통이 숨쉬는 바다</p>
<p>오래된 제당들과 물질하는 해녀 이야기</p>
<p> </p>
<p>울산 주전마을</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08/20170908152136035_0.JPG" alt="P16-17 울산주전마을 마을전경.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 글 박성천 사진 최현배</p>
<p> </p>
<p>떠오르는 태양에</p>
<p>붉게 물드는</p>
<p>가슴 벅찬 동해바다</p>
<p> </p>
<p>제당 설화 전해오는 전통의 마을</p>
<p>산과 바다와 같은 자연에도 운명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울산 동구에 자리한 주전마을을 둘러보며 든 생각이다. 세상이 몰라볼 정도로 변한 것을 이를 때 상전벽해(桑田碧海)라고 한다. 주전(朱田)마을도 불과 몇 년 사이에 크나큰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자연도 사람의 운명처럼 부침을 겪기 마련인 것은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 되는 경우를 보면 그렇다.</p>
<p>주전마을에는 주민을 지키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많은 제당이 있었다. 모두 7개의 작은 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보마을, 상마을, 중마을, 아랫마을, 큰불마을, 변덕마을, 새마을이 그것이다. 대체로 바다에 면한 마을은 제당문화가 발달해 있기 마련인데 이곳 주전마을도 예외는 아니다. ‘마을신의 집’인 제당의 흔적이 10곳에 남아 있다는 것은 남다른 전통문화가 생활 속에 뿌리박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p>
<p>제당과 관련해 전해 내려오는 설화가 있다. 다음은 이문희 울산시 문화해설사가 소개해준 ‘바다로 이어진 길-염포산을 걷다’에 나오는 내용 중 ‘큰불마을 제당’에 관한 내용이다.</p>
<p>오랜 옛날 큰불마을 앞바다에는 할매신이 버티고 있었다. 마을 누구도 할매신의 노여움 때문에 바다에 나갈 수 없었다. 할매신의 노기를 채 다스리지 못하고 바다에 나간 이들은 모두 유명을 달리했다. 한편으로 이 마을에는 영험한 할배신이 거주하고 있었다. 어느 날 보다 못한 할배신이 바다를 향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쯤 주문을 반복했을까. 거짓말처럼 파도가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노도와 같던 바다가 숨죽이듯 얼어붙은 것이다. 얼마 후 사람들은 이곳에 제당을 짓고 할배신을 기리기 시작했다. 지금도 매년 정월 보름이면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p>
<p>스토리는 오랜 세월을 거쳐 문화로 전이된다. 주전마을에 대대로 전승돼온 설화는 이곳만의 문화와 역사로 응결되었을 터다. 여행자들은 이곳에 들러 원래의 이야기에 자신만의 해석을 가미해 새로운 스토리를 엮을 수 있다.</p>
<p>얼핏, 주전마을을 확대해보면 대략 울산이라는 도시가 가늠된다. 울산은 남동부 지역의 교통의 요지이자 산업과 관광이 조화를 이룬 도시다. 1962년 울산공업단지가 건설돼 한국의 대표적인 공업도시로 성장했지만, 이면에는 반구대 암각화, 처용암전설 등 유수의 전통과 문화가 숨 쉬는 고장이기도 하다.</p>
<p>역으로, 울산이라는 도시를 축소해보면 대략 주전마을이 그려진다. 전통이면 전통, 문화면 문화, 경관이면 경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다. 70년대 초만 해도 그린벨트에 묶여 있어 개발이 제한된 전형적인 시골이다. 그러나 지금의 주전은 주말이면 전국 각지에서 1000여 명의 관광객이 몰려올 정도로 울산의 명소가 되었다.</p>
<p> </p>
<p>돌미역, 전복 특산품…해녀체험 인기</p>
<p>울산 주전마을로 향하는 길은 과거와 현재, 문화와 전통, 체험과 상상 등 상이한 시간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시간이다. 빛고을을 출발한 자동차는 남해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 울산 외곽도로를 거쳐 4시간 여를 달렸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동해바다 아름다운 어촌마을로 향한다는 설렘 때문인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p>
<p>“2011년도 국토해양부 마을 경관사업에 선정돼 4년간 38억이 투자됐습니다. 주전마을의 독특한 문화콘텐츠를 발굴하고 제당문화를 알리기 위한 차원이었죠.”</p>
<p>강원보 어촌계장(63)의 설명이다. 경관사업 이후 주전마을은 ‘상전벽해’라는 말이 실감될 정도로 변신에 성공했다. 구청에서도 차도와 인도를 분리하는 공사를 지원해 차량의 진입이 한결 수월해졌다.</p>
<p>강 계장은 “원래는 봉대산 주전고개가 유일한 관문이었으나, 최근 마성터널 개통으로 접근이 수월해지면서 도심속 휴양지로 부상했다”며 “2013년 어촌체험마을로 지정된 이후로 체험과 식사, 숙박을 즐길 수 있는 마을”로 인식됐다고 덧붙였다.</p>
<p>그는 젊은 시절에는 현대자동차, 현대건설에서 근무했다. 한때는 중동지역으로 나가 세계를 누비며 경제발전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50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고향 마을을 위해 뭔가 보람있는 일을 해 보고 싶어 어촌계에 몸을 담았다. “울산시민 120만을 비롯해 전국의 관광객이 찾아올 수 있는 명품마을을 만들자”는 모토를 내걸었다.</p>
<p>어촌계장이 일러주는 주전마을의 특산물로는 돌미역, 전복, 활어회를 빼놓을 수 없다. 모두 자연산이다. 조선시대만 해도 돌미역과 전복은 나라에 진상될 정도였다고 한다. 이곳은 난류와 한류의 교차지여서 미역이 무성하지도 그렇다고 빈약하지도 않다. 아쉬운 것은 자연산이다 보니 상시 공급이 안 된다는 것이다.</p>
<p> </p>
<p>풍요로움, 상서로움 담은 마을 이름</p>
<p>그렇다면 주전마을의 지명은 어디에서 유래됐을까? ‘주전(朱田)’이란 말 그대로 붉은 땅, 붉은 밭이라는 뜻이다. 문헌에는 조선 정조 때 주전리로 불렸다고 나온다. 아마도 ‘붉은 밭’이라는 뜻은 주위가 탁 트여서 그렇게 불린 듯싶다. ‘밭’은 곧 삶의 목장이고 터전인 바다를 상징할 터이다. 한편으로 어떤 이는 “등대가 비치면 붉은 바다를 이루기 때문에 주전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말한다. 주전이라는 어원에는 풍요와 상서러움, 수려의 의미가 깃들어 있다.</p>
<p>주전마을을 둘러보다 보면 무엇보다 경관에 마음을 뺏긴다. ‘예쁘면 다 용서된다’는 말이 이곳에서도 통용될 듯싶다. 마을의 내력을 가장 상징적이며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방파제다. 짙푸른 파도와 회색의 방파제, 붉은색 탑이 이채로운 풍경을 연출한다. 해산물을 막 채취하고 나온 해녀를 형상화한 벽화는 관광명소로 으뜸이다. 물질을 끝내고 어구와 망태기를 지고 나오는 모습에서 삶의 숭고함과 밥벌이의 고단함이 읽힌다.</p>
<p>“우리 마을에는 여느 어촌과 달리 해녀들이 많습니다. 어촌센터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 가운데 해녀체험이 가장 인기가 있지요.”</p>
<p>어촌센터 사무장을 맡고 있는 김령경 씨(58)의 말이다. 김 사무장은 “최근에 어촌 관련 시설이 갖춰지면서 캠핑이나 맨손잡이 체험과 같은 바다체험을 하러 오는 관광객들이 많이 늘었다”며 “주전마을은 도시와 인접해 있는데다 경관이 아름답고 깨끗해 인기가 좋다”고 강조했다. 주말이면 어촌센터에서 운영하는 숙박시설이 다 찰 정도라고 한다. 특히 매년 7월이면 열리는 조선해양축제에는 일산해수욕장을 비롯 이곳 해변 일원에서 다양한 체험위주의 행사가 펼쳐져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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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몽돌해변, 봉수대, 대왕암공원 ‘인기’</p>
<p>주전마을과 인근에는 이름난 관광지와 유적지가 많다. 김 사무장이 추천한 곳을 차례차례 발품을 팔아 방문해본다. 몽돌해변은 주전마을의 명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의 모래밭은 까만 옥구슬을 흩뿌려놓은 듯한 모습이다. 밀물과 썰물 때 몽돌을 적시는 파도소리에는 미세한 차이가 있다. 밀물일 때는 다소 둔탁한 저음이지만, 썰물일 때는 세밀한 고음이다. 귓가가 시원해지며 온몸이 절로 상쾌해진다. 파도와 몽돌이 이루는 화음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 가운데 하나다.</p>
<p>봉대산 임도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주전봉수대(울산시 기념물 3호)를 볼 수 있다. 봉수대는 오늘날로 치면 통신수단이다. 모두 다섯 가지 신호로 상황을 알렸다고 하는데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을 이용했다. 봉대산 봉수대는 조선 세조(1455~1468)때 처음 건립됐다고 전해진다. 그러다 2000년에 원통형 석축으로 복원했다. 봉수대 옆에는 해수관음상과 봉호사가 있다. 자애로운 해수관음상을 보다 말고 앞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끝없이 펼쳐진 동해바다를 만날 수 있다. 좌측으로 주전마을의 그림 같은 풍경이 들어오고, 우측으로는 현대중공업의 오늘이 펼쳐진다.</p>
<p>주전마을을 들른 후 반드시 가봐야 할 곳은 대왕암공원이다. 혹자들은 하늘로 치솟는 용의 모습을 닮아 대왕암이라 한다. 신라 문무대왕비가 죽어 동해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 묻혔다는 전설도 있다. 그 뜻과 결기가 어찌나 굳은지 바다빛깔은 푸르다 못해 검을 정도다. 공원 초입부터 대왕암에 이르는 길은 곰솔 등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거져 있다. 초여름 더위를 씻어주는 그늘은 서늘함과 특유의 아늑함을 준다. 또한 공원에는 지난 1906년에 세워진 울기등대도 있어 또다른 역사를 제공한다. 공원을 돌아 계단을 내려가면 백사장이 아름다운 일산해수욕장이 나온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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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울산 주전마을 여행 Tip</p>
<p>해안을 따라 형성된 마을의 특성 상, 해안 어디에서나 바다의 풍광을 감상할 수 있는 게 주전마을의 특징이다. 인도에 설치된 데크를 따라 걸어보길 권한다. 해가 어둑해질 무렵 노을이 물드는 해안가를 걸으면 주전마을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절대 차를 타지 말고 직접 걷는 게 좋다. 숙박시설과 찻집, 식당은 충분해 취향에 맞게 고를 수 있다. 바다체험을 원할 경우 미리 어촌체험센터에 연락해 일정을 조정하면 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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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울산 주전마을에서 만난 사람</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08/20170908152416479_0.JPG" alt="P23 울산주전마을 해녀.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35년 경력의 ‘영계’ 해녀 조정남씨</p>
<p>“힘들어도 멈출 수 없는 것이 물질의 마력”</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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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올해로 물질을 해온 지 35년이 넘었습니다. 그래도 이곳 해녀 중에는 ‘영계’라 부를 만큼 젊은 축에 속하지요.”</p>
<p>조정남(62) 씨는 환하게 웃으며 주전마을을 찾은 일행을 맞았다. 이곳이 친정인 조 씨는 결혼하면서부터 물질을 시작했다고 한다. 30년 넘도록 물질을 해왔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편안한 인상이었다.</p>
<p>조 씨는 “이곳 해녀들은 59세부터 85세까지 연령대가 높다”며 “제주에서 건너온 1세대 해녀분도 몇 분 있고 나머지는 대부분 70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들은 힘든 물질을 왜 하느냐고 묻는데, 어촌에 살기 위해서는 이곳 풍습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p>
<p>주전에는 해녀체험이 있을 만큼 해녀마을로 알려져 있다. 모두 ‘나잠회’라는 모임에 가입돼 활동을 한다. (현재 우리나라 해녀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된 상태다.)</p>
<p>“힘든 것은 말도 못하지요. 누가 물질을 배운다고 하면 말리고 싶어요. 고무로 된 잠수옷을 입고 장시간 물속에 있으면 산소 공급이 안 돼 뼈마디가 쿡쿡 쑤시죠.”</p>
<p>보통 사람들도 물속에 오랫동안 있다 보면 체력소모가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물질을 계속해야 하는 것은 숙명인가 보다. “예전에는 해녀들 힘으로 마을이 섰어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어촌에는 젊은 남자들이 없었습니다. 모두 바다에 나가 일을 하다가 사고로 죽는 경우가 많았지요.”</p>
<p>연안에는 말동성게와 해초가, 수심이 깊은 곳에는 해삼, 키조개가 많다. 성게는 6월 말에서 8월 말 사이에 수확을 하고 10월부터는 자연산 돌미역을 채취한다. 보통 9시부터 12시까지 물질을 하는데 많을 땐 70~80kg 정도 채취한다. 물론 해녀들마다 조금씩 차이가 난다.</p>
<p>“어릴 때부터 바다를 접했기 때문에 무섭지는 않아요. 입수를 하면 먼저 수온을 느낍니다. 그리고 밀물과 썰물 조류에 따라 그날 작업의 상태를 가늠할 수가 있지요.”</p>
<p>물에 들어가면 대략 30초에서 1분까지 숨을 쉬지 않고 일을 한다. 좋은 해산물을 채취할 때의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전복과 돌문어 잡을 때가 가장 기분이 좋지요. 문어는 돌구멍에 붙어 있어서 잡기가 수월한 편이에요.”</p>
<p>조 씨의 남편은 젊은 시절에는 현대 중공업에 다녔다. 남편이 대기업에 다니니까 생활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젊어서 배운 물질이라 운명이라 생각하고 했다. “어촌에 살다보면 안 할 수가 없다”며 “어느 때는 진통제를 먹고 들어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해녀들끼리 주전 여자들이 불쌍하다고 농담삼아 말을 하기도 한다”고 했다.</p>
<p>“어촌계에서 강제로라도 해녀 퇴직제도를 만들어 못하게 했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힘든 물일을 계속 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라도 못하게 하면 아마 해녀들이 들고 일어날 거예요. 그만큼 바다에 사는 여자들이 생활력이 강하거든요.”(웃음)</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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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진설명</p>
<p>울산 주전마을은 과거와 현재, 문화와 전통이 조화를 이룬 어촌마을이다. 사진은 봉대산에서 바라본 마을 전경. 망망하게 펼쳐진 푸른 바다가 한여름의 더위를 씻어준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08/20170908152146814_0.JPG" alt="P18 울산주전마을 일출.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이른 아침 수면 위로 떠오른 붉은 태양이 조업을 위해 먼 바다로 나가는 어선을 비추고 있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08/20170908152158402_0.JPG" alt="P19 울산주전마을 방파제.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주전항 앞에 설치된 기다란 방파제. 탑 모양의 등대와 방파제의 벽화가 이채롭다.</p>
<p>몽돌해변은 1.5km의 모래밭에 옥구슬 모양의 몽돌이 펼쳐진 해안을 말한다. 밀물과 썰물 때 몽돌을 적시는 파도 소리는 한 편의 음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08/20170908152300475_0.JPG" alt="P21 울산주전마을 강원보어촌계장.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강원보 주전마을 어촌계장.</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08/20170908152352733_0.JPG" alt="P21 울산주전마을 어구손질모습.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08/20170908152330854_0.JPG" alt="P21 울산주전마을 대왕암공원.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조업을 마친 주전항 어부가 어선 위에서 어구를 손질하고 있는 모습.(위)</p>
<p>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한 대왕암 공원. 자연을 느끼며 산책하기에 그만이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08/20170908152405854_0.JPG" alt="P22 울산주전마을 일산해수욕장.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주전마을과 가까운 일산해수욕장은 여름철 도심 속 휴양지로 각광을 받는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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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울산 주전마을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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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0년 역사 지닌 마을</p>
<p>옛 제당 상징하는</p>
<p>독특한 조형물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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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주전마을은 200여 년의 역사와 전통을 지닌 마을이다. 문헌에 따르면 주전동의 지명은 조선 정조 때 주전리와 주전해리(朱田海里) 두 개의 동으로 돼 있다가, 고종 31년(1894)에 주전동으로 변경됐다. 이후 주전동 명칭은 1911년 일제 강점기까지 지속됐으며,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진 1914년 다시 주전리로 되었다.</p>
<p>주전마을은 크게 7개의 마을로 구성돼 있다. 각각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봉대산의 봉수대 아래 있다 해서 붙여진 보밑마을, 위쪽에 자리한 상마을, 중마을, 아랫마을, 큰불마을과 언덕 위에 있는 번덕마을, 새마을 등 이렇게 7곳의 작은 마을들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들은 모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의좋은 형제를 떠올리게 한다.</p>
<p>이곳에는 350여 가구에 약 860여 명의 주민들이 거주한다. 그 가운데 어촌계 인구는 400여명이며 계원은 126명에 이른다.</p>
<p>주전이라는 지명은 주밭(朱田)이라는 뜻이다. 붉은 밭이라는 뜻을 지녔는데, 땅의 빛깔에 의해 이름이 붙여졌다고 볼 수 있다. 일설에 높은 봉우리를 ‘명자산(明自山)’이라 불렸던 것으로 보아, 주전이 붉은 토전을 가진 곳이라는 의미 외에도 그만큼 밝고 주위가 탁 트인 공간임을 추정할 수 있다.</p>
<p>주전마을은 ‘神들의 마을’로 알려져 있다. 대체로 바다를 끼고 있는 마을에 풍어와 안전을 기원하는 대상이 있는 것처럼 이곳도 예외는 아니다. 10곳에 걸쳐 ‘마을신의 집’이라고 불리는 제당이 있었다.</p>
<p>각각의 마을에 있던 제당은 지난 2005년 경로당이 신축되면서 사라지고, 해안가에 상징 조형물로 새롭게 탄생했다. 당시 모든 제당의 위패를 경로당 2층으로 옮겼다. 이로써 마을 사람들의 일상속에 있던 제당은 사라지거나, 일부의 상징적 공간은 그대로 남아 마을의 이미지를 대변하고 있다.</p>
<p>그러나 제당이 없어졌다 해서 그 정신과 가치까지 썰물처럼 밀려나간 것은 아니다. 마을에서는 1년에 몇 차례에 걸쳐 제를 지낸다. 김령경 주전마을어촌체험센터 사무장은 “명절날(구정, 추석)과 6·25 때 그리고 특정한 날을 정해 제를 지낸다”며 “바다를 벗하며 살아온 주전마을은 여느 곳과는 다른 독특한 문화가 주민들의 삶 속에 뿌리박혀 있다”고 밝혔다.</p>
<p>특히 번덕마을 제당에는 당목이 남아 있다. 이곳은 넓은 들을 끼고 있어서 주전마을 중 가장 농업에 종사하는 주민이 많다. 현재는 신 또는 할배신을 상징하는 당목이 남아 있어 신격을 대신한다. 이곳을 찾는 외지인이나 주민들은 오래 전 조상들이 그러했듯 이곳에서 안녕을 기원한다.</p>
<p>주전마을의 대표 신 동사당은 마을의 신들을 대표하는 신이었다. 주전초등학교 북쪽에 있던 동사당은 지금은 주전경로당에 마련된 사당으로 옮겨 봉안하고 있다.</p>
<p>지난 2010년 주전마을 경관사업 추진으로 마을은 새롭게 변모했다. 웅숭깊은 전통과 문화를 토대로 그 위에 덧입혀진 경관은 마을이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수려한 해안을 살린 경관과 인문자원이 풍부한 문화는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잔잔한 향기를 선사한다.</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08/20170908152432400_0.JPG" alt="P24 울산주전마을 상징조형물.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주전마을에는 ‘마을신의 집’인 제당의 흔적이 10곳이나 남아 있을 만큼 전통 문화가 숨쉬는 유서 깊은 지역이다.</p>
<p>사진은 제당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상징 조형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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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한 입 가득 상큼한 바다의 맛</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08/20170908152456024_0.JPG" alt="P25 울산주전마을 해초전복물회.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어부의 밥상 <전복해초물회></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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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주전마을 대표 음식으로 물회만 한 게 없다. 그것도 해초가 듬뿍 들어간. 여기에 전복까지 더해진 ‘전복해초물회’ 말이다. 그냥 회보다는 앞에 ‘물’이라는 글자가 붙어 시원함이 배가된다.</p>
<p>여름철 바닷가를 여행하다 보면 뭔가 칼칼하면서도 새콤달콤한 별미를 맛보고 싶을 때가 있다. 이때 물회를 한 사발 먹고 나면 잃었던 입맛이 돌아온다.</p>
<p>별장횟집에 가면 그 물회를 맛볼 수 있다. 지역주민이자 어촌센터 사무국장이 추천하는 곳이니 어련하랴 싶다. 이곳은 주인장 한성용 씨와 해녀 조정남 씨가 운영한다. 주인장 한 씨는 젊은 시절에는 중공업회사에서 근무하며 산업역군으로서의 한때를 보냈다. 상호가 별장이라 으리으리한 고대광실일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전통 가옥을 손 본, 소박한 분위기가 감도는 곳이다.</p>
<p>별장횟집은 자연산 회와 해초물회, 해초초밥을 전문으로 한다. 소담한 분위기만큼이나 음식 은 담백하면서도 감칠맛이 있다.</p>
<p>사발에 듬뿍 담겨 나온 물회를 보자 절로 탄성이 나온다. 눈으로 먼저 맛을 본다는 말이 이런 경우인가 보다. 들어가는 재료만 해도 어림잡아 열 댓가지는 될 듯싶다. 다시마, 미역줄기, 꼬시래기, 톳, 모자반, 서실, 고장초, 전복, 해삼, 멍게, 회 등등….</p>
<p>“육수는 다시마 우린 것을 사용합니다. 여기에 다양한 재료를 넣지요. 과일은 갈아서 쓰는데 배와 파인애플, 오렌지 등을 주로 씁니다.”</p>
<p>주인장의 말에 자부심이 담겨 있다. 물회는 양념이 중요한데, 매실효소와 생강, 마늘, 식초, 고추장, 설탕 등을 넣은 초장을 쓴다고 한다. 주인장은 “서울이나 대구에서 온 분들이 우리집 물회를 먹고는 참 맛있다고 말할 때 기분이 좋다”며 “같은 재료도 어떻게 썰고 육수를 내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고 설명했다.</p>
<p>한상 차려온 물회를 숟가락을 놀려 쓱쓱 비빈다. 숟가락에 재료의 싱싱함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기본 상차림도 정갈하고 맛있어 보인다. 새우, 멍게, 소라, 물미역, 해삼, 소라, 호박죽을 차례차례 맛본다. 그리고 잘 섞은 전복해초물회를 가득 떠서 입안에 넣는다. “야호!” 입에 닿기도 전에 초고속으로 감동이 밀려온다.</p>
<p>“와! 이게 무슨 맛이지?” “울산의 맛이 이런 거였구나!”</p>
<p>새콤하면서도 달콤한 그러면서 시원하고 매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육지에서는, 아니 도시에서는 맛보기 힘든 오묘한 맛이다. 입속의 물회를 채 씹기도 전에 숟가락이 사발로 향한다. 게 눈 감추듯 물회를 먹고 공기밥을 사발에 만다. 약간 익은 김칫국에 밥을 말아 먹는 느낌이다. 심심하면서도 담백한 밥이 국물과 섞이자 오묘한 맛으로 변한다. 한번쯤은 꼭 먹어야 할 밥상이다.</p>
<p>문의 052-252-571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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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찾아가는 길</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08/20170908152439824_0.jpg" alt="P25 울산주전마을 지도.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주소 울산광역시 동구 새싹길 23</p>
<p>전화번호 052-209-0111</p>
<p>홈페이지 jujeon.seantour.com</p>
<p>교통편</p>
<ul>
<li>승용차: 경부고속도로 → 언양IC → 울산고속도로 →신복로타리(방어진방면) → 태화로 → 강변로 → 아산로 → 성내삼거리(좌회전) → 염포사거리(우회전) → 남목사거리 → 안산삼거리 → 마성터널 → 주전마을</li>
<li>대중교통: KTX울산역(5002번 리무진버스) → 남목1동 정류장(주전방향 411번, 121번 버스) → 주전마을</li>
</ul>
<p> </p>2017-09-08T06:21:31.000Z2017-09-08T06:30:44.000Z관리*삼별초 항쟁지 자부심 담은 이름 해송 사이로 부는 바람, 갯벌 조개체험, 솔숲 캠핑 인기 태안 병술만 마을<p>삼별초 항쟁지 자부심 담은 이름</p>
<p>해송 사이로 부는 바람, 갯벌 조개체험, 솔숲 캠핑 인기</p>
<p>캠핑장 해먹에 누워 파도소리, 바람소리에 흠뻑 태안 병술만마을</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08/20170908150159412_0.JPG" alt="P06-07 병술만마을 캠핑장.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글 송기동 사진 최현배, 태안군청 제공</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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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가족캠핑형 어촌체험마을로 인기</strong></p>
<p>“지인이 여기서 캔 바지락을 주셨는데 너무 맛있더라고요.”</p>
<p>“해송 숲에서 캠핑을 하면서 갯벌체험까지 할 수 있어 좋습니다.”</p>
<p>충남 태안군 안면읍 ‘병술만 어촌체험마을’을 찾은 체험객들은 갯벌 생태체험과 캠핑을 매력 요인으로 꼽는다. 갯벌에서 바지락과 맛조개를 잡고, 바닷가 해송 숲 아래에서 하는 캠핑은 도시에 사는 많은 이들을 이곳으로 이끄는 원동력이다.</p>
<p>서울이나 광주 등지에서 병술만을 찾아가려면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해 홍성 인터체인지(IC)를 빠져나온 후 서산 A, B지구 방조제와 안면대교를 건너 안면도를 남북방향으로 관통하는 국도 77호선 (안면대로)을 타면 된다. 홍성IC에서 체험장까지는 46km, 40분 거리다.</p>
<p>안면도 자연휴양림을 지나며 쭉쭉 뻗어 오른 ‘안면송’에 놀라고, 체험장에 진입하며 울창한 해송 숲에 또 한 번 놀란다. 어촌체험마을에 도착하면 1.5km 길이의 널찍한 모래사장과 갯벌이 눈앞에 시원스레 펼쳐진다. 해송 숲과 사구(砂丘), 백사장 모두 천혜의 자연경관을 갖췄다.</p>
<p>안면도 한가운데 자리한 중장1리 주민들은 지난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병술만 어촌체험마을’을 운영하고 있다. 외지인들에게는 ‘병술만’(兵戌灣)이라는 지명이 낯선데 고려시대(1270~1273년) 몽골에 항거한 삼별초 군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병술만은 만 지형 안쪽에 있던 ‘병술안마을’이라는 지명에서 유래됐다.</p>
<p>태안군지(泰安郡誌)에 따르면 병술안은 ‘병수안’(兵戍內), ‘병수포’(兵戍浦)로도 불렸다. 병수안은 옛날에 군대가 수자리(나라의 변경을 지키는 일) 살던 곳이어서 유래된 이름이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지킬 수’(戍)자를 ‘개 술’(戌)자로 잘못 읽어서 병수안이 병술안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p>
<p>주민들은 어촌체험마을을 시작하면서 행정지명인 중장리 대신 마을 역사를 알리고, 정체성을 살릴 수 있는 ‘병술만’을 쓰기로 했다. 체험장은 마을에서 바닷가 쪽으로 3km 가량 떨어져 있다. 매년 1만 여명이 이 곳을 찾아 갯벌체험을 하고 있다. 2012년 11월에 ‘제7회 어촌체험마을 전진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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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갯벌 바지락</strong><strong>·</strong><strong>맛조개 잡이 인기</strong></p>
<p>“나온다~!”</p>
<p>“내가 잡을래!”</p>
<p>경기도 부천시에서 온 효원이네 가족은 맛조개를 잡으며 신이 났다. 초등 2학년인 효원이와 유치원생인 남동생이 머리를 ‘쑥’ 내민 맛조개를 먼저 잡겠다고 한다. 이를 바라보는 외할머니와 엄마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이들 가족은 하루 전 도착해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하면서, 맛조개잡이 체험에 나섰다. 어린 남매에게 도시생활에서 접하기 힘든 자연생태를 보여주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p>
<p>맛조개를 잡으려면 우선 모래 갯벌에서 맛조개가 만든 작은 구멍을 찾아야 한다. 원형이 아니고 타원형을 하고 있다. 구멍을 찾았으면 호미질을 살살 한다. 한 뼘 가량 파내려가 그 구멍이 커지면 맛조개가 서식하는 곳일 확률이 높다. 이때 천일염을 적당량 뿌리고 기다린다. 그러면 물이 살짝 올라오면서 신기하게도 맛조개가 수직으로 ‘쑥’ 솟아오른다. 맛조개는 길쭉해서 얼핏 대나무 조각처럼 보인다.</p>
<p>집에서 화학 맛소금을 가져와 사용해서는 안 된다. 대신 천일염을 체험마을에서 작은 용기에 담아서 제공해준다.</p>
<p>“맛조개가 소금을 먹고 올라와요. 쪽 올라올 때 손으로 잡아 빼는 거예요. 화학 소금은 염도가 높아 바다가 ‘전멸’합니다. 주변이 오염돼서 맛조개가 죽고 그 새끼까지 다 죽어버려요.”</p>
<p>정성준 어촌계장의 설명이다. 다른 쪽에서는 바지락 잡이가 한창이다. 맛조개가 모래질 갯벌에 사는 반면 바지락은 자갈 섞인 갯벌에 서식한다. 호미질을 하자 검은 빛깔 갯벌에서 바지락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다. 어른들은 바지락을 잡기 위해 부지런히 호미질을 하고, 아이들은 조개껍질을 은신처로 삼은 작은 게나 바다 생물들을 관찰하는 게 더 재미있는 모양이다.</p>
<p>바지락과 맛조개 잡이 체험장은 해변에서 700~800m 떨어진 갯벌이다. 바닷물이 물러나자 체험객들은 병술만 어촌체험마을 앞 전망데크에서 ‘갯벌 셔틀’인 경운기를 타고 체험장으로 이동한다. 체험에 필요한 호미와 장화, 장갑, 바구니 등 필요한 물품은 모두 제공해준다. 체험객들은 그냥 ‘몸만 오면’ 된다. 채취한 바지락은 아이스박스에 담아 집으로 가져갈 수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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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해송 숲에서 파도소리 들으며 자연 만끽</strong></p>
<p>병술만 어촌체험마을 장점은 갯벌체험 외에 캠핑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바닷가 해송 숲에 텐트를 칠 수 있는 목재 데크 40개가 마련돼 있다. 또한 텐트를 가져오지 못하는 가족을 위해 대여 텐트도 준비해 뒀다. 캠핑객들의 편의를 위해 텐트 가까운 곳에 자동차를 주차할 수 있고, 전기콘센트와 식수대, 화장실 등도 갖추고 있다.</p>
<p>“나무가 살 수 없는 모래땅이었어. 그래서 구덩이를 파고 황토를 퍼다가 넣어 (나무를) 한 그루 한 그루씩 심은 거야.”(소중문 이장)</p>
<p>본래 이곳은 사구(砂丘)로 이뤄진 해변이었다. 지금처럼 울창한 방풍림이 조성된 것은 1970년대 진행된 조림사업 덕분이었다. 50여 년이 흐르며 백사장을 품고 있는 해송 숲은 마을의 자랑이 됐고,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도 인기가 높다.</p>
<p>캠핑장을 찾은 가족들은 고기를 굽고 담소를 나눈다. 텐트 옆 나무에 건 해먹에 누워 책을 읽기도 한다. 자연 속에서 가족들과 함께 모처럼 찾은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모습들이다. 해변을 거닐며 해당화와 갯메꽃을 보고, 해송숲 오솔길을 호젓하게 산책해도 좋다. 이곳은 ‘태안 해변길’ 6코스(샛별길)가 지나는 구간이다. 길은 널리 알려진 꽃지 해변과 이어진다.</p>
<p>밀물 때가 되자 끊임없이 파도가 밀려온다. 텐트 안에 누워 잠결에 듣는 해조음(海潮音), 도시에서 들을 수 없는 자연의 음악이고 노래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살짝 낀 바다안개가 캠핑장을 더욱 운치 있게 만든다. 직접 채취한 바지락과 맛조개를 요리해 먹으면 캠핑하는 맛이 각별할 수밖에 없다.</p>
<p>병술만 어촌체험마을은 고려 삼별초의 역사를 바탕에 깔고 청정한 갯벌에서 바지락과 맛조개를 잡고, 해송 숲에서 캠핑을 할 수 있는 특별한 매력을 갖고 있다. 생태체험과 역사체험을 하며 ‘힐링’할 수 있는 어촌 체험마을이다.</p>
<p>현재 안면도와 보령을 해저터널과 연륙교로 잇는 사업이 진행 중이어서 머지않아 안면도의 새로운 관광시대가 열릴 것으로 기대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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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일몰</strong><strong>, </strong><strong>공룡박물관 등 주변 볼거리 다양</strong></p>
<p>병술만 어촌체험마을에서 북쪽으로 3km 떨어져 있는 꽃지해변은 일몰로 유명하다. 바닷가에는 할미·할아비 바위가 마주보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에 ‘승언’과 ‘미도’부부가 금슬 좋게 살았다. 그런데 전쟁이 터져 장군 혹은 어부인 남편이 전쟁터에 나가게 됐다. 부인은 남편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다가 바위가 되었다는 애달픈 사연이 전해져 온다. 인근 승언리 방포해안에 ‘염주나무’로 불리는 모감주나무 군락지(천연기념물 138호)가 자리하고 있다.</p>
<p>안면도 자연휴양림(충남 태안군 안면읍 안면대로 3195-6)은 쭉쭉 뻗은 100년 내외의 ‘안면송’을 볼 수 있다. 정부는 1978년 115ha에 달하는 이곳 소나무 숲을 유전자 보전림으로 지정했고, 유엔 역시 ‘세계 100대 숲’ 가운데 하나로 선정했다.</p>
<p>안면도 쥬라기 박물관(www.anmyondojurassic.com, 충남 태안군 남면 곰섬로 37-20)을 찾으면 공룡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스피노사우루스’와 ‘아파토사우루스’ 진품 화석부터 다양한 실물 크기 공룡 모형을 보며 수만 년 전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세계에 대해 배울 수 있다.</p>
<p>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에 맞춰 태안에서 백합의 향연(饗宴)이 펼쳐진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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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태안 병술만마을 여행 Tip</p>
<p>바지락과 맛조개 잡기 체험은 모두 갯벌에서 이뤄진다. 당연히 바닷물이 빠진 시간대에만 가능하다. 간혹 물때를 생각하지 않고 찾아왔다가 발걸음을 돌리는 경우도 잦다. 원활한 갯벌체험을 위해서는 바닷물이 들고나는 시간이 언제인지 ‘물때’ 확인이 필수적이다. 물때표는 해양수산부 국립 해양조사원(www.khoa.go.kr) 홈페이지와 한국어촌어항협회가 운영하는 해양관광 포털 ‘바다여행’(www.seantour.com) 각 어촌체험마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갯벌체험 가능시간은 물이 가장 많이 빠지는 시간(간조) 전후 3시간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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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pan style="font-size: 12pt;"><strong>병술만과 삼별초</strong></span></p>
<p><span style="font-size: 12pt;"><strong>‘삼별초군 수개월 주둔’ 역사 복원작업 추진</strong></span></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08/20170908151206914_0.JPG" alt="P11 병술만마을 병술만과삼별초.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충남 태안군 안면읍 병술만(兵戌灣)은 고려 삼별초(三別抄)군의 주둔지였다.”</p>
<p>학교에서 배운 역사 지식으로는 생소한 내용이다. 고려 삼별초는 강화도의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하자 1270년(고려 원종 11년) 음력 6월 1일 봉기한다. 그리고 이틀 후 강화도를 떠난다. 1000여 척의 전함에 2만~3만 명의 백성들을 태우고 인천시 옹진군 영흥도와 병술만을 거쳐 진도로 남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도에 상륙한 때는 강화를 떠난 지 70여 일 후인 8월 19일이었다. 진도 용장성에 자리를 잡은 삼별초는 이듬해 5월, 여몽 연합군의 공격을 받는다. 김통정 장군과 일부 병사들이 탈출해 제주도에서 항쟁을 계속하다 1273년 4월, 장렬히 순절한다. 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은 대부분 이러한 내용이다. 그런데 안면도 병술만 인근에서 잃어버린 삼별초의 역사 한 페이지를 만날 수 있다.</p>
<p>전 ‘사상계’ 주간을 지낸 홍영유 선생은 안면도 병술만 주변의 삼별초 흔적을 찾아 역사복원 작업을 시도했다. 그리고 지난 2016년에 조사·연구 결과를 60페이지 분량의 책자(안면도 병술만 일원의 지명유래와 그 역사성)로 펴냈다.</p>
<p>그는 병술만에 대해 “천연의 해상 요새로 바다로부터 감춰져 있어 적의 습격에 대비하기 좋은 곳이며, 바람의 피해도 최소로 줄일 수 있는 지점”이라고 파악했다. 역사서에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지명에서 삼별초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었다. 현재 병술만 주변에는 석성(石城)터를 비롯해 ‘병술안’(군 야영지 및 훈련장), ‘망대’(초소), ‘둔두리’(군 지휘부 및 주둔지), ‘발검배’(훈련기지 및 주둔지), ‘유황맞이’(삼별초가 왕으로 추대한 왕족 승화후 왕온을 처음으로 맞은 곳), ‘마장터’(기마군 주둔지) 등 삼별초와 관련된 옛 지명이 고스란히 남아있다.</p>
<p>홍 선생은 “병술만은 적어도 39년간 강화도 정부의 병참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교두보였으며 요충지였다”면서 “이곳(병술만)에 삼별초 의거군이 진주하기 전에는 자체 방어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만이 상주했을 것으로 보인다. (중략) …의거군이 진도로 떠난 후에도 병술만은 그들의 군사활동 전방기지로서 역할이 있었을 것이다”고 주장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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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안면도 어촌의 옛 모습과 조업 방식은?</p>
<p>용왕제 올리고 독살·건강망으로 고기잡이</p>
<p>바닷물 솥에 끓여 자염 생산</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08/20170908151637386_0.JPG" alt="P13 병술만마을 독살모형.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중장1리는 농사와 어업을 함께 하는 반농반어’ (半農半漁)마을이다. 주민들은 벼농사 외에 밭농사로 고추와 마늘, 고구마, 깨를 주로 재배한다.</p>
<p>어민들은 과거에 소형어선을 이용해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거나 지주식 김(해태) 양식을 활발하게 했다. 또 갯벌에서는 독살을 설치해 고기를 잡고, 맛좋은 백합을 캤다. 하지만 1990년대에 만 안쪽 바다를 막는 간척사업을 하면서 바다환경이 바뀜에 따라 김 양식과 독살을 할 수 없게 됐다. 현재 어민들은 김 양식 대신 공동어장에서 바지락과 해삼 양식을 하고 있는데 봄과 가을에 수확한다.</p>
<p>중장1리 상촌주민들은 매년 정월대보름 때 마을뒷산에서 마을 안녕과 풍어를 비는 당제를 지내왔다. 정월초 용날(辰日)에는 ‘유왕제’를 지냈다. 이곳에서는 용왕을 ‘유왕’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1970년대 새마을 운동 이후 모두 맥이 끊겼다. 그나마 중장 1리 ‘유왕마지’에 옛 용왕제 흔적이 이름으로 남아있다. “유왕마지란 지명은 ‘용왕을 맞이한 곳’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예전에 용왕신을 맞이하여 어선의 안전 항해와 풍어를 기원하는 유왕제를 지낸 까닭에 유왕마지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태안군지 5권 ‘지명과 마을이야기’ 중)</p>
<p>소중문 이장은 “당제를 지내고 나서 동네사람들이 자기집 장독대에서 돼지날 밤에 ‘터제’(토지제)를 지냈고, 고기를 잡는 사람들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용왕에게 풍어와 어로의 안전을 비는 ‘유왕제’(용왕제)를 지냈다”고 말했다.</p>
<p>안면도에서 어떤 어법이 행해졌는지를 알려면 고남 패총박물관을 찾으면 된다. ‘태안 고남리 패총유적’은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1988년부터 1998년까지 9차례의 발굴을 통해 화덕시설을 갖춘 긴 네모형 집터를 비롯해 토기, 뼈바늘, 조개장신구 등 많은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p>
<p>조개무지(패총)를 분석해 보니 대부분 굴로 이뤄져 있었고, 바지락과 피뿔고동, 대수리 등이 섞여 있었다. 또 다양한 종류의 생선 뼈와 동물 뼈도 발굴됐다. 이러한 유물을 통해 선사시대인들의 어로 방법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p>
<p>태안지역에서는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잡는 것 외에도 갯벌에서 조류를 따라 오가는 고기들을 잡는 독살(돌살)과 주목망(柱木網), 건강망(建綱網) 등 다양한 방식으로 고기를 잡았다. 선사시대부터 최근까지 이어져 내려오며 행해진 전통 어법이다. 박물관 내에 모형으로 전시돼 있다.</p>
<p>‘독살’은 돌을 제방처럼 높이 쌓아 물고기를 잡는 원시적인 어로방법이다. 한자로 ‘석방렴’(石防簾)이라고 한다. 밀물 때 들어왔다 썰물 때 돌담에 갇힌 물고기를 뜰망으로 떠서 잡는다. 태안은 현존 최대의 독살 밀집 분포지대로, 95개의 독살군이 형성돼 있었다고 한다.</p>
<p>‘주목망’은 굵은 통나무를 기둥처럼 세우고 그물을 설치해 고기를 잡는 정치망이다. 조류방향에 따라 그물 입구를 돌릴 수 있어서 밀물과 썰물 때 모두 고기를 잡을 수 있다. ‘건강망’은 갯벌에 나무말뚝을 박고 그물을 설치해 밀물 때 들어온 물고기가 썰물 때 그물에 갇히게 해서 잡는 어법이다. 남해안 ‘개막이’와 같다. 주목망과 건강망은 같은 원리지만 차이가 있다. 건강망은 일자로 그물을 펼쳐놓지만 주목망은 긴 자루모양(원추형) 그물 여러 개를 나란히 설치한다.</p>
<p>특히 조선시대 태안반도는 ‘자염’(煮鹽) 생산의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자염은 갯벌에서 염도를 높인 바닷물을 솥에 끓여 소금을 만드는 우리나라 전통 제염법이다. 최근 들어 어촌체험마을이 활성화되면서 전래돼 오다 산업화에 밀려 잊혀지고 맥이 끊긴 옛 친환경적인 어법들도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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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용왕제 및 달집태우기(위)와 전통 어법인 ‘독살’의 재현 모형.</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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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진설명</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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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해송숲에서 텐트를 치고 가족들과 담소를 나누는 체험객들. 병술만 어촌체험마을은 조개캐기 체험과 함께 파도소리를 들으며 캠핑을 할 수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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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08/20170908150321276_0.JPG" alt="P08 병술만마을 갯벌체험.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가족과 함께 병술만 어촌체험마을을 찾은 자매가 갯벌에서 호미를 들고 바지락을 캐고 있다. 갯벌은 책에서만 봤던 생물을 직접 보고, 만져볼 수 있는 어린이들의 산 교육장이기도 하다.</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08/20170908150346002_0.JPG" alt="P09 병술만마을 맛조개체험.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 손수 잡은 맛조개를 두 손에 들고 뿌듯해 하는 남매.</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08/20170908150803634_0.JPG" alt="P09 병술만마을 소중문이장.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소중문 병술만 어촌체험마을(중장1리) 이장.</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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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08/20170908150855676_0.JPG" alt="P10 병술만마을 어촌체험마을사무실.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08/20170908150914136_0.JPG" alt="P10 병술만마을 안면도자연휴양림.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해송 사이로 보이는 어촌체험마을 전망대와 사무실.(위)</p>
<p>안면도 자연휴양림 내 도보길. ‘안면송’을 비롯해 많은 나무와 식물들을 보며 ‘힐링’할 수 있다.</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08/20170908151118304_0.JPG" alt="P11 병술만마을 안면도쥬라기박물관.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안면도 쥬라기 박물관에서는 신비한 공룡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p>
<p>해넘이가 아름다운 꽃지해변 할미(오른쪽)·할아비 바위.</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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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태안 병술만마을은</p>
<p>“병술만 바지락 한 보따리면 쌀이 한 보따리”</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08/20170908151354092_0.JPG" alt="P14 병술만마을 하늘에서바라본모습.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안면도는 우리나라에서 6번째로 큰 섬이다. 본래는 섬이 아니라 태안반도 남쪽으로 불쑥 나온 ‘안면소’(고려시대) 또는 ‘안면곶’(조선시대)으로 불리는 육지였다. 그러면 안면곶이 안면도로 변한 것은 언제쯤 일까? 조선 인조대(1623~1649)에 현재 안면도와 남면 사이 잘록한 부분을 굴착해 ‘판목운하’(일명 백사수도)를 개통하면서부터이다.</p>
<p>이곳에 뱃길을 낸 까닭은 세금으로 거둔 쌀과 공물을 싣고 한양으로 올라가는 조운선들의 안전한 항해를 위해서였다. 태안비치CC가 있는 안흥항과 가의도 사이 ‘안흥량’(安興梁)과 병술만 어촌체험마을 남쪽 외도앞 ‘쌀썩은여’ 두 곳은 조운선들의 난파가 잦은 험한 뱃길이었다. 운하가 완성됨에 따라 충남 홍성 등지에서 안면곶을 따라 돌지 않고 판목운하를 통과해 서해로 빠져나가면 200여 리의 뱃길을 단축할 수 있었다고 한다.</p>
<p>이후 330여 년이 흘러 태안군 안면읍 창기리와 남면 신온리를 잇는 자리에 안면교(1970년)와 안면대교(1997년)가 놓이며 연륙됐다. 또 2013년에는 안면읍 백사장항과 남면 드르니항을 연결하는 길이 250m의 해상 인도교(대하랑꽃게랑)도 연결됐다. 다리가 없던 시절, 안면도 주민들은 배를 타고 백사장 항과 드르니 항을 잇는 나루를 이용해 육지나들이를 해야 하는 불편을 감내해야 했다.</p>
<p>안면읍은 현재 중장리 등 6개 법정리와 27개 행정리로 형성돼 있다. 중장리 지명 유래에 대해 박재하 사무장은 “안면도의 중앙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중장(中場)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p>
<p>안면도 허리에 해당되는 중장리는 동쪽으로 천수만과 접해 있고, 서쪽으로 황해와 맞닿아 있다. 중장리 마을 역사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수만과 인접한 중장 5리에서 청동기 시대 패총과 석기가 발견된 사실에서 미뤄볼 때 중장1리 역시 유구한 거주 역사를 이어오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p>
<p>중장리는 현재 행정구역 편제상 6개 행정리로 구성돼 있다. 병술만 어촌체험마을을 운영하는 마을은 6개 리 가운데 중장 1리로, 상촌·중촌·하촌·시목동·유왕마지로 나눠져 있다. 마을 주민 수는 2016년 기준 146가구 278명(남자 130, 여자 148명)이다. 이 가운데 190명이 농사를 짓고 있다. 나이별로 살펴보면 65세 이상 156명, 15~64세 114명, 0~14세 8명이다.</p>
<p>중장1리 어촌계(어촌계장 정성준) 회원은 154명(남자 60, 여자 94명)이다. 인가된 어장은 바지락 21.7㏊, 전복·해삼 5㏊, 가무락조개 2.5㏊이다.</p>
<p>특히 병술만에서 생산되는 바지락은 맛이 좋기로 이름이 높다.</p>
<p>이에 대해 소중문 이장은 “바지락은 바닷물에만 잠겨 있으면 맛이 없다. 병술만은 뻘과 모래가 섞여 있는 바지락 서식지가 물에 잠겼다 드러났다 한다. 또 만 남쪽과 북쪽에서 유입된 민물이 바닷물과 혼합돼 병술만의 유기물 함량이 높다. 그래서 병술만 바지락이 빨리 크고 실하다”고 말했다.</p>
<p>이어 “뻘에서 캔 바지락을 끓이면 뽀얀 국물이 많이 나오지만, 모래 땅에서 채취한 바지락은 뽀얀 국물이 적지만 그게 맛을 좌우한다”고 덧붙였다.</p>
<p>병술만 바지락은 30여년 전부터 대도시 상인들이 직접 와서 사들여 노량진 수산시장에 출하할 정도로 상품성이 뛰어나다. 예로부터 주민들은 ‘병술만 바지락 한 보따리면 쌀이 한 보따리’라고 할 정도로 물물교환을 하기도 했다.올 7월 중순께 타 지역 산이 kg당 2600원일때 병술만 산은 3600원을 받았다.</p>
<p>병술만 바지락은 2010년께 부터는 일본으로도 수출되고 있다. 오후 3시께 냉동 탑차에 상차해 부산항에서 당일 저녁에 출항하면 이튿날 오전에 일본 수산시장에 풀린다.</p>
<p>한편 태안반도를 둘러싼 갯벌은 바지락 밭이다. 그래서 고남면 고남4리 옷점 조개부리마을 과 누동리에서 는 ‘조개부르기제’를 지낸다. 마을앞 갯벌에서 바지락 등 조개가 듬뿍 잡히기를 기원하는 의식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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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하늘에서 바라본 태안 병술만. 간척사업으로 상당 면적이 바다에서 농지로 변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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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배고팠던 시절 허기 달래던 음식 이젠 별미</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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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어부의 밥상 <게국지></p>
<p> <img src="/upload/editUpload/20170908/20170908151447848_0.JPG" alt="P15 병술만마을 게국지.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옛날 어려웠던 시절, 김장철에 동네 분들이 김장을 도와주러 온단 말에요. 그런데 먹을 게 없잖아. 바다가 가까우니까 ‘똘쟁이’를 잡아다가 김장하던 양념에 버무려서 새우 이런 걸 넣고 버물버물해서 지져준 게 ‘게국지’에요. 가을에는 늙은 호박도 넣어요. 여기서는 갯벌에 사는 못난이 게를 ‘똘쟁이’라고 불러요.”</p>
<p>충남 태안군 안면읍 중장1리에서 중앙가든을 운영하는 모병순·강희란 대표의 게국지 설명이다.</p>
<p>게국지는 본래 충남 태안 안면도 주민들이 사계절 즐겨먹던 향토 서민 음식이었다. 6년 전인 2011년 12월에 KBS TV 예능프로그램 ‘1박2일 - 김치특집’에서 소개되면서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방송 이후 이를 맛보고자 하는 관광객들이 늘자 도시인들의 입맛에 맞게 ‘똘쟁이’ 대신 꽃게를 넣으며 개량화했다.</p>
<p>“원래 배추를 살짝 데쳐서 하는 집도 있고, 배추를 겉절이 식으로 담아서 하는 집도 있고 다 틀려요. 가게마다 요리법이 다 다릅니다. 저희는 나름대로 묵은지(김치)로 끓입니다. 묵은 지를 넣으면 국물이 담백해져요. .”</p>
<p>꽃게와 묵은 지 조합에 민물새우, 대하, 콩나물, 버섯, 청양고추 등 재료를 넣고 펄펄 끓인다. 한 숟가락 국물을 떠먹어보니 의의로 담백하고 시원하다. 된장은 풀지 않는다. 꽃게에서 육수가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펄펄 끓을 때 마지막으로 들깨가루를 한 숟가락 넣는다.</p>
<p>안면도를 여행한다면 게국지를 맛봐야 한다. 바다와 육지 재료가 융합돼 탄생한 새로운 별미다.</p>
<p>가격 대 6만원, 중 5만원, 소 4만원(2인).</p>
<p>중앙가든_충남 태안군 안면읍 안면대로 3489 / 041-673-0703</p>
<p>서해안 가든 _충남 태안군 안면읍 안면대로3485 / 041-673-601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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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
<p>찾아가는 길</p>
<p><img src="/upload/editUpload/20170908/20170908151532858_0.jpg" alt="P15 병술만마을 지도.jpg 이미지입니다." width="100%" /></p>
<p>주소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 병술만로 175-20</p>
<p>전화번호 041-673-6191</p>
<p>홈페이지 byeongsul.seantour.com</p>
<p>교통편</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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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승용차: 서해안 고속도로 → 홍성IC(안면도 방면 천수만방조제) → 국도77호선 → 병술만 어촌체험마을</li>
<li>대중교통: 안면도 버스터미널 시내버스 → 육개 승강장(병술만 입구) 하차</li>
</ul>2017-09-08T05:49:04.000Z2017-09-08T06:18:48.000Z